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투예루살렘’의 사명자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0년-1506년)

세상을 유혹한 종말론 4편

2024-04-25     정윤석 기자
대항해 시대를 연 선구자이지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백투 예루살렘의 사명자이기도 했다

이 글은 주경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를 다수 참고했다. 

콜럼버스 일행이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자메이카 인근에서 스페인으로 귀환하려던 1504년 9월, 바닷가에서 폭풍을 만난다. 당시 배는 오로지 바람의 방향과 해류를 따라 흘러가는 범선이었다. 바다는 밤이 되면 불빛 하나 볼 수 없는 캄캄칠흑이었다. 바다는 콜럼버스가 출항할 때와 다르게 공포 그 자체로 바뀌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고 그 구름이 시계반대방향으로 점차 빨리 돌면서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쳤다. 바닷물이 하늘로 딸려 올라갔고 그 앞면에 있는 것을 모두 날려 버렸다. 그가 탄 배는 거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조류에 밀려 카리브해 쪽으로 하염없이 밀려갔다. 대양 한복판에서 조난 당했으니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이때, 탐험가로 알려진 콜럼버스가 상상치 못할 행동을 한다. 그는 애굽의 군대와 홍해를 앞에 둔 절체 절명의 순간에 맞닥뜨린 모세처럼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카리브해를 향해 우뚝 섰다. 콜럼버스는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왼손으로는 성경을 들었다. 그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를 잠잠케 한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읽고는 칼로 십자가를 그리고 그 다음에 선단을 감싸는 큰 원을 그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폭풍우가 지나쳤고 배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콜럼버스를 둘러싼 신비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콜럼버스가 자메이카 동쪽 끝을 탐험할 때의 일이다. 콜럼버스는 굶주림에 시달리다 그곳에서 만난 원주민들을 협박해 식량을 빼앗는다. 반항하려는 그들에게 콜럼버스는 하나님의 자손인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달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약탈 사건이 발생할 즈음인 1504년 2월 29일에 실제로 월식이 일어난다. 달이 가려지는 예언이 이뤄짐으로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에게 신의 자손으로 여겨지며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바람과 해류를 따라 가는 콜럼버스 시대의 범선

탐험가로 알려진 콜럼버스는 이처럼 종교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무모하리만치 탐험과 항해를 해나간 동력이 그의 독특한 세계관, 특히 종말론에 있다고 본 학자도 있을 정도다. 그는 4차 항해를 앞두고 자신의 행위가 앞으로 큰 빛을 발할 것이라는 신의 말씀을 들었노라고 후원자들에게 편지했다. 그의 아들은 심지어 콜롬버스가 ‘탐험가’이기보다 엄격한 ‘수도사’같다고 회상할 정도다. 콜럼버스가 처음 발견한 섬도 현지인들은 ‘구아나아니’(이구아나라는 뜻)라 불렀지만 그는 ‘구세주’라는 의미의 ‘산살바도르’(San Salavador)로 이름지었다. 콜럼버스는 1495년 7월 31일에 섬 위에 세 개의 산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이름한 것이 트리니나드(스페인어로 삼위일체)였다.

특히 성경말씀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사 24:15), “왕의 배들이 후람의 종들과 함께 다시스로 다니며 그 배들이 삼년에 걸쳐 일차씩 다시스의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옴이라”(대하 9:21)라는 구절이 자신의 탐험을 통해 성취된다고 믿었다.

그의 신앙의 저변에는 ‘중세의 수도사 요아킴’이 자리한다. 콜럼버스는 요아킴의, ‘스페인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이 나온다’는 예언에 깊이 심취했다. 그가 살던 대항해의 시대, 그의 비전은 전세계로 나가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 복음이 전파돼 예루살렘을 회복해야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한다는 소망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막는 이방인들은 굴복시켜야 했고 전쟁을 치르며 예루살렘을 회복하려면 군자금, 즉 ‘황금’이 필요했다. 콜럼버스가 대항해의 서막을 열며 신대륙에서 황금을 구하려 한 것은 그 종말 전쟁, 재림의 역사를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었다. 콜럼버스에게 대항해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뿐 아니라 역사적 종말, 재림을 위한 조건을 채우기 위한 사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미지의 영역을 종말의 사명자의 심정으로 헤쳐가게 된 것이다.

콜럼버스의 종말론 시나리오를 다시 정리하면 △(유럽인의 입장에서) 신대륙 발견 △모든 민족에 그리스도 전파 △신대륙에서 발견한 금은보화로 스페인 지원 △인류구원의 역사를 막는 적들은 십자군으로 응징 △예루살렘을 장악한 이슬람 세력을 압살하고 시온산에 성전 재건 △성전을 재건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고 세상은 에덴동산으로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계는 자신이 살던 시대에서 150년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봤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믿음으로 행한 그였지만 유럽인의 입장에서 신대륙의 사람들에 대한 폄하와 왜곡을 떨치지는 못했다. 콜럼버스에게 있어서 신대륙의 원주민들은 자신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 존엄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정복의 대상이었고 물건처럼 사고 팔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수천년 이어져내려왔을,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땅은 콜럼버스가 깃발을 꽂기만 하면 빼앗을 수 있는 장소였다.

콜럼버스는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경해석 방식인 콰드리가를 따라 성경해석에 4단계가 있다고 봤다. 문자적 – 알레고리적 – 도덕적 – 신비적 해석이었다. 예루살렘은 문자적으로는 실제 이스라엘의 수도, 알레고리적으로는 지상의 교회, 도덕적으로는 신자들의 영혼, 신비적으로는 천상의 도시, 곧 천국의 왕국을 의미한다. 문자적 예루살렘을 이슬람이 장악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악, 사탄의 세력에 하나님의 도성을 찬탈당한 것과 다를바 없었다. 예루살렘의 회복은 실제적 문자적 회복에서부터 시작돼야 했고 그것이 종말과 재림에 앞서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 예루살렘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은 십자군 전쟁에서도 표면에 드러났지만 콜럼버스의 대항해 시대에도 동인이 됐다.

콜럼버스는 자신을 스스로 세계의 비밀, 곧 종말의 시기를 파악하고 있다고 여겼다. 콜럼버스는 알폰수 왕의 계산을 적용, 아담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5343년 318일이 지났다고 봤다. 7천년이 세상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종말의 시기는 콜럼버스 자신이 살던 1501년을 기점으로 대략 150년 또는 155년이 남았다고 계산했다. 이 계산법을 따르면 서기 1656년 정도가 그가 생각한 종말의 연도였다.

콜럼버스가 살던 시대의 분위기

15세기 말엽은 전환기의 시대였다. 국가적으로는 콜럼버스를 지원했던 스페인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했다. 이베리아반도는 718년부터 1492년까지 약 700여년에 걸쳐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여왕의 에스파냐 연합군이 1492년 이슬람의 마지막 점령지인 그라나다에서 승리함으로 국권회복운동, 일명 ‘헤콩키스타’(영어: reconquest)가 마무리된다. 헤콩키스타를 성공으로 이끈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를 지원한다.

스페인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금광을 찾는다며 아시아를 향해간다. 그런데 지중해로 가지 않고 북대서양으로 향한 이유는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베네치아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콜럼버스의 시대는 여전히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장악한 때다. 헤콩키스타의 성공으로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낸 스페인과 그 정치권은 콜럼버스의 입장에서, 종말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할 가장 유력한 국가로 보였을 수도 있다.

신앙적으로는 중세 가톨릭을 개혁하기 위한 종교개혁의 움직임이 꿈틀대던 시대다. 콜럼버스의 사후이지만 1517년 독일에서 목숨을 건 종교개혁이 불길처럼 일어난다. 사회적으로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예부흥, 르네상스의 시대였다. 모든 사회적, 역사적 분위기가 새시대로 전환해가는 분위기였다. 이 때야 말로 이슬람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기독교인들이 회복시키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고 세상은 에덴동산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이 콜럼버스를 지배했다. 그는 ‘백투 예루살렘’의 진정한 원조인 셈이다.

벌거벗은세계사, https://www.youtube.com/watch?v=7aEPrO_0k7U&t=3160s 영상갈무리

# 콜럼버스의 교환은 무엇일까??

대항해 시대를 연 콜럼버스로 인해 유럽과 남미간 농수산, 생산물의 교환이 이뤄진다. 이를 ‘콜럼버스의 교환’이라 한다. 농수산, 생산물, 특산품뿐 아니라 역병도 교환이 일어난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매독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천연두가 전파된다. 이중 매독의 경우 인간의 성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후천성 매독은 성접촉을 통해 감염되는 경우가 90% 이상이다. 매독이 아메리카에 생기게 된 이유 중 ‘라마’라는 초식동물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당시 아메리카에서 사육하던 라마를 키우던 목동들이 장기간 목초지를 찾아 헤매는 과정 중에 성적 욕망을 풀지 못해고 이를 채우기 위해 암컷 라마와 접촉하면서 생긴 질병이라는 설도 있다. 이 매독균을 가진 보균자들과 대항해 시대의 항해사들이 다수 접촉하며 매독이 유럽으로 건너가게 됐다는 것이다. 콜럼버스의 항해에 동행한 한 의사의 주장에 따르면 콜롬버스 제독이 신대륙의 어떤 섬에 머무는 동안 주민들과 관계를 가졌고 그 섬을 발견하고 돌아오는 후 매독이 퍼졌다는 설이 있다.

이후 매독이 전 유럽으로 급속도로 퍼진다. 매독에 걸린 유명인사들이 적지 않다. 교황 율리우스 2세,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 화가 빈센트 반 고흐(그의 정신착란이 매독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함), 에두아르 마네, 슈베르트, 니체(매독이 아니라 뇌종양이라는 설도 있다)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콜럼버스 시대, 아즈텍, 마야, 잉카 문명에선 인신 제사가 활발했다(사진은 영화 아포칼립토의 한 장면)


#아즈테카의 대학살, 신의 심판일까 인간 탐욕의 절정판일까?

잘린 머리가 신전 계단에서 통통 굴러 떨어진다. 피를 뿜어내는 목 달아난 시신도 계단에서 데굴데굴 떨어져 내려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사람의 피를 좋아한다고 믿었다. 신전 계단은 피로 얼룩져야 신이 기뻐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신전을 피로 물들였다. 시체가 바닥까지 굴러 떨어지면 신전 밑에서 제사에 참여하는 원주민들은 사체에서 뿜어나온 피를 손가락에 찍어 온몸에 바르며 피의 축제를 열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주변에 진동했고 때로 인육을 삶아먹기도 했다.

콜럼버스가 열어간 대항해의 시대, 중앙아메리카, 특별히 아즈테카 왕국(1440~1521)에는 몸서리쳐질 정도의 악습이 자리잡았다. 사람을 발가벗겨 제물로 바치는 인신제사와 신에게 바쳐 죽은 사람을 잡아 먹는 식인풍습이 그것이었다. 고대 아즈텍인들은 세상 종말을 피하고자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 제물은 바로 산 사람의 막 꺼낸 심장에서 나오는 붉은 피, 아즈텍인은 전쟁에서 잡은 포로를 신에게 바침으로써 신들의 생명을 유지시킨다는 사명감으로 전쟁을 끊임없이 벌였다. 이렇게 아즈텍인이 신에게 바치기 위해 잡아 죽인 포로는 많게는 연간 2만여 명에 달했다.”

이런 악습이 적나라하게 등장하는 영화가 멜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다. 이 영화에는 전쟁 포로를 신에게 드리는 참혹한 인신제사가 가감없이 묘사된다. 주인공은 인신제사로 드려지기 직전에 살아남는다. 제물로 바쳐지는 그 순간, 갑작스레 개기일식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임한 것과 같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잠시 인신 제사를 멈춘다.

그러다가 일식 현상이 사라지고 태양이 나타나자 집례자는 제사 퍼포먼스를 중단하며 신의 저주와 노여움이 풀렸다고 선포한다. 아포칼립토의 주인공은 그렇게 살아남는다. 탐험가 콜럼버스도 원주민과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나타난 개기일식으로 목숨을 구했던 것과 비슷하다.

중앙아메리카의 맹주로 군림하던 아즈테카 왕국의 멸망은 다소 허무하게 찾아왔다. 스페인의 탐험가 코르테스가 히스파니올라섬, 유카탄 반도를 거쳐 아스테카 왕국으로 1519년 불쑥 찾아들어간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황금이었다. 황금을 찾아나선 침략가 코르테스는 아스테카 국왕 ‘몬테수마 2세’의 환대를 받는다. 그 이유는 역시 종말 예언 때문이었다. 아즈테카의 몬테수마 2세는 신이 언젠가 금발에 턱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신화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코르테스가 딱 그 모양이었다. 게다가 코르테스가 탄 말은 아스테카 원주민들이 보기에 신의 형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침략자로부터 나라를 보호해야 할 국왕이 자신들을 약탈하러 온 정복자들을 신의 아들로 맞이하게 된다. 결국 코르테스는 몬테수마2세를 비롯 원주민 대학살을 감행한다. 아즈테카 문명이 총칼로만 하루 아침에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코르테스 등 유럽인은 원주민들에게 치명적인 질병, 천연두를 갖고 온 것이다.

유럽인들은 면역이 돼 있었지만 전혀 면역력을 갖지 못했던 원주민들에게는 그것만큼 무서운 역병이 없었다. 그 천연두에 아스테카뿐 아니라 마야, 잉카 제국이 전멸하다시피한다. 일설에 따르면 대항해 시대인 16세기, 북미와 남미의 총인구는 5천만에서 1억명 사이였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가 진행된 1세기 동안 대학살과 질병으로 원주민 수는 5백만에서 6백만 사이로 줄어든다. 인구의 5~10%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코르테스를 비롯 라틴아메리카를 침략한 탐험가들은 원주민들과 머릿수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을 종종 벌인다. 아즈텍 원주민 4천여명이 스페인의 탐험가 200여 명과 전투를 벌이다가 몰살 당하기도 한다. 이때 스페인 사장자는 5명. 숫자는 월등했으나 전력은 스페인 탐험대와 아즈텍은 비교불가할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었다. 무기 기술로 따지면 4천년 정도 차이가 있을 정도.

아즈텍인들은 청동기나 신석기 시대 정도의 화력이었다는 것이다. ‘흑요석’이라는 돌을 들거나 흑요석을 앞에 매단 창을 들고 싸웠다. 창이나 몽둥이에 상어 이빨을 박아서 만든 무기를 들기도 했다. 반면 스페인은 수많은 내전을 치르며 개발된 무기를 장착했다. ‘콩키스타르’라는 화승총, 소구경 대포는 불을 뿜을 때마다 원주민들에게 천둥같은 소리로 들려 공포감을 줬다. 원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강철로 제작한 ‘바스타드 소드’와 일명 삼총사의 검으로 불리던 래피어라는 검이었다. 여기에 특수강으로 제작한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을 하고 말을 타고 전투를 벌이는 이들에게 흑요석같은 석기 시대의 무기로 대항한 원주민들은 때로 한번에 10만여명이 몰살당하기도 한다.

이를 구약 성경에 나오는 진멸 전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인신공양 등 죄악이 관영한 아즈테카 문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정복 과정을 직접 목격한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콜럼버스의 2차 항해 때도 탐험에 동행했던 사람이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가장 개방적이고 순수한 사람들, 가장 건강하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 물질적 부를 획득하려는 욕망도 없고 이승의 권력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자를 향해 스페인 사람들은 양 떼를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늑대처럼, 며칠 동안 고기 맛을 보지 못한 호랑이와 야생의 사자처럼 원주민들을 습격했고 정복전쟁을 시작한 이후 40년 동안 줄잡아 1천 2백만명 이상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악마적 행위를 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기독교도들이 원주민을 대규모로 살상하고 없애버린 이유는 단순히 탐욕 때문이었고 가능한한 신속하게 금으로 주머니를 채우고 개인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였다며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들에게 동물들에게 주었을 정도의 동정심만이라도 보여주기를 신께 빌었다고 고백한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토착민들은 순진하게도 기독교도라는 유럽인들에게 대학살, 강탈, 폭력, 고문을 당하기 전까지, 모든 시련과 고난을 맛보기 전까지 유럽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들이라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