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대 강대국과 연결해서 보는 요한계시록 배경사
요한계시록 총론 1강. 묵시문학 이해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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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목사님, 요한이 자기가 쓴 계시의 뜻을 어떻게 알았다는 거죠? 요한은 그저 성령님이 불러주는 대로 기계처럼 받아 적었을 뿐이잖아요."
교회에서 요한계시록 10주 과정 성경공부가 막바지를 향해 가던 8주 차, 한 성도님이 작심한 듯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소위 이단이라 불리는 곳에서 가르치는 ‘기계적 영감설’을 우리 교회 성도님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당황스러움을 넘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지금까지 8주 동안 나는 무엇을 가르쳤고, 저분은 무엇을 배우신 걸까?'
깊은 자괴감이 밀려왔습니다. 동시에 뼈저린 후회가 남았습니다. 성경공부 초반에 요한계시록이 쓰인 시대적 배경과 전체적인 숲을 더 세밀하게 보여드렸더라면, 이런 질문은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었죠.
이 '요한계시록 총론'은 바로 이런 고민과 반성에서 시작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좀더 폭 넓게, 예배와 경배와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소망으로 읽어내기 위해 다음과 같이 네 단계의 강의를 준비했습니다.
제1강 [역사의 맥락]: 애굽부터 로마 제국까지, 이스라엘의 수난사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경험한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어떤 의미와 느낌으로 다가왔을지 고민하며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제2강 [구조와 상징]: 1장부터 22장까지의 핵심 키워드와 숫자를 연결합니다. 숲을 먼저 봄으로써 나무를 이해하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계시록의 1장은 일, 2장~3장은 이, 4장은 넷, 이런 식으로 연결해서 숫자와 키워드를 연결해서 정리했습니다.
제3강 [요한의 시선]: 저자 요한이 100여 회나 반복한 두 동사, ‘보다’와 ‘듣다’를 추적합니다. 그가 과연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인지 따라가면 계시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날 법합니다.
제4강 [분별의 지혜]: 다니엘 12장과 계시록 11장~13장의 ‘한 때 두 때 반 때’, ‘마흔 두달’, 1260‘을 왜곡하여 종말 날짜를 파악한 사람들의 연대기를 파헤치고, 바른 해석의 기준을 세웁니다.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을 모릅니다. 한 번 읽어보고 무시무시한 용어들에 겁먹고 덮어버린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다 읽으면서 요한계시록만 빼고 읽는다는 분도 계십니다. 안다고 해도 이상하게 아는 분들도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을 알고 싶은데 교회에서는 강해하지 않아서 유튜브를 검색하며 자극적이고 잘못된 종말론 영상을 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목사님 몰래 이런 데 빠져서 이상한 요한계시록을 진리라고 믿고 따르는 분들, 요한계시록 강해하기 전에는 조용했는데 목사님께서 강단에서 강해하다보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가 차라리 후자보다 낫습니다. 모르는 게 잘못 아는 것보다 낫습니다. 덮어버린 분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면 하얀 도화지에 색을 칠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쉽습니다. 후자는 이미 공포와 두려움과 비상식적 종말론에 사로잡혀 다시 새로운 내용을 집어 넣으려해도 잘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지만 요한계시록은 교회에서, 목사님께서 먼저 강해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유튜브에서 이상한 종말론에 빠지지 않습니다. 유튜버 중에 정말 이상한 사람들 많습니다.
유튜브 종말론이 대세를 이루는 때, 우리는 사도 요한이 숨 쉬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엉킨 실타래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형사가 영구 미제사건을 해결하려고 할 때 초동수사로 돌아가는 것처럼, 한국교회 성도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내 기준과 관념과 선입견과 위치에서 요한계시록 읽기를 시작하지 말고 요한계시록이 처음 전달되던 그 때, 그 시절, 사도 요한의 심장과 감각과 배경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그 막을 열어보겠습니다.
제 1강 요한계시록 배경사
서론
많은 그리스도인이 요한계시록을 펼치기 전부터 두려움을 느낍니다. 낯선 상징, 피비린내 나는 전쟁,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들, 마치 인류의 종말을 다룬 한 편의 잔혹한 판타지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예 덮어버리거나, 반대로 어떤 이들은 자의적인 해석에 빠져 공포 마케팅의 도구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결코 성도들을 겁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책은 1세기 로마라는 거대 제국의 압제 아래서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우리는 이 고난 끝에 승리할 수 있는가?"를 묻던 성도들에게 주신 가장 뜨거운 '위로의 편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처음 받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당시 수신자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아니라 고대 근동, 종이도 없고, 인터넷도 되지 않고, 자동차도 다니기 전인, 2천년 전, 고대를 살아가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올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있습니다. 바로 '제국의 역사'입니다. 유대인,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새로운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신 계시이지만 그 내용과 언어들은 기원전 1천500년전부터 이스라엘이 관계해왔던 거대 제국들과의 역사 속에서 구성된 언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보다 계시를 처음 받은 사도 요한은 물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을 겁니다.
애굽이 가졌던 제국의 원형, 앗수르가 남긴 피의 트라우마, 바벨론이 저지른 성전 파괴의 비극, 페르시아와 헬라와의 관계에서 생겼던 일, 그리고 로마라는 철의 제국이 가한 현실적 박해. 이 대제국들과의 역사를 모른 채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은, 암호표 없이 암호문을 해독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은 과거 제국들이 보여주었던 '짐승의 속성'을 소환하여, 지금 눈앞의 로마 제국 역시 어떻게 무너질 것인지, 그리고 그 너머의, 역사를 초월한 진정한 왕이신 어린 양이 어떻게 승리하실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 배경사는 요한계시록 본문뿐만 아니라 역사스토리, 요한계시록 주석서, 강해서 등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를 참고했습니다. 듣다보면 어디서 들은 이야기 같다고 하신다면 맞습니다. 어딘선가 들은 내용이 맞으실 겁니다. 그러나 6대 강대국의 스토리와 요한계시록은 제가 연결고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독창적입니다. 아마 어디서도 듣지 못한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한번 들으시면 저보다 잘 이해하고 연결고리를 잘 활용하실 분들이 계실 겁니다. 왜냐하면 이 스토리의 뼈대는 많은 목사님들이 듣고 알던 소위 신구약 중간기, 학자들은 이를 제2 성전기라고 합니다. 바로 그 역사를 토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His Story)'라고 합니다. 고대근동에서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강대국 사이에 끼어 늘 고난을 당하던 약소국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본 역사는 다릅니다. 제국은 자신들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지만, 하나님은 그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도구 삼아 당신의 백성을 빚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가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이 강의는 애굽에서 로마까지 이어지는 제국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 폐허 위에서도 여전히 보좌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제국은 망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 "황제는 죽지만, 우리의 영원한 황제이신 어린 양은 살아 계신다." 이게 제가 생각하는 요한계시록의 핵심입니다. 이를 마음에 새기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 확신이 우리들의 삶을 덮고 있는 '거대 제국과 같은 문제'들을 이겨낼 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제국의 원형이 시작된 곳, 나일강의 '애굽'으로 먼저 떠나보겠습니다.
본론
1장. 애굽(Egypt): 제국의 원형과 ‘제2의 출애굽’
계시록의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한 거대한 역사 여행, 그 첫 번째 출발점은 바로 ‘애굽(이집트)’입니다. 어떤 분들은 의아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 요한계시록은 로마 시대에 쓰였는데, 왜 그보다 수천 년 전에 활동했던 애굽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지만 요한계시록을 펼쳐 든 1세기 성도들은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요한이 묘사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요한계시록 1장), 모세의 노래(계 15장), 피로 변하는 강물(계8, 계16장) 같은 표현들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말이죠. 바로 출애굽기의 기억이 요한계시록 곳곳에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을 ‘제2의 출애굽’ 혹은 ‘영적 출애굽’이라고 부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압제에서 탈출했듯이, 요한계시록은 죄와 사망, 그리고 어둠의 세력들, 마귀 사탄의 포로가 된 우리를 해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책이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자기 소개
1)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성경 역사상 하나님의 백성을 조직적으로 괴롭힌 첫 번째 왕국은 애굽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기원전 3,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깊습니다. 어떻게 고대부터 이런 강력한 제국이 가능했을까요? 바로 ‘나일강의 축복’ 때문입니다. 상류에서 범람한 물이 토지를 비옥하게 갈아엎어 주니, 그 풍요를 바탕으로 거대한 문명이 싹텄습니다. 하지만 그 풍요는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재앙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지내다가 죽은 후 그를 알지 못하는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는 노예로 전락합니다(출1:11). 바로 그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때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모세가 묻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하면, 그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텐데,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출 3:13)
이때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이 짧은 문장에는 “나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는 창조주다”라는 엄청난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2) 요한계시록의 변주: “장차 오실 이”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자기소개를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장으로 가져와 더 역동적으로 설명합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계1:4),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자라 하시더라”(계 1:8)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이 ‘스스로 계셔서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라면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개역 개정판 성경에는 ‘장차 오실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먼 훗날 어떤 시점에 오실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원어는 ‘호 에르코메노스’(ὁ ἐρχόμενος)'입니다. 요한은 이것을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분사형, ‘지금 오고 계시는 분’의 의미로 썼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나중에 갈게’라고 약속만 하고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호 에르코메노스’는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의 현장으로 강력하게 침투해 들어오고 계신다는 역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를 박해 속에 있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이 단어는 얼마나 큰 위로였을까요? 그들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 주님은 먼 미래에나 오시는 분이 아니구나. 지금 고통받는 내 곁으로 달려오고 계시는구나!” 정리하자면,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은 미래에 재림하실 분으로만 계시된 게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다가오시는 분으로 계시됩니다.
이 칭호는 우리에게 재림에 대한 아주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많은 분이 재림을 공포로 느낍니다. 마치 지구와 상관없는 먼 우주에 계시던 무서운 심판자가 도둑처럼 들이닥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개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제도(지금도)’ 계신 분입니다. 재림은 단절된 상태에서 낯설 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도 나와 함께하셨고, 오늘도 내 곁에 계시며, 내 삶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하시는 바로 그 주님이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맞대러 오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계 1장에서 하나님은 ‘이제도 계신 분’으로 먼저 등장합니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를 먼저 쓴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지금 소아시아 일곱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으로 당장 죽게 생겼는데, ‘서머나교회여 용기와 소망을 잃지 말아라. 2천년 뒤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게 진짜 위로가 됐을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수신자는 철저하게 소아시아 일곱교회의 성도들이라는 점입니다.
2. 무서운 데자뷔: 10가지 재앙의 재현
요한계시록을 읽다 보면 “어? 이거 어디서 본 장면인데?” 하는 기시감이 듭니다. 특히 나팔 심판(8~9장)과 대접 심판(16장)이 그렇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출애굽의 10가지 재앙을 요한계시록으로 가져왔습니다.
피로 변하는 물: 애굽의 나일강이 피로 변했듯(출 7:17-21), 요한계시록 8장과 16장에서는 바다와 강물이 피로 변하여 생명체들이 죽습니다(계 8:8-9, 16:3-6).
독종(악한 종기): 애굽 사람들의 몸에 악성 종기가 났던 것처럼(출 9:10-11), 계시록 16장에서 첫째 대접을 쏟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생겨 고통을 줍니다(계 16:2).
우박: 애굽에 불 섞인 우박이 내렸듯(출 9:23-25), 계시록에서도 무게가 한 달란트(약 30~60kg)나 되는 엄청난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계 16:21, 참고 계 8:7).
황충(메뚜기): 애굽의 농작물을 싹쓸이했던 메뚜기 떼(출 10:12-15)가, 요한계시록 9장 다섯째 나팔 심판에서는 전갈의 권세를 가진 ‘황충’으로 등장합니다(계 9:3-5). 차이가 있다면 애굽의 메뚜기는 풀을 먹었지만, 계시록의 황충은 ‘인침을 받지 않은 사람들’만 괴롭게 합니다(계 9:4).
흑암(어둠): 애굽 온 땅에 짙은 어둠이 내렸듯(출 10:21-23), 다섯째 대접이 짐승의 보좌에 쏟아지자 그의 나라가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합니다(계 16:10).
개구리: 애굽 온 땅을 뒤덮었던 개구리 재앙(출 8:2-6)은, 계시록 16장에서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으로 다시 등장하여 마지막 전쟁을 부추기는 미혹의 영으로 묘사됩니다(계 16:13-14).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왜 굳이 지금부터 3,500년 전의 출애굽 재앙을 요한계시록으로 가져와 반복해서 설명할까요?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통해 그 이유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이 재앙은 누구를 향한 심판입니까?
놀랍게도 출애굽의 재앙과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은 면제된 심판’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은 애굽 전역을 치시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던 고센 땅만큼은 철저히 구별하여 재앙이 미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출 8:22)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출 9:4)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출 9:26).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심판들은 명확하게, 모든 인류를 향한 무차별적 징벌이 아닙니다. 심판의 타깃은 명확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나팔·대접 심판은 회개하지 않고 우상숭배와 신성모독을 일삼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한 자들을 타깃으로 합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계 9:4).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 7:3).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16:2).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16:6).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16:9).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16:11).
즉, 이 끔찍한 재앙들은 성도들을 겁주고 두렵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철저히 보호하고 구별하시는지, 그리고 자기 백성을 핍박하고 고통을 주고 회개치 않는 불신앙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심지어 이런 심판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하면 성도들의 하소연과 기도 때문에 시작됩니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8:4-5).
마치 성도의 기도가 하늘에 가득차자 그것을 땅에 쏟는듯한 이미지입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하늘에 차오르고, 그것이 땅에 부어지면서 심판이 시작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분노가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땅에서 올린 기도에 대한 응답임을 보여주고 결국 이 심판이 파멸과 파괴가 아니라 성도들을 보호하고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보여줍니다.
2) 이 심판의 최종 목적은 무엇입니까?
죽이고 파멸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재앙들은 ‘거짓 신들에 대한 사형 선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에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출12:12).
실제 애굽 재앙들은 애굽의 우상들을 정밀 타격했습니다. 나일강의 신은 하피였습니다. 피로 변했지만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다산의 여신은 개구리 머리를 한 헤켓입니다. 그런데 그게 온통 이집트를 뒹구는 흉물이 되었습니다. 곡식과 수확의 신 네페르와 농경·생명·부활의 신인 오시리스는 메뚜기 재앙 앞에 무력했습니다. 질병과 치유를 관장하는 신, 세크메트는 악성 종기를 막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애굽 최고의 신은 태양신 라였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최고로 치는 태양신이 3일간의 흑암 앞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태양신의 완전한 패배였습니다.
고대인들은 강은 강의 신, 다산은 다산의 신, 풍요는 풍요의 신 등 신들의 나와바리가 모두 따로 존재하고 서로의 나와바리를 침범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애굽 재앙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모든 재앙을 모두 다 내리시고, 그 재앙마다 관장하는 신들을 무력화시킵니다. 모든 신을 여호와 한분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던 도시들은 가히 ‘신들의 백화점’이라 불릴 만했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태양신 아폴로에게 기도하고, 아프면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찾았으며, 바다로 나갈 때는 포세이돈(넵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신들의 정점에는 ‘살아 있는 신’이라 불린 로마 황제가 있었습니다. 각종 주화에도 황제의 모습을 새겼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때까지 온통 세상에 신들이 가득차고 넘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재앙들은 이토록 위대해 보이던 로마의 신들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허상’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애굽 재앙이 신들에 대한 심판이라는 의미와 참신 중의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셨듯이 말입니다(출 12:12).
먼저, 로마 황제들이 자신의 수호신이자 아버지로 여겼던 태양신 아폴로(Apollo)를 보십시오. 로마인들은 아폴로가 세상에 빛과 생명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정반대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여섯째 인을 뗄 때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변하여 빛을 잃습니다(계 6:12). 반대로 넷째 대접을 쏟을 때는 해가 사람들을 태워 죽이는 끔찍한 재앙의 도구로 돌변합니다(계 16:8). 그들이 숭배하던 태양이 그들을 지켜주기는커녕 도리어 저주가 된 것입니다. 이는 빛의 주관자가 아폴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한, 버가모 지역에서 성행했던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생각해 봅시다. 지팡이에 뱀이 감긴 형상의 이 신은 ‘구원자’라 불리며 병든 자들의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첫째 대접 심판이 쏟아지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발생합니다(계 16:2). 그토록 자랑하던 치유의 신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자신의 숭배자들을 치료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바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마는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 부르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들의 무역과 번영을 지켜준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지중해에는 배를 통한 무역업이 고도로 발달한 도시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나팔과 대접 심판에서 바다는 죽은 자의 피같이 변하고, 모든 생명체가 죽으며 배들이 파괴됩니다. 바다의 신도, 상업의 신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요한계시록은 이 모든 우상 숭배의 정점에 있는 ‘황제 숭배’를 타격합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주와 하나님(도미누스 엣 데우스 Dominus et Deus)’라 부르게 했고, 곳곳에 승리의 여신 니케의 상을 세워 로마의 영원한 승리를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선언합니다. 진짜 승리는 칼과 창을 든 폭력적 황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임당하셨으나 다시 사신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에게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9장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옷과 다리에 쓰인 이름을 보여줍니다. 그분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로마 황제가 훔쳐 갔던 그 이름의 진짜 주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우주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이 재앙의 파노라마는 지구 파멸과 폭파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서 처절한 재앙과 심판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화려한 문화, 너희를 압도하는 수많은 우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들은 재앙을 막을 수도, 너희를 구원할 수도 없는 가짜들이다. 오직 역사를 주관하시며 심판하시는 참된 신이신 하나님과 어린 양만을 경배하라. 그분만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 당시 성도들과 오늘 우리에게 주는 우주적 선언입니다.
3) 심판 중에 울려 퍼지는 승전가: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
① 영적 출애굽의 클라이맥스: 홍해에서 유리 바다로
앞서 말씀드렸듯 요한계시록은 ‘제2의 출애굽’입니다. 출애굽 사건의 절정이 홍해를 건넌 사건이었다면, 요한계시록은 15장에서 이를 압축해서 설명합니다. 15장의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가에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계 15:2). 이 장면은 출애굽기 14-15장의 홍해 사건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입니다.
홍해는 이스라엘에게는 생명의 길이었으나, 뒤쫓던 바로의 군대에게는 심판의 무덤이었습니다. 불 섞인 유리 바다는 짐승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불)가 쏟아지는 심판의 장소지만, 짐승을 이기고 벗어난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는 승리의 무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 건너편에서 모세와 함께 노래했듯이, 영적 출애굽을 한 성도들도 지금 유리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켜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 노래의 제목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② 그림자(모세)에서 실체(어린 양)로
왜 요한은 굳이 옛날의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지금의 ‘어린 양의 노래’를 나란히 놓았을까요? 이것은 구원을 노래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다에 빠져 죽을지, 애굽의 전차와 칼과 활에 깔려 죽을지, 절체 절명의 상황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게 출 15장의 모세의 노래입니다. 모세가 노래한 것은 ‘여호와께서 구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이제 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노래가 동일하게 나옵니다. 타락한 제국(바벨론/세상)과 영원한 대적(사탄/짐승)으로부터의 완전한 승리를 노래하는 것이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사입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황제의 위대함을 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가 이 황제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계 13:4을 변형함). 황제가 최고이며, 그를 이길 자는 없다는 사람들의 외침입니다. 하지만 유리 바다 위의 성도들은 정반대로 노래합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중략)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계 15:3-4)
세상은 “누가 세상의 황제와 더불어 싸울 수 있겠느냐”라며 떨고 있을 때, 성도들은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하니하오리이까!”라고 받아칩니다. 세상은 “짐승이 위대하다”고 칭송할 때, 성도들은 “주님의 일이 크고 놀랍다”고 선포합니다. 이 노래에는 사람의 위대함이나 자기 자랑은 한 줄도 없습니다. 오직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출애굽의 승리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듯, 마지막 종말의 승리 또한 내 능력이 아니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승리자의 노래입니다.
③ 심판의 진원지: 증거장막성전
이 거룩한 노래가 울려 퍼진 직후,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립니다(15:5). 여기서 ‘증거’는 언약궤를, ‘장막’은 광야 시절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던 처소를 뜻합니다. 즉, 이 심판은 공포의 대마왕이 기분 내키는 대로 휘두르는 폭력이 아닙니다. 심판의 진원지(관제탑)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성전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성도)을 끝까지 보호하신다는 것. 둘째, 이 심판은 성도들의 눈물과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감격스러운 사건입니다.
⑤ ‘새 노래’를 도둑질하는 자들
이처럼 요한계시록의 노래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이 참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진원지는 하나님이 계신 보좌이자 증거장막성전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찬양과 영광된 자리를 교묘하게 비틀어 자신들의 교리로 써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 이만희 교주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모세의 노래는 구약이고, 어린 양의 노래는 신약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새 노래'는 무엇이냐? 바로 요한계시록의 실상을 깨달은 '새 말씀'이다. 마지막 때에는 이 새 노래(비유 풀이)를 배워서 불러야만 구원받는다.” 그러면서 이 시대에 말씀을 풀어준 약속의 목자(이만희)를 믿어야 한다고 미혹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새 노래’는 새로운 교리나 유행가가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자만이 부를 수 있는 ‘구원의 감격’이 날마다 새롭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노래도 구원을 노래했고 어린 양의 노래도 구원의 노래입니다. 새노래라고 다를 게 있어야 할까요? 오직 어린 양만이 인류의 구원자임을 노래하는 것이 새노래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새노래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 외에, 그 어떤 인간 교주도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세토록 찬양받으실 참된 하나님이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러야 할 진짜 ‘새 노래’입니다.
애굽을 떠나며
오늘 우리는 3,500년 전 ‘애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습니다. 우리가 확인한 진실은 명확합니다. 역사의 무대는 바뀌고 제국의 이름은 달라졌어도, 영적인 원리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지배하던 애굽이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지배하던 로마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세상이나 본질은 여전히 ‘영적 애굽’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돈과 권력을 신처럼 섬기며, 우리에게 “누가 이 세상의 힘을 이길 수 있겠느냐?”, “누가 돈의 힘을 넘어설 수 있느냐”라고 협박하는 듯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세 가지 확실한 소망을 줍니다.
첫째, 우리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장차 오실 분’(호 에르코메노스, ὁ ἐρχόμενος), 즉 고난받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의 현장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역동적인 구원자이십니다.
둘째, 우리는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재앙 속에서 고센 땅을 구별하셨듯이, 마지막 환난의 때에도 인침 받은 당신의 백성을 철저히 구별하여 지키실 것입니다. 세상의 재앙은 우상들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심판일 뿐, 우리를 향한 저주가 아닙니다. 마치 8.15 광복절이 일본인에게는 패배의 날이지만 한국인에게는 회복의 날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가 일본인에게는 잔인하고 쓰라린 패배이지만 한국인에게는 환희에 찬 승리인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짐승과 우상을 숭배한 자, 하나님을 거역한 자,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한 자를 향한 정밀한 타격과 같은 심판입니다. 거기에 파편 맞아 죽는 성도는 없습니다.
셋째, 우리의 입술에는 이미 승리의 노래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모세의 노래를 불렀듯, 우리 또한 세상 바다를 건너 유리 바닷가에 서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을 붙들고, 요한계시록을 통해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날마다 싸우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우리의 역사 열차는 다음 정거장을 향해 출발합니다. 애굽보다 더 잔인하고, 사람의 가죽을 벗겨 죽이며 ‘피의 제국’이라 불렸던 나라, 요나 선지자가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그곳. 바로 니느웨를 수도로한 ‘앗수르’ 제국입니다. 과연 앗수르의 역사는 요한계시록의 어떤 관계를 갖고 있을까요?
2장. 앗수르, 피의 제국
애굽을 떠난 우리의 요한계시록 배경사 여행, 그 두 번째 기착지는 기원전 9세기에서 7세기, 고대 근동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앗수르’입니다. 앗수르는 최초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집트까지 통일한 제국입니다. 앞서 살펴본 애굽이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로 삼아 육체를 구속했던 제국이라면, 앗수르는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던 훨씬 더 교묘하고 잔혹한 제국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남긴 ‘피의 트라우마’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앗수르는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정복 전쟁을 수행했던 나라로 기록됩니다. 그들은 정복전쟁에 저항하는 도시의 사람들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거나, 잘린 머리로 탑을 쌓는 등 상상할 수 없는 공포 심리를 이용해 주변국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별명은 ‘피의 제국’이었습니다.
1. 앗시리아에 대한 심판 예언과 요한계시록
가장 유명한 왕은 앗시리아의 마지막 왕 앗슈르바니팔(BC 669-631)입니다.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그의 업적을 기린 부조와 벽화를 마주하면, 앗시리아가 왜 ‘피의 제국’으로 불렸는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아슈르바니팔 왕(오른쪽)이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고, 왕비(왼쪽)가 의자에 앉아 서로 와인 잔을 들고 축배를 드는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주변에는 악사들이 연주하고 시녀들이 부채를 부치고 있습니다. 그림의 가장 왼쪽 나무를 자세히 보시면, 적장(엘람 왕 테움만)의 잘린 머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습니다. 앗수르가 적의 시체를 안주 삼아 연회를 즐길 정도로 잔혹했음을 보여주는 부조입니다. 마치 성도들의 피에 취한 바벨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 같지 않습니까?(계17:5-6).
전쟁에서 승리한 앗수르 군인들이 행진하는 모습과 포로들이 끌려가는 장면입니다. 병사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전리품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입니다. 그들은 이 머리를 높이 쳐들고 흔들며 행진했는데, 이는 주변국들에게 “우리에게 대항하면 너희도 이렇게 된다”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심리전이자 선전 도구였습니다. 앗슈르바니팔의 비문과 연대기에는 “피부를 벗겼다”, “도시를 재로 만들었다”, “살아남은 자를 본보기로 삼았다”는 표현들이 반복되는데, 이는 왕의 업적으로 공개된 기록이었습니다.
구약의 나훔 선지자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바라보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나훔 3:1).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나훔 3:4).
어디서 많이 본 말씀 같지 않으십니까? 이 묘사가 요한계시록 17장-18장에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앗수르를 수식하던 ‘음녀’, ‘음행’, ‘피의 성’, ‘벌거벗는 수치’ 등의 개념을 가져옵니다.
1) 음녀
[나훔 3:4]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계 17:1-2]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내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2) 마술과 미혹
[나훔 3:4하]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계 18:23] "너의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3) 벌거벗는 수치
[나훔 3:5]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계 17: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4) 더러운 것을 뒤집어 씀
[나훔 3:6]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계 1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5) 사람들의 외면
[나훔 3: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계 18:10]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결국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 700년 전 그 무시무시했던 ‘피의 성’ 니느웨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기억하십니까?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로마 제국도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마술에 속지 마십시오. 그들은 곧 벌거벗겨져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는 어린 양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2. 앗수르의 강력한 혼혈 정책과 14만 4천
앗수르가 이스라엘 역사에 남긴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잔인한 악행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혈통의 파괴’였습니다.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혼혈 정책을 시행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고, 그 빈자리에 이방 민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통혼하게 만든 것입니다(왕하 17:24). 그 결과 태어난 이들이 바로 유대인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입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에게 북쪽 사마리아는 ‘이방인보다 못한 변절자들의 땅’이 되었습니다. 혈통도 섞이고 신앙도 섞여버린 그들을 향해 유대인들은 ‘개’ 취급을 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뼛속까지 유대인이었던 사도 요한 역시 이러한 민족적 반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7장에서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고정관념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가운데서 보호하시겠다고 친히 인치신 14만 4천 명의 명단이 불려질 때였습니다.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계 7:4).
그 명단은 유다 중심적 신앙 전통이 기대하던 질서와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단 지파는 빠져 있고, 레위는 포함되어 있으며, 에브라임은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므낫세지파와 함께 재구성되어 등장합니다. 이는 사마리아와 얽힌 복잡한 역사와 혼합의 기억, 그리고 정체성이 흐려졌다고 여겨지던 지파들까지도 하나님의 인침에서 배제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혈통과 순수성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 하나님의 인을 받는 기준이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유다 중심의 종교적 시선 안에서 다른 지파들은 종종 ‘버려진 자’,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시며 친히 구원의 인을 치십니다. 그것도 그들을 경멸하던 유다 지파와 나란히, 동일한 숫자로 인을 치십니다. 구원 앞에서 우열도, 차등도 없다는 사실을 숫자 자체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침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 어떤 권세도 이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바람까지 붙드신 채 침묵 속에서 역사를 준비하십니다(계 7:1–3). 도대체 앗수르가 남긴 이 참혹한 혈통의 비극 위에서, 하나님은 어떤 구원의 드라마를 써 내려가고 계신 것일까요?
1) 유대인 요한의 시선: "개들은 성 밖에 있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뼛속까지 유대인입니다. 그에게는 유대 민족 특유의 자부심과 배타성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북쪽 사마리아 땅은 ‘더러운 변절자들의 땅’이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에 의해 피가 섞였고,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고 그리심산에서 여호와와 이방신을 혼합해서 숭배하던 그들을 유대인들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요한의 마음속에는 구원의 명단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거대한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인을 맞을 자들은 순수한 혈통을 지킨 남유다의 후손들이어야 한다. 저 혼혈 잡종인 북이스라엘 지파들은 당연히 탈락이다.” 또는 “같이 하나님의 인을 받더라도 남유다 사람들은 더 특별하고 특수한 인이어야 한다.”
그런데 환상 중에 하나님의 인을 치는 천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인을 맞은 언약 백성의 명단이 낭독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요한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소리를 듣게 됩니다.
2) 14만 4천의 명단: 깨어지는 편견
사도 요한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 르우벤 지파, 갓 지파, 아셀 지파··· 베냐민 지파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숫자가 동일합니다(계 7:4-8)
놀랍게도 그 명단 속에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북이스라엘의 지파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지역감정이 극심한 상황에서 “전라도에서 1만 2천, 경상도에서 1만 2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도 1만 2천”, 또는 국가간 혐오가 가득한 상황에서 “일본사람 1만2천, 중국 사람 1만 2천, 미국 사람 1만2천, 러시아 사람 1만2천명, 우크라이나 사람 1만2천명, 이스라엘 사람 1만2천명, 하마스사람 1만 2천명”하며 명단을 부르시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을 겁니다.
요한에게 이것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아니 주님, 저들은 앗수르에 의해 피가 더러워진 자들이 아닙니까? 저들은 우리와 섞일 수 없는 ‘개’와 같은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명단을 찬찬히 뜯어보면 더 기가 막힌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4만 4천의 선두에 선 유다 지파의 조상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 동침했던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 지파는 조상은 세겜 사람들을 속이고 잔혹하게 학살했던 살인자들의 후예입니다. 나머지 지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우상숭배에 앞장섰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사사기에 등장하는 베냐민 지파가 저지른 악행은 상상초월입니다. 성범죄와 살인 동족과 전쟁을 벌인 지파입니다. 도대체 이 십사만 사천의 명단은 무엇입니까? 살인자, 간음한 자, 우상 숭배자, 그리고 피 섞인 혼혈인들의 이름이 가득합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들은 결코 14만 4천이라는 거룩한 숫자에 들어갈 수 없는, 마땅히 ‘성 밖으로 쫓겨나야 할 죄인들(계 22:15)’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7장의 드라마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니, 이제부터가 진짜 클라이맥스입니다. 방금 전까지 요한은 14만 4천이라는 숫자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질서 정연한 군대 같이 딱딱 떨어지는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을 때’, 요한은 더 큰 충격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조금 전 귀로 들을 때는 이스라엘 12지파에 국한된 딱딱 떨어지는 숫자(144,000)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국경도, 인종도, 언어도 초월한, 말 그대로 ‘셀 수 없는’ 엄청난 인파가 보좌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에는 승리와 구원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넋을 잃고 보고 있는 요한에게 묻습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요한이 대답합니다.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그때 장로가 해주는 대답이 요한계시록의 핵심을 찌릅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앞서 14만 4천 명단에 있던 살인자, 간음자, 우상숭배자, 거짓말쟁이들이 어떻게 저 거룩한 흰 옷을 입고 저기에 서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도덕적으로 깨끗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빨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웅변처럼 보여줍니다.
피에 옷을 빨면 붉어져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흰옷을 지속적으로 강조합니다.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14만 4천이라는 숫자도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 많은 족보를 가진 자들을 단 한 명도 누락시키지 않고(144,000), 실제로는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많은 구원의 백성(큰 무리)으로 만들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가신 구원의 좁은 문은 사도 요한의 종말 환상에 이르러서는 장엄하고 장대하게 온 세상을 향해 펼쳐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다시는 주리지 않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으며,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계 7:17)”입니다. 아멘.
지금까지 피의 제국 앗수르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러나 그토록 잔학무도한 제국의 폭력, 영원할 것같은 천하통일한 제왕의 권력도 하나님께서 흩으시고 무너뜨리시며 결국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는 오직 하나님 밖에 계시지 않음을 그리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막을 수 없음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우리의 배경사는 세 번째 정거장을 향해 갑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이스라엘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안겨준 파괴의 제국, ‘바벨론’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왜 악의 총본산을 굳이 ‘바벨론’이라 불렀는지, 그 비밀을 다음 시간에 풀어드리겠습니다.
3장. 바벨론: 파괴의 제국과 큰 성의 멸망
앗수르가 피의 제국이었다면, 그 뒤를 이은 바벨론은 파괴의 제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겨준 나라이자,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제국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 이름입니다. 우리는 파괴의 제국 바베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바로 남유다의 마지막 등불이라 불렸던 요시야 왕의 죽음입니다. 이 사건은 유다의 국운이 다하고 바벨론의 시대가 열리는 결정적인 신호탄이었습니다.
1. 비극의 서막: 므깃도 전투와 요시야의 오판 (B.C. 609)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때는 기원전 609년입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천지개벽 수준으로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수백 년간 중동을 호령하던 ‘피의 제국’ 앗수르가 신흥 강대국 바벨론에게 밀려 수도 니느웨를 잃고 멸망 직전에 몰린 것입니다. 이때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애굽의 왕 느고(Neco)가 대군을 이끌고 바벨론과 한판 승부를 보기 위해 진군한 것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왕하 23:29)에는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원어의 의미와 역사적 정황을 보면 이는 “앗수르 왕을 돕기 위해(to help)” 간 것이었습니다(NIV, 공동번역 참조). 애굽 입장에서는 앗수르보다 더 무서운 신흥 강대국 바벨론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옛 적과 손을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남유다의 요시야 왕은 이 흐름을 다르게 읽었습니다. 그는 친바벨론 정책을 펴며, 이 기회에 앗수르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유다의 독립을 지키려 했습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 시킨 후 호시탐탐 남유다를 노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애굽 군대의 앞길을 막아섰습니다. 그곳이 어디였을까요? 바로 ‘므깃도’ 평원입니다.
애굽 왕 느고는 “나는 그대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 길을 비키라”고 경고(대하 35:21)했지만, 요시야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무리하게 전투를 벌이다가 그만 비참하게 전사하고 맙니다. 이것은 너무나 뼈아픈 죽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가를 지었고, 온 백성이 통곡했습니다. 이 므깃도 전투의 패배로 유다는 사실상 자생력을 잃었고, 남유다의 황금기도 허무하게 막을 내립니다.
요시야 왕을 죽이고 북상한 애굽 군대는 신흥 강대국 바벨론과 싸워 과연 뜻을 이루었을까요? 여기서 역사의 두 번째 거대한 전쟁이 터집니다. 바로 ‘갈그미스 전투’입니다. 므깃도 평원 전투 4년 뒤인 기원전 605년, 유브라데 강가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갈그미스에서, 요시야를 꺾고 기세등등하게 올라온 애굽의 느고와, 신흥 제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이것은 당시 세계의 패권을 두고 겨룬 ‘챔피언 결정전’이었습니다.
결과는 바벨론의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바벨론 군대는 애굽 군대를 무자비하게 짓밟았고, 애굽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이 전쟁 한 방으로 고대 근동의 질서는 완전히 정리되었습니다. 애굽은 “다시는 그 땅에서 나오지 못하는(왕하 24:7)” 종이호랑이 신세로 전락했고, 바벨론은 명실상부한 ‘천하무적의 1인자’가 되었습니다.
이 두 전쟁의 결과는 남유다에게 재앙이었습니다. 므깃도에서 요시야가 죽은 후 유다는 잠시 애굽의 눈치를 보는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4년 뒤 갈그미스에서 애굽이 박살 나자, 이제는 더 잔혹하고 강력한 바벨론이 주인 노릇을 하러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온 것입니다. 결국 유다는 갈그미스 전투의 여파로 바벨론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이에 저항하다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는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제 이 파괴의 제국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남겼는지,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왜 로마를 향해 다시 ‘바벨론’이라 부르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성전 파괴의 비극, BC 586년의 트라우마
기원전 6세기,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은 바벨론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제국이 이스라엘에게 남긴 상처는 앗수르와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앗수르가 혼혈 정책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흐렸다면,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심장인 예루살렘 성전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586년,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솔로몬 성전을 불태웠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라 믿었던 성전이 이방인의 발아래 짓밟히고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쓸 만한 인재들과 귀족들은 3차에 걸쳐 바벨론 땅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국가적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걸까?우리는 과연 회복할 수 있을까?‘ 이런 절망적인 질문을 안겨준 나라가 바벨론입니다. 비록 역사 속의 바벨론 제국은 70년 만에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바벨론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하나님 도성의 파괴자이자 트라우마를 안겨준 파괴의 제국으로 각인되었습니다.
1) 요한계시록, 왜 다시 바벨론인가?
흥미로운 점은 요한계시록이 쓰인 1세기 로마 시대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바벨론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대한 세력을 큰 성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왜 사도 요한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를 로마라 부르지 않고 옛날 나라 이름인 바벨론이라 불렀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성전파괴라는 공통점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성전이었던 솔로몬 성전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역사적 트라우마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헤롯이 세운 두 번째 성전(헤롯 성전) 역시, 기원후 70년 로마 제국의 타이투스 장군에 의해 또다시 잿더미가 되고 맙니다. 바벨론이 했던 짓을 로마가 똑같이 저질렀습니다. 요한과 당시 성도들의 눈에 로마는 단순히 새로운 제국이 아니라, 과거 하나님의 집을 파괴했던 ‘제2의 바벨론’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로마를 향해 로마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성전 파괴라는 거대한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다시 꺼내 든 것입니다. 즉, 계시록에서 ‘바벨론으로 쓰고 로마로 읽는 독법’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아픔과 공통점에서 나온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상징성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특정한 국가를 넘어,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하늘에 닿으려 하고(바벨탑),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며, 스스로를 신이라 높이는 모든 세상 제국의 원형입니다. 요한에게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을 의미하는 암호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으로 쓰고 로마로 읽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2)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요한계시록 17장-18장은 파괴의 제국이었던 바벨론이 파괴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본문은 이 거대한 바벨론의 최후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세상은 바벨론의 화려함과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들은 금잔을 들고 성도들의 피에 취해 비틀거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단호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한번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계시록에서만 총 3번 멸망당합니다.
요한계시록 14장 8절에서 처음 무너집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9절에도 무너집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18장 2절에서 또 무너진다고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건물이든 나라든 한 번 무너졌으면 끝난 것이지 어떻게 복원의 과정없이 다시 무너질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이 바벨론이 망했다가 다시 부활하고, 또 망했다가 부활하고 또다시 멸망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 번 기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반복‘한 이유는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했다는 것은 ‘최상급의 강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세상 제국 바벨론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완전히, 철저히, 그리고 영원히” 무너뜨리셨다는 것을 확정하기 위해 세 번의 멸망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3. 바벨론의 침묵과 성도의 노래
바벨론 편을 정리합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고 자기들의 성을 하늘 높이 쌓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압도적인 힘과 경제력이 영원할 것이라며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8장에서 그 화려했던 바벨론의 모든 노래는 멈추고, 영원한 침묵만이 남게 됩니다. 반면, 바로 이어지는 19장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벨론이 무너진 그 폐허 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부르는 우렁찬 함성, 바로 ‘할렐루야’ 찬양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 1장에서 18장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던 ‘할렐루야’가, 바벨론이 완전히 무너진 19장에 와서야 비로소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던 세상이 완전히 일소돼야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고 성도의 노래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즉, 심판이 처절할수록 하나님의 구원은 더 완벽해집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앞서 역사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시선을 확인했습니다. 세상 역사는 제국의 패권을 다투는 결정전이었던 ‘갈그미스 전투’를 중요하게 기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거대한 전쟁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의 백성의 왕인 요시야가 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패배의 장소, ‘므깃도 전투’를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 므깃도를 종말의 마지막 전쟁터인 ‘아마게돈(하르 마게돈)’으로 끌고와 거기서 악의 세력을 일거에 소탕하고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반전의 장소로 택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거대 제국과 같은 대기업들, 삼성의 이재용, 현대의 정의선, 엔비디아의 젠슨 황, 또는 트럼프, 푸틴 같은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꽂혀 있습니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세상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당신의 자녀된 우리에게 꽂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국의 흥망성쇠보다, 당신의 백성의 아픔과 눈물과 시선과 관점에 더 관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지금이라도 말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권세 권력은 결국 사라져갈 것이고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언약 백성의 찬양만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자, 이제 파괴의 제국 바벨론을 지나 거대 제국 페르시아와 그리스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4장. 페르시아와 그리스, 복음의 의미와 한때 두때 반때
1.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살펴본 복음
페르시아 제국은 고대 세계가 경험한 최초의 세계적 대제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 역시 강력한 제국이었지만, 영토의 규모와 통치 체계 면에서 페르시아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소아시아에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역을 아우른 이 제국이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국가가 그리스였습니다.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전쟁은 제국의 팽창과 저항이 맞부딪힌 결과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역까지 지배하며 그리스 세계로 세력을 넓혀 갔습니다. 이에 반발한 이오니아 도시들이 아테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은 페르시아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대제국의 눈에 아테네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도전자로 각인되었습니다. 결국 페르시아는 “질서를 거부한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를 본보기로 제거함으로써, 그리스 전역을 제국의 질서 아래 편입시키고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기원전 490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페르시아전쟁입니다.
당시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전력 차이는 ‘다윗과 골리앗’ 수준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집어삼키려 했고, 아테네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만약 여기서 패배한다면 아테네의 남자들은 몰살당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비참한 노예가 되어 제국 각지로 흩어질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세계 최강의 대제국 페르시아가, 변방의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에게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 이 승전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전령이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약 42.19km를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라톤’ 경기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테네에 도착해 단 한마디를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Νενικήκαμεν!!!(네니케카멘) “우리가 이겼다.”
Νενική(네니케)는 동사 νικάω(니카오, 이기다)의 의 완료형, καμεν(카멘)은 ‘우리’입니다. 단순 과거형이었다면 “우리가 이겼었다”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승리는 옛날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현재완료형은 “우리가 과거에 승리했고, 그 승리의 효력과 영향력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생생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전쟁터에서 이겼으니, 지금 너희는 안전하다! 이제 짐을 쌀 필요도, 도망갈 필요도 없다. 지금 당장 그 승리의 평화를 누려라!”라는 선포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테네 시민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예가 될까 봐 벌벌 떨던 공포가 순식간에 환희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령이 전해준 ‘승리의 소식’을 듣고 믿는 순간, 그들은 아테네군과 함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고,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대 헬라 세계가 이해한 기쁜 소식, 곧 εὐαγγέλιον(유앙겔리온)입니다.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유앙겔리온(복음)에 몇가지 요소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첫째, 전쟁입니다. 둘째, 승리입니다. 셋째, 누림입니다.
1) 복음은 처절한 전쟁의 결과입니다
복음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되려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전쟁’입니다. 치열한 전쟁터, 생사가 오가는 위기 상황이 있어야 비로소 ‘승전보’가 복음이 됩니다. 만약 이 전쟁에서 지면 어떻게 됩니까? 마라톤에서 뛰던 병사는 “우리가 이겼다”가 아니라 “이제 끝났다!”고 외쳤을 것이고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비보(슬픈 소식)’가 되고, 패배한 나라의 백성들은 즉각 노예로 전락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전쟁이 나옵니다. 헬라어로 전쟁을 ‘폴레몬(πόλεμον)’이라고 하는데, 계시록에 자주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두 증인과 짐승의 전쟁, 미가엘과 용의 전쟁, 짐승과 성도의 전쟁,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 곡과 마곡을 모아 전쟁한다고 합니다.
특히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부터는 그냥 전쟁이 아니라 관사를 붙여 ‘그 전쟁’(톤 폴레몬 τὸν πόλεμον)이라고 부릅니다. 왜 사도 요한은 여기서 콕 집어 ‘그 전쟁’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아마게돈 전쟁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새로운 전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부터 13장까지 계속 이어져 왔던 치열한 영적 전쟁, 성도들이 이미 겪고 있었던 그 싸움이 마지막에 집약되어 나타나는 ‘최종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용과 짐승은 계속해서 전쟁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16장에 이르러 하나님은 “그래, 너희가 걸어왔던 바로 ‘그 전쟁’을 이제 끝내자”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전쟁은 각각 다른 종류의 전쟁(제3차 대전, 핵전쟁 등)이 나열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전쟁을 보여줍니다. 바로 어린 양과 그의 백성들을 향한 용과 짐승과 땅의 임금들이 벌이는 거대한 ‘영적 전쟁’입니다.
2) 전쟁의 최후 승자, 어린 양과 택하심을 받은 자들
이 끊임없는 전쟁의 최종 승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요한계시록 17장 14절은 이 전쟁의 결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싸움의 대진표를 한번 보십시오. 한쪽에는 ‘짐승’이 서 있습니다.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입니다. 표범의 몸에 곰의 발, 사자의 입을 가진, 용의 권세를 이어받은 무시무시한 괴물입니다. 그런데 그 맞은편에 싸우겠다고 서 있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고작 ‘어린 양’ 한 마리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관중이라면 누구에게 돈을 거시겠습니까? 사자, 곰, 표범이 합쳐진 괴물과 연약한 어린 양이 싸운답니다. 세상의 상식대로라면 100이면 100, 전부 짐승에게 걸어야 합니다. 어린 양에게 걸면 망하는 게 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어린 양이 이긴다!" 도대체 어떻게 이깁니까? 힘이 세서가 아닙니다. 덩치가 커서가 아닙니다. 그분의 신분 때문입니다. 비록 겉모습은 피 흘리는 어린 양 같아 보일지라도, 그분의 진짜 정체는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승리가 어린 양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짐승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만왕의 왕 되신 어린 양을 붙잡고 함께 있는 자들, 어린 양 편에 줄을 선 사람은 반드시 함께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가 요한계시록을 처음 읽던 1세기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요? 당시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짐승’은 로마 황제 도미티안이었습니다. 그의 권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거나 고난을 받고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승자는 분명히 로마 황제였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에게 호소합니다. “속지 마라! 저 거대한 로마 황제의 권력은 곧 지나갈 것이다. 비록 지금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보일지라도, 최후의 승리자는 어린 양 예수시다. 그러니 눈앞의 짐승에게 무릎 꿇지 말고, 영원한 승리자이신 어린 양에게 너의 목숨을 걸어라!”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짐승은 고대 사회인 요한계시록 시대보다 너무도 많아지고 교묘해졌으면 졌지 덜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대적하기 힘들어하는 그 짐승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은 그 짐승들이 아무리 거대해 보여도 세상 사람들은 다 짐승에게 배팅할지라도, '이기는 편', 바로 '어린 양 예수'께 인생을 거는 거룩한 승부사들이 되라고, 그것이 진정한 승리이자, 용기라고 응원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2. 헬라 제국: 알렉산더의 길과 한때두때반때의 비밀
바사(페르시아) 제국이 저물고, 이제 서쪽에서 다니엘 7장의 표현을 빌자면 표범처럼 빠른 속도로 세계를 집어삼킨 제국, 바로 헬라(그리스)의 시대가 열립니다.
1) 알렉산더 대왕: 표범처럼 날랜 정복자
헬라 제국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그는 불과 20세의 나이에 왕이 되어, 동쪽으로 진군을 시작합니다. 그의 정복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다니엘서 7장은 헬라 제국을 '표범'으로 묘사하는데, 그것도 '새의 날개가 넷'이나 달린 표범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빨랐으면 10년 만에 그리스에서부터 이집트, 페르시아를 넘어 저 멀리 인도 접경까지 거대한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3개 대륙이 그의 발아래 놓였습니다. 알렉산더는 가는 곳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세우고, 헬라 문화를 전파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복음이 당시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언어와 문화의 고속도로’ 역할을 했습니다.
알렉산더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바로 언어의 통일입니다. 당시 헬라어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었습니다. 아티크 헬라어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이 쓰던 어렵고 현학적인 '엘리트 언어'입니다. 문법이 복잡하고 배우기가 어려웠습니다. 반면 코이네 헬라어는 알렉산더의 군대가 세계를 정복하면서 여러 지방의 말들이 섞이고 단순화된 ‘공용어’입니다. 이 '코이네'라는 말 자체가 '공통의', '일반적인'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시장 바닥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쓰는 '서민들의 언어', 누구나 조금만 배우면 소통할 수 있는 '세계 공용어'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약성경을 기록하실 때, 폼 나는 '고전 헬라어'가 아니라, 시장바닥에서 서민들이 사용하던 투박한 '코이네 헬라어'를 선택하셨습니다. 왜일까요? 복음은 똑똑한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장 상인도, 노예도, 이방인도 누구나 읽고 듣고 깨달아야 했기에, 하나님은 가장 낮은 곳의 언어인 코이네 헬라어에 당신의 위대한 계시를 담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은 쉽게 그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복음적 정신에 어울린다는 입장입니다.
2) 70인역: 세계 최초의 번역 성경
알렉산더가 죽고 난 뒤, 그가 세운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수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민 2세, 3세들이 태어나면서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도 히브리어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이집트를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2세 왕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세상의 모든 지혜를 모으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율법책도 헬라어로 번역해서 소장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통한 이스라엘 학자 72명을 초빙하여 구약성경을 번역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70인역(LXX)’ 성경입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서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 히브리 민족만의 경전이었던 성경이,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며 전도할 때 들고 다녔던 성경이 바로 이 70인역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인용한 구약 말씀의 대부분도 바로 이 70인역이었습니다. 결국 알렉산더라는 정복자가 깔아놓은 언어의 길 위로, 70인역이라는 말씀의 수레가 달렸고, 그 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로 뻗어나간 것입니다.
3) 돼지 피와 한때두때반때의 비밀
알렉산더 대왕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습니다. 주인을 잃은 거대한 제국은 힘센 장군들에 의해 카산드로스(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본토), 리시마코스(튀르키예지역), 셀류코스(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 네 조각으로 나뉩니다. 이 또한 다니엘 7:6에 말씀한 바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딱 두 왕조만 기억하셔도 될 듯합니다. 남방왕(프톨레마이오스 왕조)과 북방왕(셀류코스 왕조)입니다. 초기에는 남방왕조가 유대 땅을 다스리며 비교적 유화적인 정책을 폈지만, 점차 북방왕조가 세력을 키워 유대 땅을 장악하면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북방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그는 이전의 페르시아나 초기 헬라 왕들과 달리, 피지배민족의 종교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예루살렘을 짓밟고 끔찍한 신성모독을 자행합니다.
다니엘서가 말씀한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우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단에 돼지 피를 뿌렸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부정한 짐승인 돼지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도살될 때 잠잠한 어린 양과 달리, 돼지는 끔찍한 비명을 지릅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이 돼지의 비명과 혐오하는 짐승의 피로 더럽혀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 참극을 견디다 못한 제사장 가문의 마카비와 유대인들이 혁명을 일으킵니다. 이들이 에피파네스에 맞서 싸워 성전을 되찾고 정화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기원전 167년에서 164년, 대략 3년 반입니다.
여기서 다니엘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유명한 상징수가 등장합니다. 계시록 11장부터 13장에는 ‘한 때 두 때 반 때’, ‘마흔두 달’, ‘1,260일’이라는 숫자가 반복됩니다. 모두 3년 반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할 때, 유대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치하의 환난 기간’을 인유한 것입니다.
이 3년 반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첫째, 고난에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3년 반은 완전수 7의 절반입니다. 악이 득세하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제한된 기간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버티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마카비가 3년 반을 버티고 승리했듯,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에게도 “이 환난은 끝이 정해져 있으니 조금만 더 견디라”는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치열했던 3년 반의 투쟁 끝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씻어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하는 절기가 ‘수전절’, 히브리어로 ‘하누카’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이 날을 ‘빛의 절기’라 부르며 가장 성대하게 지킵니다. 이스라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임관 전 반드시 마카비 승전지를 답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3년 반의 치욕을 잊지 않고 저항 정신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피파네스 같은 시련이 닥쳐와도 그 시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3년 반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견뎌내면, 반드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는 회복(하누카)의 날이 온다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4) 헬라의 석양과 로마의 여명(악티움 해전)
이제 헬라 제국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로마로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제국 사이에는 세계사를 뒤흔든 거대한 사랑과 전쟁의 드라마가 숨어 있습니다.
앞서 헬라 제국이 네 개로 쪼개졌을 때, 이집트를 차지했던 ‘남방왕(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기억하시죠? 이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 바로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입니다. 그녀는 이집트 여왕이었지만 핏줄은 알렉산더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인 순수 그리스(헬라)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기울어가는 자신의 왕조를 지키기 위해 로마의 절대 권력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손을 잡았고,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에는 그의 심복이었던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원전 31년, 그리스 앞바다에서 세계의 운명을 건 ‘악티움 해전’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대파합니다. 패배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로마의 내전도 끝납니다. 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으로부터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으며,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바로 이 사람이, 누가복음 2장 1절에서 천하에 호적령을 내려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게 했던 그 ‘가이사 아구스도’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철의 제국, 로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5장. 철의 제국 로마: 요한계시록의 생생한 무대
1. 성경과 로마, 뗄 수 없는 관계
이제 우리는 다니엘이 예언한 ‘철 이빨을 가진 짐승’ 로마 제국으로 들어갑니다. 서두에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로마 황제들과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은 서로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배경이 로마 시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무시무시한 심판의 내용들이 당시 고대 근동에서 로마까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겪었던 공포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지금까지 소개한 그 어떤 제국보다도 더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기원전 1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의 전성기는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 서쪽으로는 스페인,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모로코까지 뻗어 나갔습니다. 알렉산더의 헬라 제국보다 두 배는 더 넓은 땅을 차지하며, 지중해 전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로마 제국 당시에 일어났던 갖가지 자연재해, 전쟁, 기근 등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여러 가지 재앙 묘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갈라지며, 유황 불이 떨어지는 이 무시무시한 장면들을 현대인들은 상징이나 판타지로 읽기 쉽습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 이것은 '피부로 느끼는 공포'였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강력한 화산 폭발과 대지진과 참혹한 전쟁이 빈번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기원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 폼페이 같은 도시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의 심판 말씀을 읽었을 때, 그들은 단순히 먼 미래의 이야기를 상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참혹한 재난을 떠올리며, 다가올 심판의 엄중함을 뼈저리게 '인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생각을 먼저 장착하고 로마 시대와 요한계시록의 관계를 짚어보겠습니다. 이번 배경사에서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큰 성 바벨론을 로마로 전제하고 글을 전개하겠습니다.
2. 로마 황제들과 짐승의 표 666의 실체
로마 제국은 초대 교회의 역사이자 신약 성경의 배경 그 자체입니다. 1대부터 5대 황제까지만 살펴봐도 성경 구절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1) 성경 속의 로마 황제들 (1대~4대)
1대 아우구스투스 (B.C.27-A.D.14)는 성경에 ‘가이사 아구스도’, 헬라어 원문으로는 Καῖσαρ Αὔγουστος(카이사르 아우구스토스)로 나옵니다. 누가복음 2장 1절을 보십시오. 그가 천하에 호적령(인구조사)을 내리는 바람에, 만삭의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2대 티베리우스(A.D.14-37)는 누가복음 3장 1절에 ‘디베료’, 즉 Τιβέριος(티베리오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기 시작할 때,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로마를 다스리던 황제입니다. 3대 칼리굴라 (A.D.37-41)는 로마 역사상 가장 미치광이 같은 폭군 중 하나입니다. 그는 자신을 ‘신’이라 부르게 했고,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하여 유대인들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습니다. 스스로를 신격화한 인물입니다. 4대 클라우디우스(A.D.41-54) 사도행전 11장 28절에 ‘글라우디오’, 원어로는 Κλαύδιος(클라우디오스) 때 큰 흉년이 들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한 행 18장 2절을 보면 유대인 추방령을 내리는데, 이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2) 5대 네로 황제(A.D.54-68)와 666
이제 가장 중요한 인물, 5대 황제 네로가 등장합니다. 네로는 자신을 예술가라 착각했던 왕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르고 그 불타는 광경을 보며 시상을 떠올렸다고 할 정도로 광기에 차 있었습니다. A.D.64년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자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네로는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희생양을 찾았는데, 그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저들이 로마에 불을 질렀다!”라고 뒤집어씌우며 끔찍한 대학살을 시작합니다. 그의 박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 몰아 넣고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씌운 뒤 굶주린 사냥개를 풀어 물어뜯겨 죽게 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은 예사였고, 심지어 밤에는 성도들의 몸에 기름을 발라 기둥에 묶은 뒤 불을 질러 자신의 정원을 밝히는 ‘인간 횃불’로 삼기도 했습니다. 당시 성도들에게 네로는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짐승' 그 자체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666이 등장합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계 13:18). 많은 분이 666을 바코드나 베리칩 같은 것으로 오해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666을 ‘사람의 수’, 헬라어로 ἀριθμὸς ἀνθρώπου(아리드모스 안드로푸)라고 말씀합니다. 즉, 어떤 특정 인물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로마 사회에 유행했던 '게마트리아'라는 암호 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알파벳 글자마다 고유의 숫자를 부여해서, 이름 대신 숫자로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역사적 증거가 있습니다. 기원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로마의 도시 폼페이가 잿더미 속에 묻혔습니다. 훗날 발굴된 폼페이 유적의 벽면에서 기막힌 낙서가 발견됩니다.
'필로 헤스 아리드모스 545'(Φιλῶ ἧς ἀριθμὸς φμε), 해석하면 '나는 그 이름의 수가 545인 여인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직접 쓰지 않고, 그녀 이름의 철자 합계인 545라는 숫자로 암호화해서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로마 사람들의 문화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에 숫자를 부여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א(알렙)=1, ב(베트)=2 이런 방식입니다. 히브리어로 ‘네론 카이사르’네로 황제)'를 쓰면 נרון קסר (네론 케사르)가 되는데, 각 철자의 숫자를 더해보면 666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시대의 암호(게마트리아)기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נ (Nun, 눈) = 50
ר (Resh, 레쉬) = 200
ו (Waw, 바브) = 6
נ (Nun, 눈) = 50
ק (Qoph, 코프) = 100
ס (Samekh, 사멕) = 60
ר (Resh, 레쉬) = 200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666은, 당시 성도들을 잔혹하게 죽이며 핍박했던 저 ‘짐승 같은 네로 황제’를 암호로 지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리한 분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목사님, 네로 황제는 계시록이 기록되기 훨씬 전에 죽었잖아요?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쓴 시기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가 아닙니까? 666을 네로를 지칭한다는 말씀은 안 맞는 거 같습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별명이 바로 ‘제2의 네로’, 혹은 ‘살아 돌아온 네로’였습니다. 네로가 죽은 뒤 로마 사람들 사이에는 “네로가 죽지 않았다. 어딘가 살아있다가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괴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런데 30년 뒤 등장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하는 짓을 보니, 죽은 네로가 살아서 돌아온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신이라 불렀다는 점입니다. 도미티아누스는 공식 문서에 자신을 도미누스 앳 데우스(주 하나님 Dominus et Deus)라고 쓰게 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네로처럼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를 간 것도 바로 이 도미티아누스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666을 쓰면서 네로를 지칭한 것은 도미티아누스가 '제2의 네로'이며 과거에 네로가 짐승이었던 것처럼, 지금 눈앞에 있는 도미티아누스도 똑같은 666, 짐승의 세력이라는 것을 숫자로 설명하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즉, 666은 단지 지나간 역사 속의 네로 한 사람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의 권력은 시대마다 얼굴만 바꿀 뿐, 본질은 똑같은 '짐승(666)'이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돈'이나 '권력'의 가면을 쓰고 우리를 위협하는 수많은 '작은 네로'들이 있습니다. 그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3) 로마의 정체와 일곱 산과 일곱 왕
이제 로마 제국 파트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요한계시록 17장에 기록된 ‘일곱 산’과 ‘일곱 왕’의 수수께끼를 풀어보고, 로마 제국 말기에 있었던 기독교 박해의 양상을 역사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가) 왜 ‘일곱 산’은 로마인가?(계 17:9)
요한계시록 17장 9절은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라고 기록합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로마를 가리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라고 입을 모읍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첫째, 로마의 별명이 ‘일곱 언덕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용산’ 하면 대한민국 정부를, ‘백악관’ 하면 미국 정부를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 로마는 테베레 강 동쪽에 위치한 일곱 개의 언덕(팔라티노, 아벤티노, 카피톨리노 등) 위에 세워진 도시였습니다.
둘째, 당시의 문화적 상식이었습니다. 로마의 대표적 시인인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키케로 등 당대 문인들은 로마를 지칭할 때 관용구처럼 “일곱 언덕”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심지어 당시 로마 동전에는 여신이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일곱 산”이라고 기록했을 때, 1세기 독자라면 누구나 “아! 이건 로마를 말하는구나”라고 즉각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나) 일곱 왕의 수수께끼(계 17:10)
이어지는 17장 10절-11절은 더욱 구체적으로 로마의 운명을 예언합니다.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해석이 분분한 난제 중 하나입니다. 학계에서는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이를 설명합니다.
① 과거적 해석(베스파시아누스 당시 기록 연대로 봄): 이 견해는 ‘일곱 왕’을 1세기 당시 로마의 실제 황제들로 봅니다.
“다섯은 망하였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부터 5대 네로 황제까지를 지칭합니다(단명한 황제들은 제외).
“하나는 있고”: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혹은 환상 시점)의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를 가리킵니다. 그는 예루살렘 멸망(A.D. 70)을 지휘했던 장군 출신 황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은 티투스 황제입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그는 재위 2년(A.D. 79~81) 만에 병사하여, 실제로 ‘잠시 동안’만 통치했습니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티투스 황제 이후에 나올 도미티아누스라고 합니다. 그의 별명이 작은 네로라고 했죠. 이는 당시 떠돌던 네로황제 환생설을 기초로 합니다.
로마 황제의 계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망하였고)
베스파시아누스 (하나는 있고)
티투스 (잠시 동안 머무름)
도미티아누스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
② 역사적 해석: 제국설 황제 개인이 아니라, 성경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핍박했던 거대 제국들로 보는 관점입니다.
“다섯은 망하였고”: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은 이미 멸망했습니다.
“하나는 있고”: 사도 요한 당시에 득세하고 있던 로마 제국입니다.
“다른 하나”: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제국을 의미하며, 이 또한 한시적일 것임을 시사합니다.
“여덟째 왕(11절)”: 11절에 등장하는 이 왕은 일곱 번째 제국이 부활하거나 완성된 형태인 ‘최후의 적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는 새로운 존재 같지만 ‘일곱 중에 속한 자’입니다. 즉, 앞선 모든 제국들이 가졌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속성을 하나로 집대성한, 마지막 멸망의 짐승이라는 뜻입니다.
③ 상징적 해석: 완전수의 변용 특정 인물이나 국가를 지칭하기보다 숫자의 상징성에 주목하는 견해입니다. 총숫자는 8인데, 그 중 대다수가 망했고 잠시 있다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다섯이 망했다’는 것은 악의 세력이 이미 그 힘의 대부분을 잃었음을 의미합니다.
‘잠시 동안 머무른다’는 것은 남은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그 권세는 영원하지 않고 제한적(시한부)이라는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짐승의 세력은 언제나 강력해 보이고 도전적으로 어린 양을 대적하지만 나오지만 그들의 결국은 이미 망했거나 곧 망하거나 그와 유사한 운명입니다(계 17:11-14). 그렇다면 영원한 것은 뭘까요? 오직 어린 양과 하나님의 통치만이 영원하다는 최후 선언과 선포를 강조하는 해석법입니다.
로마는 지중해를 둘러싼 모든 영토를 정복하여, 지중해를 대양이 아닌 자신들의 내해라고 불렀습니다. 이 거대한 제국 앞에서 초기 기독교는 짓밟히면 사라질 것 같은 미약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승리가 오기 직전, 교회는 역사상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바로 기독교 공인 직전의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시절의 대박해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이전 황제들과 달리 매우 지능적이고 체계적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기독교를 없앨 수 없음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잔혹한 방식을 병행했습니다.
성경을 압수하여 불태우고, 교회 건물을 파괴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로마군은 신자들을 즉시 처형하여 순교자로 만드는 대신, 신체 훼손을 통해 공포심을 심어주는 전략을 썼습니다. 오른쪽 눈을 도려내거나, 다리 힘줄을 끊어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손가락이나 혀를 자르는 고문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했습니다. 이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어 스스로 믿음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악랄한 심리전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수많은 배교자가 발생했고, 교회는 궤멸 직전까지 갔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처럼, 기독교 역사상 가장 짙은 어둠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토록 철저했던 박해 시스템이 무너진 직후, 콘스탄틴 대제가 등장하여 기독교를 공인(313년)하게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 교회를 뿌리 뽑으려 했던 최후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거대한 로마 제국 자체가 기독교화되는 역사의 대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맺음말: 제국은 가고, 어린 양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우리는 지금까지 밧모섬의 요한과 함께 인류 역사를 호령했던 여섯 제국을 통과해 왔습니다. 나일강의 풍요를 자랑하던 애굽부터, 잔혹한 피의 제국 앗수르, 성전을 파괴한 바벨론, 복음의 길을 닦은 페르시아와 헬라, 그리고 철의 권력으로 성도들을 짓밟았던 로마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수레바퀴는 쉼 없이 굴러왔습니다. 지정학적 눈으로 본 이 역사는 약육강식의 비정한 드라마였습니다. 힘 있는 자가 승리하고, 성전은 불탔으며, 성도들은 사자의 밥이 되거나 이름 없는 순교자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렌즈로 본 이 역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두려워했던 제국들은 사실 하나님의 거대한 주권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재앙을 통해 세상 신들의 무력함을 폭로하셨고, 앗수르와 바벨론의 잔혹함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인치시며' 끝까지 지켜내셨습니다. 제국은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라 믿었지만, 실상은 하나님이신 어린 양이 주인공이심을 믿는 사람들이 승리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며 칼의 승리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선포하는 승리는 다릅니다. 그것은 적을 죽여서 얻는 승리가 아니라, 죽임당함으로써 악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어린 양의 승리'입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간직한 채 보좌에 서 계신 그 어린 양이,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나님은 먼 미래에만 나타나실 심판주가 아닙니다. 그분은 '호 에르코메노스(ὁ ἐρχόμενος)', 즉 고난받는 우리의 삶 한복판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침투해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제국의 압제 속에 신음하던 소아시아 성도들이 유리 바닷가에서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 역시 오늘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그 승리의 노래를 미리 부를 수 있습니다.
이제 눈앞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여전히 기세등등한 세상의 권력입니까, 아니면 그 모든 제국 너머에서 역사의 키를 쥐고 계신 어린 양입니까? 제국은 반드시 망합니다. 그러나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이깁니다. 이 배경사가 단순한 역사 지식을 넘어, 거대 제국과 같은 세상 속에서 '거룩한 승부사'로 살아갈 용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침내 바벨론의 소음이 그치고, 하늘의 '할렐루야' 찬양이 온 우주를 덮을 그날을 기다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