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때, 살육 당할 대상이 개신교회라는 손계문

박유신 목사의 유튜브 쟁점진단 - 11HN 성서연구원 마지막편

2021-10-05     박유신 전문연구위원

1. 손계문 목사에 대한 비평
1) 손계문 목사의 주장

손계문 목사가 2019년 8월, 유튜브 채널 ‘성서연구원’에 올린 요한계시록 강해(27~29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하단 녹취록 참고)

* 요한계시록 19:19-21은 재림 때 교황과 미국과 개신교인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죽고 새들의 먹이가 됨을 보여준다.
* 재림 이후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오게 된다.
* 새 하늘과 새 땅은 천국을 가리킨다.

2) 성경적 비평
손계문 목사는 요한계시록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요한계시록 19, 20, 21장 해석에서도 개신교회의 멸망이라는 주제를 이어간다. 그는 짐승, 거짓 선지자, 바벨론을 심판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 범주 안에 개신교회를 포함시킨다. 백마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어있는 요한계시록 19:17-21 해석에서는 이 주제의 절정을 이룬다. 손계문 목사는 재림 때에 무시무시한 심판을 받고 살육 당할 대상을 교황, 미국, 개신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는 ‘첫째 짐승’(13:1)은 세상 권력과 손을 잡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가톨릭이며, ‘둘째 짐승’(13:11)은 거짓 성령 운동으로 각종 치유 집회 등 기적을 행하는 미국과 개신교회라고 하며 이들이 재림 때에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살라지며, 그 시체들은 새의 먹이가 된다고 한다. 과연 계시록의 본문이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일치할까?

첫째 짐승이 누구인지 요한계시록 13:18이 밝혀준다. 육백육십육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짐승은 ‘네로’이며, 둘째 짐승은 “땅에 거하는 자들”(13:14) 즉 당시 사람들에게 짐승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게 하며 표를 팔았던 종교적 제의와 관련된 세력들을 가리킨다(13:11-18). 이를 교황과 미국과 개신교회를 가리킨다는 주장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다. 손계문 목사는 요한계시록 19장에 등장하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6-10절)와 하나님의 큰 잔치(17-21절)를 구분하고 전자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축복의 대상, 후자의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저주의 대상으로 정의한다. 그는 특히 후자의 잔치 장면은 재림 때에 교황청과 연합된 미국의 종교 세력과 전 세계 개신교인들이 죽임을 당하여 공중의 새들에게 뜯어 먹히는 장면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그런 의도를 찾을 방법이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큰 잔치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대조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패배한 원수들의 피비린내 나는 희생 제물로 이루어진 승전 연회를 의미한다(데이비드 E. 아우네, 『요한계시록 17-22』 330.) 여기에서 ‘그 잔치’에 해당하는 토 테이프논(τὸ δεῖπνον)은 9절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언급할 때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이 잔치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구분되는 별도의 잔치가 아니라 동일한 잔치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이 잔치의 하객으로 형상화된 승리한 교회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된 반면 이 하나님의 큰 잔치는 종말론적 적대 세력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하나의 잔치이지만 각기 다른 관점에서 묘사되었다. 이 적대 세력들은 왕들, 장군들, 장사들, 말 탄 자들, 자유인들, 종들, 작은 자나 큰 자, 모든 자(19:18)이며, 이들의 시체의 살이 공중의 새들의 먹이가 된다. 이를 가리켜 교황을 중심으로 한 종교 세력들과 전 세계의 개신교인들이 장래에 공중의 새들에 실제로 뜯어 먹히는 장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해석이다. 손계문 목사는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의 부정적인 개념과 요소들을 가톨릭과 개신교회에 적용하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손계문 목사는 요한계시록 21:2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은 현재 이스라엘에 있는 성전이 아닌 하늘에 있는 실질적인 성전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요한계시록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즉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로 묘사한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을 신부로 인격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성전이 건물이 아님이 확인된다. 다시 말하면 새 예루살렘 성은 신부라는 인격과 결부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9-10에서는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진작 보인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다. 새 예루살렘 성은 어린 양의 신부이다. 그러면 이 신부는 누구일까? 요한계시록 19:7-8은 신랑인 어린 양이 자기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결혼 예복으로 선물한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상징한다. 신부는 곧 성도이다. 신부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신부는 멸망하는 바벨론(17장)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 공동체를 상징한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교회를 다양한 언어로 묘사한다. 셀 수 없는 큰 무리(7:9-17), 십사만 사천(7:1-8; 14:1-15), 두 증인(11:3-13), 여인(12장), 신부(19:7-9)는 모두 교회를 나타내는 상징적 묘사이다. 요한은 교회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이미지들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로 응축한다. 요한이 본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 공동체이다.

손계문 목사는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 존재하는 실제 성이며, 이 성이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지상에 내려온다고 인식한다. 매우 심각한 오독이다. 그의 요한계시록 해석은 너무 많은 논리적 편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상식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손계문 목사는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 21:1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천국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의 설교를 들어보자.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일까요? 성경은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신부가 단장하듯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고 있고 기다리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결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은 어떤 삶일까?”

손계문 목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신부로, 그리고 성도를 신랑으로 이해한다. 더군다나 이 신랑과 신부의 결혼 생활을 성도의 천국 생활로 인식하고 있다. 2019년 8월 14일 “천국에서 뭐하며 사나요?”라는 제목의 설교에서는 성도의 천국 생활 열두 가지를 소개한다. 과연 ‘새 하늘과 새 땅=신부=천국’이라는 이러한 등식이 성립 가능한가? 과연 새 하늘과 새 땅과 성도의 관계를 하늘과 땅의 혼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손계문 목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결과이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2)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가리켜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표현했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인가?

요한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질 것이라는 묵시론적 주제를 인용해서 역사의 마지막에 도래할,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하늘과 땅의 도래를 보여준다(21:1).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사라짐은 예수의 종말 강화(막 13장), 공관복음(마 5:18; 막 13:31; 눅 16:17), 히브리서 12:26-27, 베드로후서 3:12-13, 학개 2:6에서도 발견된다. 이전 하늘과 이전 땅이 없어지는 엄청난 우주적 대 격변 이후에 펼쳐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에덴의 모습이 회복되는 이사야 65:17-25에서 찾아 볼 수 있다(데이비드 E. 아우네, 『요한계시록 17-22』 444).

요한계시록 22:1-6에 등장하는 ‘강’, ‘열매’ ‘생명나무’ ‘하나님의 얼굴을 봄’ 등은 이 본문이 에덴의 종말론적 회복을 조망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생명수 강으로 이해되고, 에덴에서 천사들이 지켰던 생명나무는 강의 좌우편에 자리하며 과실을 풍성히 맺고 있고, 에덴에서 단절된 교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회복된다(위의 책, 536).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 역사의 종착점으로 에덴 회복의 목적이 완성되는 새 창조를 나타내준다. 창세기 1장에서 처음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성취되는 전 지구적인 사건이다. 에덴의 회복이라는 목표가 이루어진 우주적 사건이다. 이와 같은 미래적 사건을 현재의 천국으로 제한하고, 천국에서 일어나는 열두 가지 일을 제시하는 것은 무지와 상상력이 만난 판타지이다. 더군다나 요한계시록의 대미를 장식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설교에서조차도 불 못을 운운하며 목사들을 거론한다. 그는 처음부터 개신교회와 목회자들을 멸망의 대상으로 전제해 놓고 성경에 접근한다. 개신교회 멸망이라는 주제는 요한계시록 설교 내내 그 입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마지막으로 손계문 목사의 내세관을 짚어 보고자 한다. 그는 매우 비성경적인 내세관을 가지고 있다. 그가 2019년 8월 17일 “요한계시록 강해 28부”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성경은 의인들이 죽으면 바로 하늘에 간다거나 천국 간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사람이 죽으면 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믿어왔겠지만 성경은 예수님 재림 때에 의인들이 부활해서 하늘에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가 죽으면 바로 천국에 가고 불신자가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씀이 없어요”.

손계문 목사는 인간의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며, 사후 의인의 영혼은 천국으로, 악인의 영혼은 지옥으로 분리된다는 내세관을 부정한다. 그는 2018년 4월 21일 “요한계시록 강해 12부” 설교에서도 몸이 죽으면 영혼도 동시에 수면 상태로 들어감으로 사후에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일은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와 같은 교리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신구약 성경은 사후에 몸과 영혼이 분리될 뿐 아니라 몸을 떠난 영혼들의 상태에 관해 다양한 증언을 한다.

이사야 14:12에 의하면, 음부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이 바벨론 왕이 음부로 내려올 때, 즉시 그인 줄 알아보고 조롱 섞인 인사말을 외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사후에 아무 의식 없이 수면 상태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알았던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욥기 19:26은 욥이 자기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 즉 죽음 이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고백한다. 욥은 자기가 죽은 후에 잠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마태복음 7:22은 악인들이 지상에 있을 때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냈으며, 많은 권능을 행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마태복음 25:37-40은 의인들이 지상에서의 자신의 옛 삶을 기억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죽은 이후에도 의식이 없는 상태로 지내고 있지 않다.

누가복음 16:9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의 빚을 탕감해준 청지기를 영원한 처소 즉 천국에서 알아보게 됨과 동시에 교제가 있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이 구절은 사후 몸을 떠난 영혼들이 지각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16:19-31은 음부에 처한 부자가 나사로를 알아보고 있고, 자기 형제들이 지상에 다섯 명이 남아 있음을 기억한다.

누가복음 23:43에서 예수님은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하셨다. 여기서 낙원은 성도의 영혼이 육체의 부활 시까지 머무르는 공간을 의미한다. 바울이 보고 온 셋째 하늘도 이 낙원을 가리킨다(고후 12:4).

고린도후서 5:8은 죽음 이후 그리스도와 교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바울은 죽음이 실존의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된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1:23은 바울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원했고 그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고백한다. ‘떠나서’라는 말은 현세의 생명을 장막으로 비유한 죽음에 대한 표현이다. 성경은 사후에 수면상태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갖게 되는 교제가 있음을 말한다.

히브리서 11:10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설계하고 만드신 하늘의 도성을 소망했고, 히브리서 11:16은 이 곳을 하나님이 예비하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이 도성은 몸을 떠난 영혼이 거주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히브리서 11:13-16은 믿음의 선진들은 스스로를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여겼다는 사실과 그들이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하늘의 도성을 추구했으며 또 실제로 거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거기에는 ‘장자들의 총회’ 그리고 ‘의인의 영들’이 살고 있다(히 12:23).

이 구절은 몸을 떠난 영혼들이 계속 살아서 활동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2:1의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이 땅에서 생애를 끝내고 떠난 믿음의 선진들이며 이들은 땅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교회를 격려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체 잠들어 있지 않다.

베드로전서 3:19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옥에 있는 영들을 찾아가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셨다. 본문은 지하세계에 거짓 선지자들의 영, 불신자의 영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후 몸을 떠난 인간의 영혼은 수면 상태에 있지 않고 각자 운명 지어진 처소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으며, 계속해서 활동하는 있음을 증명하는 성경의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 천국과 지옥은 성경에 분명한 뿌리를 두고 있다. 손계문 목사는 자기 자신을 종교개혁자의 전통을 이어받은 후예라고 말하지만 그가 가르치는 ‘영혼수면설’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와 여호와증인의 교리이다.

2. 다음은 손계문 목사의 요한계시록 강해 27부~29부의 주요 내용을 요약 녹취한 것입니다

계시록 19장에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 뿐 만 아니라 새들의 잔치가 나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정을 받은 사람들은 축복의 대상들이에요. 그런데 회개치 않은 사람들은 공중의 새들의 먹이가 되는 무시무시한 잔치의 대상이 됩니다. ...여기 짐승은 계시록 13장부터 묘사된 세상 권력과 손을 잡고 성도들을 핍박하면서 진리를 왜곡시키는 종교적 세력의 총집합체인 첫째 짐승 교황청이고 거짓 선지자는 짐승과 손을 잡아서 거짓 성령 운동으로 각종 치유 집회 등 기적을 행하면서 첫째 짐승을 위해 우상을 만들고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강요하는 둘째 짐승, 미국과 배도한 개신교회입니다. 이 기만의 거대한 두 조직체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을 기적으로 속여서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장본인들입니다. (손계문, 2019년 7월 27일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 27부” https://www.youtube. com).

천년이 지난 다음에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까?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성이 내려옵니다. 자 여기 예루살렘성이 현재 이스라엘에 있는 예루살렘인가요 지금 실제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나요? (실제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옵니다(손계문, 2019년 8월 17일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 28부” https://www.youtube. com).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일까요? 성경은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신부가 단장하듯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고 있고 기다리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결혼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은 어떤 삶일까?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영원히 공부합니다. ...노동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해서 새 몸을 입을 때 키가 아담처럼 커 있을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한번 읽으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통째로 암송할 수 있는 그런 기억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뭔가를 자세히 보고 싶다며 우리의 눈이 현미경이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가고 싶다 해서 모두가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불 못에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비성경적인 설교를 하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목사들은 설교할 때마다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손계문, 2019년 8월 24일 설교, “요한계시록 강해 29부” https://www.youtube. 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