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희의 ‘보혜사’론 비판과 반증 - 칼뱅의 성령론을 중심으로-

2021-12-31     정윤석 기자
저자에 증인 이만희 보혜사라고 명기한 이만희의 책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지도 안상혁 교수) 과제로 제출한 소논문입니다. 기술적인 어려움으로 각주를 달지 않았습니다. 각주가 달린 글을 보기 원하시는 유료회원은 가장 하단에 다운로드 기능을 활용하시면 됩니다(유료회원 전용). 본고에서 붉은 벽돌색 문단은 이만희의 주장을 인용한 것입니다[편집자주].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이만희의 보혜사론 1) 이만희는 보혜사를 누구라 하는가? 2) 이만희의 보혜사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① 대언자가 곧 보혜사이다 ② 진리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 곧 보혜사이다 ③ 보혜사 성령이 1980년대에 왔다 ④ 보혜사 성령은 ‘진리 성령’으로서 ‘일반 성령’과 다르다 2. 이만희 선배들의 보혜사론
3. 칼뱅의 보혜사론과 신천지 비평 1) 칼뱅은 보혜사를 누구라 하는가? ① 보혜사는 하나님이시다. ② 보혜사께서는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 ③ 보혜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되심을 증거한다. ④ 보혜사께서는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당신의 백성 개개인안에 내주하신다. ⑤ 보혜사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

2) 이만희 보혜사론에 대한 비평 ① 대언자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변호자’를 의미한다 ② 성경은 진리의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지 진리의 성령을 ‘받은 사람을’ 보혜사라고 하지 않았다. ③ 보혜사 성령이 1980년대에 왔다고 하면 성경의 성령의 역사를 모두 부정하게 된다 ④ 성령은 하나님이시기에 ‘진리 성령’, ‘일반 성령’으로 나눌 수 없다 Ⅲ. 결론

Ⅰ. 서론

책 저자에 ‘보혜사’라고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정상적 크리스천이라면 상상 못할 짓을 한 1931년생 노인이 있다. 이만희가 그렇다. 증인 이만희 보혜사, 때로는 보혜사·이만희 등 그가 쓴 책 표지의 저자란에는 ‘보혜사’를 병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는 전문이단연구 및 상담가 진용식과 토론할 때도 “나는 당신이 핍박하는 보혜사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도대체 이만희는 보혜사를 어떻게 정의하길래 당당하게 보혜사라고 밝힐 수 있는 걸까? 여기서 이유를 분석하고 그의 주장에 반증해보고자 한다. 우선 비평을 위한 자료로 이만희의 보혜사론을 파악할 수 있는 1차 자료들을 출처로 했다. 그가 진용식과 토론했을 때의 논쟁 자료, 그가 저자로서 저술한 자료를 기초 자료로 했다. 더불어 이만희 보혜사론을 언급하면서 제시하는 책 중 유일하게 그가 저술하지 않은 게 있다. 신천지에서 출판한 신탄이다. 이는 신천지측이 공식적으로 내세운 신천지 출판 1호 서적이라는 점에서뿐 아니라 그들 교리의 근간이 되는 조직신학적 논리를 갖춰 출판한 유일무이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만희의 보혜사론 비판하면서 2차 자료로는 이 책을 주요 자료로 선택했다. 용어에 대해서도 미리 설명하면 ‘보혜사론’에서 ‘보혜사’는 예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한 ‘또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성령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를 일일이 또다른 보혜사로 표기하지 않고 보혜사로 표기했다. 반증의 근거는 개혁파 신학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는 칼뱅의 [기독교강요]에서 찾았다. 특히 칼뱅의 기독교강요에서 ‘보혜사론’을 기초로 하면서도 종종 칼뱅이 제시한 성경구절을 인용해 이만희의 논리에 반박하고자 노력했다. 그 이유는 이 논문이 신천지 변증에 실효성을 갖추기 위해서다. 신천지는 이만희식 성경읽기의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도 결론적으로 최종 권위를 성경에 두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칼뱅이 뭐라고 했는가는 그들에게 하등의 가치가 없다. 이 때문에 칼뱅의 보혜사론을 기독교강요에서 인용하면서도 그가 제시한 성경구절을 사용해 신천지 이만희의 보혜사론을 변증하고자 노력했다. 칼빈, 칼뱅 등 다양한 성명이 사용되는데 본 논문에서는 특정 저자가 ‘칼빈’으로 쓰지 않은 이상 모두 ‘칼뱅’으로 통일했다.

Ⅱ. 본론 1. 이만희의 보혜사론
보혜사라는 단어는 한글 성경에 요14장, 15장, 16장에 등장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또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할 때 나오는 단어이다. 정상적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 구절에서 ‘보혜사=사람’이라는 논리를 끌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의 ‘영’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영에는 살과 뼈인 육이 없다. 따라서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는 오직 영으로만 존재하는 성령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만희는 이 세구절을 비틀어 보혜사를 사람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 이유를 신천지 연구 및 상담 전문가 진용식은 인간을 하나님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라며 보혜사교리는 인간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교리라고 비판했다. 이만희식 보혜사론을 따라가면 결론은 인간을 신으로 믿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만희의 보혜사론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1) 이만희는 보혜사를 누구라 하는가?
이만희는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보혜사’라고 한다. 진용식과 이만희가 지상 논쟁을 한 초유의 사건이 있었다. 양자가 이단전문 매체 ‘교회와신앙’에 10가지 주제를 정하고 원고의 분량, 그리고 서술 방식(상대에 비판, 자신의 반론, 상대에 대한 질의 등)에 서명했다. 지상에 논쟁을 이어가던 중 이만희는 끝까지 완주하지 못하고 6회까지 하다가 엉뚱한 비난을 늘어놓고는 도중하차한다. 결국 이 때 한 이야기가 “나는 진리의 성령과 책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예수님의 것을 가르치는 보혜사입니다”였다. 이 과정에서 타당성을 갖고 제시하는 근거도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을 보혜사,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으로 이해하는 그 정체성을 가진 단어에 자신을 대입했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그의 대표적 저술 저자란을 살펴보면 그가 통일성있게 자신을 보혜사라고 했거나 또는 보혜사에 준하는 존재로 이해했음이 드러난다. [천국비밀 계시](1998)에선 증인 이만희 보혜사, [요한계시록의 실상](2005)과 [천지창조](2007)에선 보혜사·이만희, [계시록 완전해설](1986)에는 대언자 이만희로 표기했다. 이를 근거로 이만희는 자신을 보혜사라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만희는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 걸까? 그 이유를 분석해보겠다.

2) 이만희의 보혜사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① 대언자가 곧 보혜사이다
이만희 보혜사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요1서 2:1의 ‘대언자’로 이해하고 이를 인간과 일치시킨다는 점이다. 여기서 대언자를 이만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역할로 해석한다.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을 보혜사라고 한 것(요일2:1‘대언자’ 난하주 참고)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말씀을 성도에게 대언하여 가르치시고 은혜로 보호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언자가 보혜사이고 보혜사는 말씀을 가르치며 은혜로 보호하는 스승이라고 전제한다. 보혜사(도울 保 은혜惠 스승師)라는 단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은혜로 보호하는 스승이다. 은혜로 보호하는 ‘사람, 스승’이 곧 보혜사라는 의미도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요1서 2:1의 ‘대언자’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이다. 이 의미가 ‘변호자, 위로자, 대언자, 상담자’이다. 특히 이만희는 보혜사의 역할 중 ‘대언’, 즉 하나님의 말을 대신 전하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특징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대언한다면 그 사람을 ‘보혜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혜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처럼 재림 때에는 진리의 성령이 ‘다른 보혜사’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해주신다. 보혜사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여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고 약속하신 것(16절)을 보면, 다른 보혜사는 예수님도, 하나님도 아닌 제 3의 존재이다.”

이만희는 보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초림 때의 인물, 또다른 보혜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재림 때의 인물이라는 의미로 대입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만희의 주장대로라면 재림 때의 이 대언자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예수님이 초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면 그의 말을 들어야 하듯이 재림 때 또다른 보혜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면 당연히 그를 찾아야 하고 그를 찾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설령 찾고 만났다 해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역사에 거스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이만희 주장의 논리적 귀결이다.

② 진리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 곧 보혜사이다

이만희는 보혜사를 ‘사람’이라고 본다. 그의 논리전개를 따라가면 누구나 그런 결론에 도달한다. 처음, 보혜사는 대언자(者)라고 정의했던 그가 이제 진리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 보혜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진리의 성령 보혜사와 하나되어 일하는 사람도 보혜사라고 할 수 있다. 물이 들어 있는 병은 물병이 되고, 술이 들어 있는 병은 술병이 되듯이, 보혜사의 영이 임한 사람도 보혜사가 된다. 그렇다고 대언자인 목자가 진리의 성령 그 자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는 이 땅에 있는 우리에게 하늘의 보혜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신천지 책자 1호인 신탄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이 책자에서는 “보혜사는 ···재림의 때에 한 육체에 임하여 탄생하시는 예수의 다른 이름이다”, “2천년 전의 예수도 보혜사이므로 재림으로 오실 보혜사를 다른 보혜사(요 14:16)라고 하신 것이다”고 주장한다.

이만희와 신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재림 때 반복 재생해야 하는 방법으로 이해한다.

“초림 때 하나님께서 구약에 약속한 목자(예수님)에게 와서 구약의 예언을 이루신 것을 믿듯이 우리는 예수님께서 천사와 함께 신약 성경에 약속하신 목자(이긴 자)에게 와서 예언을 이루실 때 보고 믿어야 한다.”

이 말은 곧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예수께서 인간의 몸으로 역사를 이루셨듯이 계시록에서 예언한 재림 때의 약속의 목자 또한 예수와 동일한 육체로 오셔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만희는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택한 사람을 통해서 계시를 보여 주시니 곧 대언자(보혜사)이다”라고 주장한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택한 대언자, 즉 보혜사가 있다는 의미이다.

③ 보혜사 성령이 1980년대에 왔다

신천지는 지금을 계시록 시대라고 하며 계시록 성취의 시대에 보혜사 성령께서 오신 때를 특정한다. 그 때가 바로 1980년대이다.

“2천년이 지난 오늘날 그 에언의 복음을 1980년에 마치시고 성경의 예언대로 해 돋는 아침의 나라 한반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사 신천지 새 빛의 나라가 창조되었으니 이는 선천 심판의 기간 마흔 두달이 지난 1984년 3월 14일이다. 이때부터 신천지 증거장막성전이 열리게 되었으니 금년이 신천지 창립 13주년을 맞이하게 된 해이다.”

신천지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날이 1984년 3월 14일인데 한반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이뤄진 일이라고 한다. 이처럼 신천지는 보혜사 성령을 자신들과 관계된, 특정한 날에 임한 존재로 이해한다.

④ 보혜사 성령은 ‘진리 성령’으로서 ‘일반 성령’과 다르다

군대에도 일반 부대, 특수 부대가 있듯이 신천지의 이만희는 성령을 ‘일반 성령’, ‘진리 성령’으로 나눈다. 그들에게 이 분류가 필요한 이유는 보혜사 성령이 오신 시점 때문이다. 즉, 보혜사 성령을 이 시대에 임했다고 해석하면 과연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어떤 분이냐는 의문이 발생한다. 신천지 입장에서는 그때 임하신 성령을 뭔가 다르게 정의해야 1980년대에 보혜사 성령이 임했다는 주장이 이치에 맞는다. 이를 이만희는 ‘일반 성령’, ‘진리 성령’으로 구분해서 해결한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일반 성령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영이며, 이 성령은 계시록 10장과 19장과 같이 자신의 말을 성도에게 전할 한 사람을 택하여 자기의 말(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한다. 이 보혜사 성령이 마음 전에 계실 때는 그 사람이 이 보혜사 성령으로 인해 보혜사(대언자)가 된다. 따라서 보혜사 성령이 사람(예수님의 계명을 지킨 자)들 속에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보혜사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다 같은 성령이 아니요 보혜사 성령이 있음같이 목자도 일반 목자가 있는가 하면 약속의 목자(계 10:10-11)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교회도 일반교회가 있고 약속의 성전(계 15:5)이 있음을 알기 바란다.”

신천지 연구 및 상담 전문가 진용식은 이만희의 주장을 비판하며 “일반 성령은 사람에게 역사하는 성령이며 보혜사 성령은 말씀을 전하는 성령이라고 한다”며 일반 성령이 아닌 보혜사 성령이 여러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을 택하여 들어가서 역사하면 그 사람이 보혜사가 된다는 교리라고 정리한다. 일반 성령, 진리 성령을 나누다가 신천지는 ‘성령’을 다수의 영적 존재로 설명한다. 한분이 아니라 하늘나라 영계에 있는 다수의 천사들도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모두 성령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신천지의 보혜사론은 △대언자가 곧 보혜사이다 △진리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 곧 보혜사이다 △보혜사 성령이 1980년대에 왔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 성령’으로서 ‘일반 성령’과 다르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실 이만희의 주장은 새롭지 않다. 이미 그의 선배격 인사들이 사용했던 논리들이다. 그가 2천년만에 새로운 계시를 받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다. 그중 ‘보혜사는 사람이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주장을 몇 가지 소개하겠다.

2. 이만희 선배들의 보혜사론

자칭 재림주라는 구인회, 박태선 계열의 자칭 보혜사 김풍일, 이영수, 장막성전 계열의 오평호 등이 사람을 보혜사라고 주장했다.

구인회를 재림예수라고 주장하는 천국복음전도회의 책자에는 보혜사는 육신을 입고 온 성령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가 곧 재림예수라고 한다. 구인회의 주장을 그의 제자라는 최총일이 정리했는데 그 책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순절(행 2:1~4)에 강림한 성령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성령이며,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성령이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을 입고 온 성령이다. 보혜사 성령은 사람이며, 보혜사 성령은 재림예수다.”

“보혜사 성령은 영이 아니라 사람이며, 재림예수이며, 이 땅에 오셔서 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김풍일도 동일한 주장을 한다. 그 또한 보혜사 성령은 오순절에 내려온 성령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성령이요 통달 성령인 것이다. 이는 오순절 날에 강하고 급한 바람같은 성령으로 임하여 각 사람에게 방언이 나오게 한 성령과는 다른 것이다. 오늘날까지 역사한 오순절의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사정을 통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비밀을 알 수 없으니 오순절에 역사한 불 같은 성령은 보혜사 성령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람이요, 보혜사이셨던 것과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실 보혜사도 사람인 것이다(딤전 2:5). 오늘날까지 모든 기독교인들이 보혜사를 영으로만 알고 믿어 왔으나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은 미흡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는 온전한 영이기 때문이다. 듣고 말하며 장래 일을 알려 주는 또다른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말씀 성령)을 최초로 받은 사람이다. 곧 장래 일을 알려 주는 계시의 말씀을 받은 자이며 작은 책을 받아 먹고 다시 예언하는 자이다.”

박태선 계열의 이영수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오순절에 내린 불같은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요 16:8)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생수의 성령인데, 실제로는 불의 성령을 내렸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근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을 직접 치리하시면서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순교하여 멜기세덱의 반열에 참여하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를 증거하는 어려움은 바울이 할례를 증거하는 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내린 불의 성령이 장장 2,000년 동안 기독교를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역사를 시작하면서 오순절에 내린 불같은 성령이, 다른 보혜사 성령이 아니라는 말을 한동안 보류하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깊은 말씀을 던지면 여러분이 소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젖을 주고 장성해야 밥을 먹입니다.”

이만희와 동일하게 장막성전 출신으로 활동한 오평호도 같은 주장을 한다.

(보혜사와 관련한 구절, 요 14:16~17, 25~26, 16:7을 기록한 후)“이상과 같은 말씀은 모두 다른 보혜사를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다른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내려졌다고 믿어 버리는 오늘날의 교리는 참으로 위험합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분명히 성령은 임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기도하던 120명의 주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힘있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움츠렸던 그들의 마음을 다시 생동있게 불과같이 역사했던 것도 성령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성령이 온다고 했던 그 말씀을 오순절 다락방에 내린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다른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임한 것은 성령이고 오늘날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진리의 성령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이만희의 보혜사론은 이미 다른 단체에서 활용하거나 공유되는 사상인 반면, 정통교회 내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사상이다. 왜냐하면 그 주장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삼위이신 성령 하나님과 사람을 동격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만희 보혜사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이제 종교개혁자 칼뱅의 보혜사론을 설명한 다음 비평해보겠다.

3. 칼뱅의 보혜사론과 신천지 비평

김재성에 따르면 칼뱅은 지난 2천년 간의 기독교신학과 교회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보다 훨씬 더 정확한 기독교신학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칼뱅에게서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었다. 그에 따르면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하도록 묶는 고리이시며 믿음에 의해 우리를 복음의 빛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태양과 같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볼 수 있도록 조명하시며 마음속에 말씀의 인을 치시고 성도 안에 내주하신다. 성령은 이토록 성도의 진리의 유일한 원천, 즉 생명물이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을 인간 이만희로 이해하는 사람과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 믿는 성도의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칼뱅은 여러 주석서, 십계명 강해, 신명기 강해, 갈라디아서 강해 등 강해서, 제네바 요리 문답 등 다양한 저작을 남겼다. 본 논문에서는 그의 방대한 저작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 작품인 기독교강요의 1559년판 라틴어 직역본(문병호 역)을 활용해 칼뱅의 보혜사론(다시 설명하지만 ‘또다른 보혜사’, 즉 진리의 성령을 의미한다. 일일이 또다른 보혜사라고 표기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보혜사라고만 썼다)을 간략히 정리한 다음 이를 기초로 이만희의 보혜사론을 비평하는 각론으로 넘어가겠다.

1) 칼뱅은 보혜사를 누구라 하는가?

기독교강요에는 성령, 성령의 역할 등 다양한 내용이 나오지만 성경 구절을 인용, 보혜사라는 용어를 사용한 곳은 총 5군데이다. 도표에서 보혜사라는 용어를 사용한 항목은 초록색으로 구분해서 표시했다. 첫 번째, 기독교강요 1권 13장 17절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별됐지만 동일한 하나님임을 설명한다. 두 번째, 2권 16장 14절에선 그리스도의 승천 후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언급한다. 세 번째, 보혜사의 사역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주되심을 증거하는 데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네 번째, 4권 8장 11절에선 교회 공동체, 성도 개개인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설명한다. 다섯 번째, 4권 8장 13절에선 당신의 백성을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말한다. 신론, 기독론, 교회론에 걸쳐서 보혜사 성령의 역할을 다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① 보혜사는 하나님이시다.

요 14:16을 인용하며 보혜사란 단어는 기독교강요 1권 13장 17절에 처음 등장한다. 기독교강요 중 삼위일체를 다룬 항목에서다. 기독교강요 1권 13장의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세 인격으로 계심’이다. 보혜사 성령께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는 인격적으로 구분된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고 말씀하시면서(요 14:26; 15:26) 성령과 아버지의 구별을 은근하게 드러내시고, 자기가 ”또다른 보혜사“(요 14:16)를 보내실 것이라는 선포와 다른 일련의 말씀을 통해 성령을 또다른 분으로 부르시면서 매번 성령과 자기 자신의 구별을 내심 드러내신다.

② 보혜사께서는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

2권 16장 14절이다. 세 번째에 등장하는 3권 25장 3절과 동일하게 모두 요 16:7을 인용하면서 보혜사를 언급한다. 그러나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두 번째는 보혜사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강조한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성령이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적용. 요 16:7 - 필자주: 문병호 역에선 ‘성령’으로 돼 있지만 개역개정에서는 ‘보혜사’라고 번역함). 주님은 자기의 육체적 부재에 대해 제자들을 위로하셨고, 자기가 그들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말씀과 자기가 볼 수는 없을지라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요 14:18-19; 16:14).그가 자기의 육체의 현존을 우리들 위로 들어내어 가신 것은(행 1:9) 여전히 지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과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이 하심으로써 더욱 긴밀하게 현존하는 자기의 능력으로 하늘과 땅을 모두 다스리고자 하신 것이었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자기의 이 승천으로 자기가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성취하셨다. 자기의 몸이 모든 하늘 위로 들려진 것 같이 그의 능력과 작용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경계를 넘어 퍼지고 확산되었다.

칼뱅은 마 28:18-19에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의 실현이 보혜사 성령을 통해 이뤄졌다고 봤다.

③ 보혜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되심을 증거한다.

진정 그는 성령을 보내셔서 확실한 증거를 드러내심으로써, 생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의 최고 통치권에 대해서도 밝히 알리셨다. 그리하여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 16:7)라는 예언을 이루셨다.

보혜사는 인간 속에 들어와 특정 인간이 구원자라는 걸 증거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신 보혜사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살아계심과 그분이 만물의 주인이심을 증거한다.

④ 보혜사께서는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당신의 백성 개개인안에 내주하신다.

칼뱅은 네 번째로 4권 8장 11절에서 진리의 영인 보혜사께서 제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는 물론 신자 개개인안에 언제나 늘 함께 하신다고 설명한다. 보혜사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보편교회를 향한 약속임과 동시에 을 강조한다. 또한 진리의 영인 보혜사 성령께서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생명과 평안으로 얼마나 자신의 백성들을 풍성히 채우시는 분인지를 강조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라고(요 14:16-17) 열두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열두 명 전체에게뿐만 아니라 그들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약속하셨으며, 이에 못지 않게 이미 자기의 나라에 받아들이신 제자들이나 이후에 받아들이셔서 그들의 수에 더할 제자들에게도 약속하셨다.

이 영은 오류, 무지, 거짓, 어두움이 아니라 계시, 진리, 지혜, 빛의 영이시다. 이 영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고전 2:12), 즉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하나님의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엡 1:18)”인지를 그릇됨 없이 배우게 된다.

⑤ 보혜사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

보혜사 성령께서 당신의 백성을 진리로 인도하시는 수단은 ‘생각’을 통해서이다. 인간의 사색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모든 말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이다. 즉, 말씀을 기억하며, 말씀을 반추하는 생각을 수단으로 하신다. 칼뱅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도록 하시는 것 이상을 성령에게서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에 대해서,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7, 13)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에 대해서 주님은 “성령 그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선포하시듯이, 우리는 그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셔서 그의 가르침의 진리를 깨닫도록 하시는 것 이상은 그 무엇도 기대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자랑하지만, 자기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자들은 성령에 대해서 거짓되게 외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나온 말씀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자의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을 친히 입증하셨다(요 12:49-50; 14:10). 그러므로 성령의 이름을 내세우기는 하되 복음이 없이 막무가내로 제시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가 율법과 선지자들의 마침이시듯이(롬 10:4) 성령은 복음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크리소스토무스의 말이다.

칼뱅의 보혜사론은 모든 정통교회가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의 진술 한마디 한마디는 비단 장로교뿐 아니라 침례교, 성결교, 감리교는 물론 오순절에서도 공유하는 보편적 견해이다. 보혜사를 삼위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으로 진술한 칼뱅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영원토록 성도들 안에 내주하며 그들이 믿음안에서 떠나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되심을 증거하고 우리를 끊임없이 진리로 인도하시는 풍성하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영이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보편교회를 지향하지 않는 이만희의 신천지 같은 곳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 견해를 부정하겠는가. 이제 보편교회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일만한 칼뱅의 견해를 중심으로 신천지의 보혜사론의 문제점을 비판해 보겠다.

2) 이만희 보혜사론에 대한 비평

① 대언자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변호자’를 의미한다

이만희는 요1서 2:1을 근거로 대언자의 의미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고 이미 설명했다. 보혜사가 대언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잘 전하면 그 사람도 보혜사라고 할 수 있다는 게 이만희의 주장이다. 가능성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이만희는 대놓고 자신을 보혜사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본 그대로 대언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성경해석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 요 1서 2:1에서 ‘대언자’는 이만희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존재가 아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라고 말씀한다. 이를 쉽게 번역한 성경으로 보면 의미가 명확해진다.

그러나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공동번역).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현대인의 성경).

이만희가 인용한 본문 성경 요1서 2:1은 대언자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짓는 인간인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의미로 대언자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칼뱅은 3권 4장 26절에서 요1서 2:1의 대언자의 의미를 잘 정리했다. 첫째, 하나님과 화해하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밖에 없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라고 말씀한 적이 없다. 둘째, 그리스도의 변호자 신분은 영원하며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영원한 화목 제물이다. 그의 역할이 영원하기 때문에 다른 대언자, 즉 변호자의 역할이 필요 없다. 셋째,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어린양, 죄를 위한 유일한 제물, 유일한 화목의 제물, 유일한 대속물이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피, 희생, 노력의 제물은 하나님께 가는 길이 되지 못한다.

이만희의 성경해석과 달리 요1서 2:1의 보혜사, 대언자는 인간의 대언자임을 강조한 말씀이다. 이만희는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다.

ⓑ 보혜사란 단어는 헬라어 ‘파라크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의 가차음이지 실제로 ‘은혜로 보호하는 스승’의 의미와는 상관 없다. 중국어에서는 외래어를 한자로 표기하는데(이를 가차음이라고 한다), 보혜사가 그런 경우이다.

“중국에서는 ‘피자헛’을 한자로 必胜客(필성객)이라고 한다. 이 한자의 뜻은 반드시 필, 비릴 성, 손 객, 이다. 그러면 ‘피자헛’이 ‘반드시 비릿한 손님’이라고 해석해야 하는가?”

이처럼 가차음은 음만 빌어서 쓴 것이기 때문에 한자의 뜻을 헤아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켄터키치킨(KFC)을 가차음으로 긍덕기(컨떠지 肯德基 즐길 긍, 베풀덕, 터기)라고 하는데 즐기고 베푸는 터전이라고 해석하면 정상인가? 보혜사 은혜로 보호하는 스승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보혜사, 파라크래토스는 변호자(Advocate), ESV 돕는자(Helper), KJV 위로자(Comforter), NAS 돕는자 (Helper) 등으로 쓰였다. 보혜사는 우리를 위로하고 돕고 변호해주시는 분이다. 신천지 신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보혜사라는 이만희는 당신을 돕는 자인가, 위로하는 자인가, 변호하는 자인가? 아니면 상처를 주는 자인가, 막말하는 자인가, 호통치며, 두려움을 심어주는 자인가? 나아가 남의 죄를 대변할 자격이 없는 범죄자는 아닌지 생각해보라. 이만희는 보혜사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 불과하다.

ⓒ보혜사는 죄가 있어서는 안된다. 죄인은 보혜사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변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동일한 죄를 지은 인간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변호할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대언자가 있으니,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 1서 2:1)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만희는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일반인보다 더 악한 범죄자이다.

이만희는 1980년 10월 27일에 구속됐다가 풀려난 전력이 있다. 그의 40년전 혐의점은 명예훼손으로 알려졌다. 2020년 8월 1일에는 90세의 나이로 횡령,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두 번째 구속됐다. 2021년 11월 30일에는 수원고법 형사3부(부장판사 김성수)가 이만희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과 업무상횡령 혐의를 적용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고, 80시간의 준법교육 수강을 명령했다.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형사 처벌을 받은 전력의 그가 도대체 누구를 대신하여 죄를 중보하고 말씀을 전할 자격을 갖고 있다는 것인가? 그는 보혜사일 수가 없다.

② 성경은 진리의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지 진리의 성령을 ‘받은 사람을’ 보혜사라고 하지 않았다.

이만희는 ‘진리의 성령과 하나되어 일하는 사람도 보혜사, 보혜사의 영이 임한 사람도 보혜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칼뱅은 마 28:19에 세례를 베풀 때 삼위의 명칭을 나열하며 한 하나님이라고 강조한다.

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적용, 마 28:19)라고 말씀하실 때, 이 엄숙한 선포로써 믿음의 완전한 빛이 나타났음을 증거하기 원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가운데서 아주 명백하게 자기를 드러내신 한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아주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세 인격이 주재하며, 세 인격 안에서 하나님이 한분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당연히 진리의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인간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일한다고 특정인을 보혜사라고 해선 안된다. 보혜사로 지칭된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보혜사라고 하면 그 사람을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을 이용해 성경에서 가장 경멸하며 금지하는 우상숭배 하는 행위이다.

ⓑ성령이 임하거나 성령의 계시를 받은 어떤 인물도 자신을 ‘보혜사’라고 주장한 바가 없다.

만일 이만희의 주장대로 진리의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이 보혜사라고 한다면 사도 요한도 보혜사가 돼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고(계 1:2), 성령에 감동되어 음성을 들었으며(계 1:10; 4:2), 성령이 이끄시는대로 갔다(계 17:3; 21:10).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사도요한을 보혜사라고 하지 않았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일어난다.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을 보혜사라고 한 바가 없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베드로(행 4:8), 지혜와 성령으로 말한 스데반(행 6:10), 성령 받은 남녀(행 8:17), 성령으로 말한 아가보(행 11:28)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성령을 받고 행하고 말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보혜사로 일컬어진 사람은 없다. 따라서 성령이 임한 사람을 보혜사라고 할 수 있다는 이만희의 주장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보혜사께서는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성도들과 함께 하실 뿐 세상은 그를 알지도, 받지도 못한다.

제자들에게 함께 하셨던 성령님은 영원토록 그의 자녀된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영원토록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만희가 보혜사라면, 그가 언제 인간들과 영원토록 함께 한 적이 있는지 답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 등 제자들과 함께 한 적이 있는가? 바울과는?

성경은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고 하셨다. 진리의 영은 세상이 받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만희가 2020년 8월 1일 구속되는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로 방영됐다. 세상이 능히 보고 알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다른 보혜사’는 ‘너희 속’에 오신다고 하였다. 이만희 한 사람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셨다. 육을 가진 이만희가 어떻게 사람의 속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만희는 ‘다른 보혜사’가 될 수 없다.

③ 보혜사 성령이 1980년대에 왔다고 하면 성경의 성령의 역사를 모두 부정하게 된다

1931년생 이만희가 보혜사이고 그가 역사를 펼친 1980년대에 보혜사 성령이 임하였다면 그 이전에 성경에 등장하는 성령의 역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을 풍성하게 부어주시고 놀랍게 그의 나라를 확대하하시고 큰 권능을 발휘하셨다고 말한다. 만일 1980년대에 보혜사 성령이 내려오셨다면 예수 승천 후 이천년 동안 성령이 신자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셨다는 의미가 된다. 성령께서 모든 진리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지 못하셨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신천지의 ‘기원’은 그것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이들은 서력기원을 쓰지 않고 ‘신천기’를 쓴다. 신천지 집단이 공식 설립된 1984년을 신천기 1년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승천 이후부터 2천년 동안의 역사를 무시하지 않고서는 사용할 수 없는 기원이다.

④ 성령은 하나님이시기에 ‘진리 성령’, ‘일반 성령’으로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을 ‘진리 성부’, ‘일반 성부’로 나눌 수 있을까? 예수님을 ‘진리 성자’, ‘일반 성자’ 나눌 수 있을까? 없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이다. 성령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진리 성령’과 ‘일반 성령’으로 나눌 수도 없고 나눠서도 안 된다. 만일 이를 나눈다면 진리 하나님, 일반 하나님으로 나누는 격이 된다.

ⓐ칼뱅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며 ‘우리를 하나님의 전’(고전 3:6-17)이라고 결론을 내린 점에 주목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전이라는 점을 통해 칼뱅은 성경은 성령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회피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칼뱅은 은사가 여러 가지로 나뉠 수는 있어도 성령은 나눠질 수 없음으로 ‘같은 한 성령’(고전 12:11)임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이만희의 보혜사론과 칼뱅의 보혜사론을 비교해 보았다. 이만희의 보혜사론은 성경을 자기 맘대로 조작해 성경이 가장 경멸하고 금하는 우상숭배자로 변질시키는 작업을 걸고 있다. 반면 칼뱅의 보혜사론은 보편교회의 일원이라면 그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으로서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주되심을 증거하는 분이다. 따라서 칼뱅의 보혜사론은 보면 볼수록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믿어지는 보혜사론, 이만희의 보헤사론은 공부하면 할수록 우상숭배자로 만든다. 즉 이만희를 이 시대의 보혜사, 재림주, 구원자로 믿게 하는 무서운 왜곡 교리이다.

Ⅲ. 결론

지금까지 신천지의 보혜사론과 칼뱅의 보혜사론을 비교해서 분석하고 비평했다. 이만희의 보혜사론은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는데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만희는 1931년생인 자신을 스스로 보혜사라고 한 반면 성경은 보혜사께서 곧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이만희는 요 1서 2:1을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면 그게 대언자이자 보혜사라고 했지만 요1서 2:1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하는 사람이 대언자라고 하지 않고, 범죄자를 대신해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언자라고 말씀한다.

이만희는 진리의 영을 받은 사람이 보혜사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성경은 진리의 영이 곧 보혜사이지 그것을 받은 사람이 보혜사라고 한 바가 없다. 만일 진리의 영을 받아서 보혜사가 된다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성령이 임하거나 감동된, 사도요한, 바울, 베드로 모두 보혜사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한 바가 없다. 또한 보혜사 성령이 1980년대에 내려오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의 성령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발언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이만희의 우상숭배적 교리를 이토록 길게 반증하는 이유는 이만희를 보혜사라고 믿고 따르며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는 수십만명의 청춘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혹시라도 회복을 위해 바른 것을 찾아 헤매다가 어느날 반증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성경적인 사고와 생각으로 보혜사론을 교정해 바른 신앙을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신관만 자리 잡아도 성령을 인간으로 믿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는 이단 사이비들이 나타나 스스로를 보혜사, 재림주, 구원자라고 자칭하고 있다. 이들에 미혹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보혜사론을 정리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실제 상담사역에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다.

이만희의 주장은 불행하게도 한 사람에 그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즉, 이만희식 논리를 타인에게 제대로 세뇌하고 주입시키면 그 누구나 보혜사가 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이만희가 살아 있는 현재가 아니라 사후에 더욱 큰 문제로 부각될 수 있다. 이만희의 주장에 세뇌된 사람이 신천지식으로 또다른 사람들에게 주입하면 인간을 믿고 따르는 구조가 머리 속에 들어가 또다른 사람을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게 된다. 이런 위기가 찾아오기 전에 미리 바른 보혜사론을 가르쳐 잘못된 이만희의 교리를 비평해 놓는다면 혹시라도 미혹 초기 단계에 있는 성도가 있다면 잘못된 주장을 분별하는 기준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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