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헌 목사(생수교회, 46)는 칼바람이 부는 오늘도 신도림동 길거리에서 담배꽁초를 줍는다. 목사가 길거리에서 왜 담배꽁초를 주울까? 조금이라도 지역 사회를 섬기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꽁초만 주웠다. 이제는 쓰레기도 줍는다. 하루 이틀 한 게 아니다. 지금까지 500일 정도를 거의 매일을 빠지지 않고 해왔다. 비닐 봉투와 집게를 들고 띠에는 “예수님 믿으세요”, “생수교회”라는 띠를 두른다. 시끄러운 전도보다 섬기는 게 중요한 시대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일명 '꽁초 전도대'사역이다. 이 목사는 이렇게 5년간 해보자는 생각이다.
처음에는 잠깐 하고 말겠지 했던 주민들도 이제 이 목사를 알아 볼 정도가 됐다. 쳐다도 안 보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는데 유심히 보고 있었다. 얼마 전 안경을 맞추러 갔다. 안경점 사장이 이 목사를 알아보고 40%를 싸게 해줬다. 통닭집 사장은 음료수를 서비스하기도 했다. 따끈한 꿀물을 마시라며 갖다 주는 사람도 있다. 대형교회도 찾아가지 않던 동장이 공장지대에 위치한 생수교회는 두 차례나 다녀갔다. 구로역과 신도림역 인근에 위치한 공장의 사장들도 이제 이 목사를 보면 정중히 인사한다. 어느덧 이 목사와 생수교회는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을 받아가고 있다. 담배꽁초를 500일 동안 주우면서 생긴 일이다. 이 모습을 보고 교회에 등록한 가정도 10가정이 된다.
매주 화요일은 30여 명의 교회 전도팀도 함께 꽁초 줍는 일을 돕는다. 부목사를 비롯한 교역자들도 담배꽁초 줍는 일에 나선다. 학교 선생님도 봉사활동을 하자며 자기 반 학생들을 데리고 나와 동참한 적도 있다. 이 목사는 이제 쓰레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 정도라고 한다. 그는 묵묵히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더욱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들어온 헌금 중 50%는 쌀 2포대씩 40여 가정에 돌렸다. 11가정에는 직접 현찰을 쥐어줬다.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지 못하고 전기장판 신세를 면치 못하는 가정이었다. 전기세가 만만치 않은 그들에게는 현찰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다. 나머지 50%는 미자립교회를 위해 썼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2월 8일 이 목사는 넥타이에 와이셔츠를 했다. 하지만 겉옷은 두툼한 방한복을 입었다. 인터뷰를 하고 공장 사람들과 함께 백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다음 이 목사는 곧장 담배꽁초를 주우러 나갈 채비였다. 추운 겨울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그의 입술 끝은 작은 염증으로 빨갛게 터져 있었다.
이 목사의 신장은 하나밖에 없다. 오른쪽만 신장이 있다. 이 사실을 대학교 4학년 때 알았다. 의사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동안 새벽기도를 하겠다”고 말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미쳤냐’는 것이었다. 집에서 푸욱 쉬라고 충고했다. 그 말대로 푹 쉬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몸이 더 안 좋아졌다. 그리고 절망이 찾아왔다. 하나님께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며 원망했다.
그런데 다시 일주일이 지나면서 ‘이것도 은혜다’라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의사 말대로 해서 안 좋아졌다면 지금까지 지속했던 새벽기도를 드리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새벽기도를 드렸다. 몸이 거짓말처럼 좋아졌다. 이 새벽기도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는 하루하루 목숨 걸고 새벽기도를 하고 있다.
이 목사는 다이내믹한 사역자다. 신장은 하나지만 사역은 더블로 한다. 이 목사의 사역은 그렇게 표현할 만큼 폭발적인 데가 있다. 노량진의 강남교회(송태근 목사)에서 청년부 사역을 시작하던 2000년 당시 청년들이 160~170여 명 정도가 들쭉날쭉 모였다. 사역지를 옮기던 2005년 쯤 청년들은 1천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심방을 다니기 위해 노량진 고시촌의 지도를 그렸다. 어떤 고시원이 어디에 있는지 표시했다. 그곳에 사는 청년의 이름을 적고 심방을 다녔다. 다니면서 교회 안다니는 청년들과도 대화했다. “너희 강남교회 아니?” 반수는 안다고 했고 반수는 모른다고 답했다. 그러나 “교회가 뭐 해줬으면 좋겠니?”라고 물었을 때 같은 답이 돌아왔다. “밥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목사는 청년들에게 밥을 지어줬다. 이게 노량진 강남교회의 명물이 될 줄은 몰랐었다. 당시 강남교회 청년들 200여 명이 새벽기도에 참석했고 아침 밥을 먹고 공부를 하러 갔다. 교회 다니지 않았지만 강남교회 밥을 먹고 공무원 시험, 임용고시를 본 사람도 상당수였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어떤 청년이 불쑥 이 목사를 찾아와 흰 봉투를 내밀었다. “10만원입니다.” “이걸 왜?”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불교를 믿어요.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서 주는 밥을 먹고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발령이 났는데 떠나기 전에 제 뒤에 밥을 먹을 사람들을 위해 이 돈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경기도 광명 신광교회에서 청빙을 받아 담임목회를 시작했다. 2005년 9월이었다. 당시 출석 신도가 350여 명이었다. 2009년 교인 수는 890여 명으로 늘었다. 가히 폭발적인 성장이었다. 그 후 이 목사는 신도림역과 구로역 사이 공장지대에서 23명의 신도들과 2009년 10월 교회 개척을 했다. 테이블을 하나 놓고 둘러 앉아 예배를 드렸다. 교회 화장실이 지저분해 길 건너편 은행에서 볼일을 봐야 할 정도로 시설이 낙후했다. 밤이 되도 교회 계단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옥상에는 물탱크가 있어서 빗물을 받아서 청소를 했다. 그런데 이 자리가 차고 넘쳐 지금은 어른 신도 200여 명, 아이들까지 다 합하면 300여 명으로 늘었다. 주일 예배를 9시, 11시, 2시 3부에 걸쳐 예배를 드린다. 지역 사회를 돕는 교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의 성경책에는 수년 동안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말씀이 책갈피로 사용됐다. 의사는 오른쪽 하나 달린 신장으로는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다. 당시 발급했던 진단서 뒤편에 빨간 볼펜으로 꾹꾹 눌러 말씀을 쓱쓱 적어 넣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 하나님은 그에게 온전한 신장을 허락지 않으셨다. 그래서 쉽게 피로하다. 가시 같은게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목숨을 걸고 새벽기도를 한다. 올 한해를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해’로 정했다. 성도들도 새벽에 40~60여 명이 나와 함께 기도한다. 생수교회에는 은혜의 강이 생수처럼 넘친다. 하나님의 은혜를 얘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정도의 얘기들이 생수처럼 넘치고 있다. 약한 데서 온전해지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다.
이성헌 목사는 총신대학교신대원(85회)을 졸업하고 서울 노량진 강남교회 청년부 사역(2000년~2005년)과 경기도 광명 신광교회에서 담임목회(2005년~2009년)를 하고 신도림동에 생수교회를 개척(2009년 10월)했다. 목회철학은 에스겔 47장 9절에 근거해 ‘물철학’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가 되고 나선 섬겨야 한다. 그 섬김을 통해 또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 제자가 되고 또다시 섬긴다. 이런 순환을 통해 성전 문지방에 있던 물이 발목과 무릎과 허리를 넘어 광야에 강을 이루고 그 주변에 촌락이 구성되고 죽었던 사해가 산 바다로 소성하는 판타지를 이 목사는 꿈꾸고 있다. 표어는 ‘복된 만남 속에 성숙하며 섬기는 교회’다. 조경희 사모와 슬하에 영광(아들, 대1), 찬송(딸, 고3)이가 있다. 에베소서 1장 12절 말씀을 읽으며 결혼 전부터 지었던 이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