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한계시록주제 설교 1편: 계시록의 참의미는?(유료기사)
가장 하단에 유료 독자를 위한 피피티를 첨부했습니다.
여는 글: 이단상담할 때였습니다. 목사님의 딸이었는데 이단에 빠져 상담을 받으러 왔습니다. 깜짝 놀란 게 뭐였냐 하면 그 친구가 요한계시록을 1장부터 22장까지 암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도들 중, 요한계시록이 22장까지 있는 줄 지금 듣고 처음 안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사이비에 있던 그 신도는 아예 통째로 암송했습니다. 그만큼 뼛속까지 계시록을 새겨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암송하는 게 중요할까요? 그분이 계시록을 22장까지 암송하고 내린 결론은 이 시대의 구원자, 계시록의 약속을 성취한 분이 이만희 교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마지막 때의 약속의 목자라는 사람을 구원자라고 증거하는 예언서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 게 아니라 새로운 구원자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요한계시록은 백날 천날 읽고, 외우고, 그것을 지침삼아 그대로 살고 있다고 해도 전혀 복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요한계시록만이 아니라 설령 신구약 전체를 암송한다 해도 구원자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삼는다면 그 성경공부는 백해 무익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은 마치 신구약 성경과는 별개, 또는 신구약과는 다른 계시를 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왜곡해 왔습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 신약은 오신 메시아, 계시록은 다시 오실 메시아를 증거한다는 말이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계시록이 재림을 증거하는 성경이라고 강조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선의의 뜻으로 말했다는 점은 이해합니다만 사실 신구약 성경에서 별도의 성경 본문을 떼어내서 그것을 별도의 주제를 담은 계시인 것처럼 강조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통합적으로 일관되게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증거한다는 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구약을 오실 그리스도, 신약을 오신 그리스도, 계시록을 다시 오실 그리스도로 나누고 성경 신구약에서 별개로 계시록을 떼어내서 표현하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그래야 계시록을 별개가 아닌 신구약 성경의 연속선상에 있는 말씀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을 보면서도, 신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동일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신앙으로 바르게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요한계시록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성도들이 이해해야 하는데요. 과연 요한계시록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요? 그것부터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에는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신구약 성경에서 증거하는 것과 다른 내용이 있는 게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이 지지하고 뒷받침하는 동일한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1:5, 18, 7:10, 14, 17, 14:4, 15:3, 17:14)이 쉬지 않고 나옵니다. 이 말씀들을 모두 읽어봐야 합니다. 직접 성경을 펴서 읽어보아야 합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1:5~6).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7:9~10).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7:13-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17:14).
요한계시록은 이처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구원을 무수히, 지속적으로 강조합니다. 계시록에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 재림 신앙,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한 재림 대망, 참된 재림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재림 신앙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계시록을 통해서 그 복음을 재확인해야 계시록의 참 의미를 바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에는 지상교회와 천상 교회의 영화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복음을 끝까지 붙드는 지상교회(2~3장)에 주실 축복과 천상교회의 영광스러움(4~5장),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과 신자들의 믿음을 방해하는 세력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6장~16장)과 최후심판(17장~19장), 그 후에 펼쳐질 새하늘 새땅의 찬란함(20~22장)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붙어서 끝까지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교회의 영화로움을 담았습니다. 반면 교회를 핍박하는 용, 짐승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경고하고 강조하고 실행합니다.
이 두가지를 담은 목적이 뭘까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의 장엄함과 찬란함, 영화로움에 시선을 고정하며 오늘 이 땅에서 벌어지는 짐승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강력한 공격을 이겨내라, 끝까지 견디는 자는 승리할 것이다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고 구원의 소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도 교회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즉, 성도들의 공동체와 늘 함께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28:20에서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촛대로 상징된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분입니다(계 1:12).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계 2:1).
예수님이 교회 위를 운행하십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교회들을 위하여’ 계시하신 것입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계 22:16).
계시록이 온천하가 아니라 겨우 교회를 위한 계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그 교회? 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간략히 답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교회를 위해 계시를 주신 겁니다. 넷플릭스 영화와 드라마와 뉴스에서는 이기적이고 찌질하고 혐오적이고 타락한 것처럼 그려진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그 공동체, 그 교회, 하찮아 보이는 그 교회를 예수님이 거니시며 교회들을 위하여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즉 요한계시록을 증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쯤에서 가슴 벅차 올라야 합니다. 때론 서머나교회처럼 죽음을 불사하는 순수한 교회, 때로는 라오디게교회처럼 세상 가운데서 가장 찌질하게 보이는 그 교회를 예수님은 버리지 않고 거니시며 보호하시고 계시를 주는 것입니다. 그 계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이 세상에서 짐승의 세력은 너무도 포악하고 흉측하고 무시무시합니다. 그럼에도 승리는 어린양과 그를 따르는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믿고 받아들인 네 생물, 24장로는 물론, 천천이요 만만인 천사들까지 장엄한 찬양을 하며 그리스도께 무릎꿇고 엎드려 경배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드러내는 교회를 향한 참된 계시입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2~14).
셋째, 계시록에는 참된 승리자되신 어린양에 대한 경배와 찬양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많은 성도들이 빠뜨리는 핵심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경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 구조는 이 세상의 역사와 전쟁, 심판과 구원, 악한 세력의 등장과 멸망 등을 보여주지만, 그 모든 흐름 위에 절대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한 중심이 있습니다. 바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을 중심으로 한 찬양의 책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은 이 점을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봅니다. 아무도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통곡하던 그 순간, 장로 중 하나가 말합니다.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셨으니 그 두루마리를 펴시고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5:5).
그런데 요한이 돌아보니, 사자가 아니라,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서 있었습니다(5:6). 승리의 방식이 달랐던 것입니다. 힘과 능력으로 제압한 사자가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어린양이 모든 인을 뗄 권세를 가진 분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을 향해 천상에서는 전례 없는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5:12).
이 찬양은 단순한 음악적 표현이 아닙니다. 계시록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중심입니다. 계시록은 전쟁의 책이 아니라 경배의 책입니다. 누구에게? 어린양께! 누구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무엇을 위하여? 모든 악한 세력을 이기신 참된 승리자에게 영원한 찬양을 돌리기 위해!
그런데 이 경배의 대상이 단지 하나님 아버지만이 아닙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더불어 어린양도 동일한 경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5:13).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경배를 받으시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놀라운 선포입니다. 이는 삼위일체 교리를 뒷받침할 뿐 아니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위대한 인물이 아닌, 찬양받으실 참된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경배해야 함을 강력히 일깨워줍니다.
이 찬양은 계속 이어집니다. 7장에서는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외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7:10).
계시록 14장에서도 어린양이 시온산에 서 계시고, 그 앞에서 14만4천이 새 노래를 부릅니다. 계시록 15장에서는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가 울려퍼지며 구원의 완성을 찬송합니다. 계시록은 어떤 이론이나 교리의 책이라기보다, 어린양을 찬양하는 노래가 울려퍼지는 예배의 책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요? 바로 이 찬양이 성도들의 승리의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무서운 존재들로 가득합니다. 용, 짐승, 바벨론, 음녀, 거짓 선지자… 그러나 그 모든 세력들은 결국 다 어린양 앞에 무릎 꿇고 심판받습니다. 그리고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도 함께 이깁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17:14).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분을 찬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미 이긴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힘든 싸움을 마주하든, 그 싸움은 우리가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어린양께서 이미 승리하신 싸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찬양합니까?” 세상이 강요하는 우상과 권세 앞에 무릎 꿇을 것인가, 아니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그러나 다시 살아나신 만왕의 왕 앞에 무릎 꿇을 것인가? 그 답을 정하고 찬양하는 자, 그가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승리자입니다.
나가는 말: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합니다.
“지상 최대의 전투와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인류 역사 전체를 뒤흔드는 결전이며, 누구도 예외 없이 이 싸움의 한 쪽에 서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싸움에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한다. 당신은 이제 결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청코너에 나오는 선수를 소개해 보겠다. 머리는 일곱, 뿔은 열 개, 메두사처럼 뒤틀린 형상에 표범의 얼굴, 사자의 입, 곰의 발을 지녔고, 용의 권세를 받은 강력한 존재가 버티고 있다. 이제 홍코너를 보자. 상대가 되려면 최소한 히드라 같은 머리, 푸마의 얼굴, 호랑이의 입, 코끼리의 발, 독수리의 날개쯤은 달고 나와야 맞지 않겠는가? 그런데 의외로 홍코너에 등장한 존재는 작고 작은 ‘어린양’이다.”
바로 여기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인생을 걸겠는가?
요한계시록은 말합니다. 이 어린양이야말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시며, 넉넉히 이기실 분이라고. 그리고 그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승리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선포하는 역설의 소망입니다.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는 어린양, 그러나 실상은 모든 악의 세력을 꺾는 참된 승리자라는 사실—이 복음을 붙잡는 요한계시록 읽기가 진짜 바른 리딩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그 초점을 빼앗깁니다.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 달린 짐승은 누구인가? 아마겟돈 전쟁은 실제로 언제 일어나는가? 짐승의 표는 무엇인가? 바벨론 음녀는 어떤 세력을 뜻하는가?"
이런 물음에만 사로잡혀 공포와 두려움에 빠져 있다 보면, 계시록이 말하는 가장 소중한 메시지, 곧 복음과 승리와 소망의 이야기를 놓쳐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다짐하길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을 이렇게 읽기로 결심합시다.
복음으로 읽는다!
교회의 영화로움과 찬란함을 바라본다!
어린양의 최후 승리를 믿는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치 요한계시록의 짐승과 같은 현실의 세력을 자주 맞닥뜨립니다. 불의한 권력, 억울한 상황, 예기치 못한 질병, 무너지는 관계, 갑작스러운 경제적 어려움…. 멀쩡히 살아가던 일상 속에 갑작스레 습격해오는 인생의 거대한 짐승들 앞에서 우리는 종종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 어떤 무시무시하고 강력하며 두려운 존재라 하더라도,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한, 승리는 반드시 우리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미 이기셨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승리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붙들고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지금 어떤 ‘짐승과 같은 세력’과 맞서 싸우고 있는가?
그 싸움 속에서 나는 어린양을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
현실의 크고 무서운 존재보다, 보이지 않지만 참으로 능력 있는 어린양을 더 크게 보고 있는가?
내 인생의 싸움에서 누구에게 기대고, 누구 편에 서고 있는가?
믿음은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믿고 따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다시 어린양 편에 서십시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인생의 내기를 오직 그분께 거십시오. 그때 우리는, 두렵고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도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복된 진리를 굳게 붙들고, 요한계시록을 통해 참된 계시의 주인공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 그리고 지금도 붙들고 계신 교회 공동체의 소중함을 다시 발견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