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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할 자아, 죽일 수 없는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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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할 자아, 죽일 수 없는 자아
  • 정윤석
  • 승인 2012.09.2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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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일이었다. 모 이단단체에 소속했다는 사람이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주로 이단자들은 기자에게 항의하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협박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약간 달랐다. 기자가 쓴 기사에 항의할 요량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시종 침착했다. 그저 기자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할 뿐이었다.

기자를 만나던 날 그는 자신이 언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구원을 얻었는지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단체가 이단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자도 구원받은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기자는 나의 신앙에 대해 설명했다. 나의 죄인됨,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승천·재림에 대한 신앙과 그분을 만나고 나서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설명했다.

그러자 마치 전략이 수정되듯 그 사람의 얘기가 약간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강조하고, 그것으로만 구원된다고 말하는 듯했던 그가 특정 성경구절을 찾아서 보여 줬다. 사람의 생각 자체가 죄악되다는 말씀(창 6:5)이었다. 말씀 자체는 맞는 것 같았지만 그는 뭔가 다른 의도를 갖고 있었다. 마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만 갖고는 뭔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사람의 생각 자체가 죄악된 것이니 인간의 자아를 완전히 소멸하고 죽여야만 참된 구원이 된다는 식으로 연결시켰다. 그는 나에게 이처럼 자아를 죽였느냐고 물었다.

기자는 이와 유사한 얘기를 태국에서 20여 년간 선교사역을 했다는 B선교사를 만난 자리에서 또다시 들었다. 2009년의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속죄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데 핵심이 있지 않았다. 그는 그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요구했다. 그것이 바로 자아의 죽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듯이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 받은 게 아니다. 그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으니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지, 착하게 살아야지’ 하면서 자아의식을 갖고 뭔가를 결정하려고 할 때, 즉 자아가 살아 있을 때 그 사람은 참으로 구원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착하게 살겠다고 결정하고 고백한 것은 ‘나’이기 때문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게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이런 주장은 우리 주변에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때때로 접하게 된다.

기자가 취재한 자칭 사도라는 C씨에게서도 ‘자아를 죽여야 한다’는 개념이 나온다. C씨도 자아를 버릴 것을 강조한다. C씨에게서 자아는 버려야 하는 것이기에 자아실현과 관련한 모든 일은 당연히 정죄될 수밖에 없게 된다. C씨는 미래를 설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없다고 정죄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이고, 자기가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심지어 부부애, 가족애도 그 본질은 곧 ‘자기 사랑’이라고 정의하면서 정죄한다. 남을 사랑하는 것, 심지어 가족을 사랑하는 것조차도 그는 당신을 통해 내가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자기 사랑의 표현이라며 지옥으로 가게 하는 파멸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모두 자아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서 비롯되는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주장이다.

위에 언급한 주장들을 정리한다면 이 사람들에게서 ‘자아’는 죄를 행하는 옛 사람이나 죄악된 본성이라기 보다 뭔가를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의 의식 자체를 의미한다. 과연 이러한 자아를 죽이는 것이 참된 구원일까? 과연 하나님은 이러한 자아를 죽이고 깨뜨려 버리길 원하실까? 자아는 그처럼 쓸모없는 것일까?

첫째, 인간이 ‘나’임을 의식할 수 있는 자의식, 자아, 육체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자아는 통상적으로 인간의 주체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자아의식 유발의 중심주체, 지각 및 인지 기능의 소유 주체, 도덕적·종교적 행위의 책임 주체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자아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인간의 본질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모든 다른 피조물로부터 구분되며, 모든 피조물의 왕의 입장에 선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창조되었으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라고 말한다”(벌코프 조직신학, 1994,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 416).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나’란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피조물이란 사실이다. 생각하고 이해하고 경험하고 의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인간 존재를 만드시고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말씀하셨다.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잔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자아 자체를 죽여야 하고 말살해야 하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송인규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경우에 전제된 것은, 범죄하거나 회개하거나 용서받는 과정에서 우리가 동일 인물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경우에 전제된 것도, 간구하고 응답을 받는 때의 우리가 동일 인물이라는 점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행실에 따라 상급, 구원, 심판을 베푸실 터인데, 이것 역시 우리가 같은 자아를 가진 동일 인물이며 우리의 종교적 행위에 대한 책임적 주체라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아의식이건 지각과 인지 등 정신적 기능이건 혹은 도덕적·종교적 책임의 문제이건 그 밑바닥에는 ‘자아’라는 실체가 깔려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자아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온당한 인간 이해에 많은 차질이 생길 것이다”(송인규,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IVP, 1997, p.26).

둘째, 자아를 가진 것 자체가 죄이고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이 구원 못 받은 것이라면 ‘바울’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된다.

성경을 보면 바울은 자신에 대해 많은 표현을 한다. 때로 자신에 대해 약점을 드러내기도 한 반면 장점을 부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약점이든 장점이든 부각시키는 바울의 ‘자의식’이 죽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고전 15:8~10 사이에선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한다. 바울의 자아가 죽어 있는 게 아니다. 반면 강점도 부각한다. 그는 부활한 주님이 ‘내게도 보이셨다’고 말한다. 10절에선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말한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자기 자랑’인데 자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인 셈이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분 죽을 뻔 하였으니”(고후 11:22~23).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욱 수고했다는 말도 한다. 만일 자아, 자아의식이 살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이 맞다면 자아의식을 드러낸 바울도 구원받은 게 아니다.

타락 전에도 아담은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라고 찬사를 보낸다. 피조물에 대해 ‘아름답다’고 감동하고 감탄사를 내놓을 수 있는 자아는 타락 전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해 이토록 멋진 감탄사를 내놓은 생각의 주체자로서의 아담의 자아는 그 자체가 죄악된 것이었을까? 나라는 존재, 자아의식, 자아감, 인간애, 인간에 대한 특정한 고백을 하는 ‘나’란 존재는 부정해서도 말살할 수도, 깨뜨릴 수도 없다.

셋째,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기를 부인하라’(눅 9:2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등의 말씀은 자아 자체를 죽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악’, ‘죄악된 나’에 대해 부정하고 죽일 것을 의미한다.

언뜻 듣기에 자아를 죽이라는 말씀은 성경적인 사고로 들리기도 한다. 예수님도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말씀이 인간의 자아의 죽음과 멸절에 대해 말씀하고 있을까?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도 자아 자체를 죽여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주체도 ‘나’이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존재도 결국은 ‘나’이다. 그리스도를 좇아야 하는 것도 ‘나’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에서조차 ‘나’란 존재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 십자가를 져도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자기 부인은 나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고 오직 나란 존재가 하나님만 신뢰해야 한다는 의미이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부인하고 죽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갈라디아서 2:20을 살펴보자. 자아를 죽여야 한다는 식으로 인용되는 너무도 유명한 말씀이다. 이 말씀의 참 뜻은 다음과 같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바울은 자아가 대치된다 또는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는 같은 절에서 계속하여 말하기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였다. 바울의 ‘나’는 계속 살아 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고 사라져서도 안된다. 더욱이 본문의 문맥은 바울이 이신득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19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라고 하였는바 바울은 이제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려고도, 자기 자신을 세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의 삶은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으며 그분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차 있다. 20절은 이 점을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자신의 의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그리스도를 그의 전생애의 근원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제 그의 실존의 핵심인 것이다”(레날드 맥컬리·제람바즈, <인간 하나님의 형상>, IVP, 1992년, p.59).

갈 2:20 말씀은 자아를 죽여서 완전히 멸절시켜야 한다는 말씀, ‘나’란 존재 자체가 무념무상의 세계로 없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내 모든 삶이, 全생애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겉사람과 속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롬 7:17~23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의 마음 가운데 선을 행하려는 나(자아, 속사람)와 악을 행하려는 나(자아, 겉사람)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속사람을 영혼이나 영혼의 인격으로 보거나, 겉 사람을 자아나 육체적 인격이라며 분리시켜서, 겉사람, 곧 자아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 사상이 아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가 대적해야 할 자아에 대해 말씀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죄에 속한 본성’과 ‘죄를 행하려는 옛사람’을 의미하지 존재론적인 자아를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자아 그 자체가 아니라 자아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치는 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은 자아가 아니라 죄인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간혹 금욕주의와 자아를 혼돈한다”(위의 책, p.53).

넷째, 자아를 죽이라는 것은 육체 자체를 죄악시한 헬라 철학에서 유래한 잘못된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플라톤의 사상체계 안에서 읽혀졌다. 3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와 죄악을 완전히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 3:5)는 바울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사막에 기둥을 세워 놓고 그 위에 앉아 있거나 동굴 속에 들어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위의 책, p. 48).

“육체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견해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물리적 피조물이 ‘매우 좋다’고 하셨다. 우리의 물리적 특성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닌 구조의 일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즐겨야 한다. ···우리의 육체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고(고전 6:20), 우리의 육체를 산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롬 12:1~2)은 곧 그리스도인의 소명인 것이다. ···

하나님께서 육체에 부여하신 위대한 가치는 육체의 부활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났다. 우리는 영원토록 육체적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가장 이원론적인 것처럼 생각되는 단락이 사실은 플라톤의 사상과 정반대되는 것이다(고후 5:1~5)”(위의 책, p. 60).

한국교회 언저리에는 자아 의식 자체가 죄악된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하고 의지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려는 자아 자체를 인간의 죄악된 본성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는 다르다.

워치만 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 글을 읽어 보자.

“그(워치만 니를 의미함: 편집자주)의 주장을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사람이 가장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자아, 곧 지정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경시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스러운 동정심과 온화함조차도 단지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죄악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혼란이다”(류영준, 워치만 니의 삼분적 인간관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석사논문, 2005년).

옥합을 깨뜨려야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자아를 죽여야 속사람에 갇혀 있는 영을 얻어낼 수 있다는 사상은 성경이 아니라 워치만니에게서 비롯된 비성경적인 사상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워치만 니를 의미함: 편집자주)에 의하면 우리의 속사람은 덮개로 덮여 있는 것처럼 감금된 상태에 있는데 밖으로 뚫고 나오는 훈련을 하지 않는 한, 결코 속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옥합을 겉사람으로 향유를 속사람으로 비유하면서 옥합이 깨지지 않으면 결코 향유가 흘러나올 수 없듯이 겉사람이 깨어져야만 속사람이 흘러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 그가 말하는 ‘겉사람의 깨어짐(파쇄)’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름 아닌 그가 혼의 기능으로 여기는 지·정·의를 무력화하는 작업이다”(위의 논문 중).

그러나 우리가 자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함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생명과 그 생명의 육신적 구현이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신 것을 가르치며 몸이 부활할 것을 희망한다. 이러한 가운데 기독교신앙은 세계 종교들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물질을 중시하는’ 종교임을 보여왔다. 자아도 마찬가지다. 자아를 죽여야 한다면 죄악된 나, 죄악을 행하려는 옛 사람에 대한 죽음, 과거의 구습에 속한 자아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아의식 자체나 나를 나로 의식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면 그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혼란만 가중시키고 자아상의 파괴를 가져올 뿐이다.

 

참고 서적
벌코프 <조직신학>,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송인규,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IVP, 1997
레날드 맥컬리·제람바즈, <인간 하나님의 형상>, IVP, 1992년
홍영주,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이버공간(Cyberspace)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가상현실 속의 자아정체성을 중심으로”, 숭실대학교, 기독교문화학 석사 논문, 2009
김일영,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성화와의 관계”, 총신대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9
황숭연, “성경적 상담을 통한 자아정체성의 회복이 배우자 선택의 기준에 미치는 영향”, 총신대 상담대학원 석사논문, 2006
류영준, “워치만 니의 삼분적 인간관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석사논문,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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