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퍼킨스·에임스·루더포드·런던침례교 신앙고백서의 최후 심판과 구원이해

변승우·피터럭크만·엘렌 화잇의 최후 심판의 구원과 비교하여

2021-07-12     정윤석 기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Th.M.)과정(안상혁 지도교수) 3학기 과제로 제출한 소논문입니다. 인터넷 언론의 기술적인 어려움으로 각주를 달지 않았습니다. 각주가 달린 글을 보기 원하시는 유료회원은 가장 하단에 다운로드 기능을 활용하시면 됩니다(유료회원 전용). 

Ⅰ. 서론  1. 연구동기

최후 심판은 성도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적 이미지로 연상된다. 영화 터미네이터2의 부제가 ‘심판의 날’이었다. 영화는 핵전쟁으로 멸망한 미래에 살아 남은 사람들과 기계인간들의 처절한 전투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핵전쟁은 이처럼 인류 최후의 심판의 날의 이미지와 연결돼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인류의 종말도 두렵지만 그후에 벌어질 일 또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준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이 두려움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사로잡는 매개체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이나 거룩을 지향하는 삶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마지막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해 완전 성화를 주장하며 그렇게 성화된 사람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에 그리스도인에게 마지막 심판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주제이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의 구원과 관련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때, 또 남모를 두려움에 떨고 있을 사람들에게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한 신앙의 선진들의 지혜를 나누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2. 연구 범위와 방법
우선 필자는 종교개혁자 칼뱅과 그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 윌리엄 퍼킨스, 그의 제자 윌리엄 에임스·사무엘 루더포드와 개혁주의 전통을 이어 받은 특수침례교회 목회자들이 중심이 된 제2차 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최후 심판과 구원의 이해를 살펴볼 것이다. 칼뱅(1509년-1564)은 더 설명이 필요없는 위대한 종교개혁가이다. 파리에서 철학과 논리학, 라틴어를 수학했고 20대 초반까지 법학을 공부했다. 1535년 초판을 낸 기독교강요는 1559년까지 최종판을 냈고 그의 신학사상은 스위스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을 거쳐 신대륙으로 전파되어 프로스테스탄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윌리엄 퍼킨스(1558-1602)는 ‘청교도의 아버지’로 불린다. 영국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연구원과 학장을 역임했다. 약 50여 권의 저술을 통해 청교도 신학의 토대를 놓았으며 청교도 설교 운동과 경건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 에임스(1576-1633)는 청교도 신학자로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윌리엄 퍼킨스 아래에서 수학했다. 그는 네덜란드 개혁 교회가 1618-1619년까지 개최한 도르트회의에서 큰 활약을 했다. 그의 저서는 라틴어로 쓰여 유럽 대륙 전체와 영국, 그리고 뉴잉글랜드 신학계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사무엘 루더포드(1600-1661)는 17세기 스코틀랜드 개혁파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스코틀랜드를 대표해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했고 스코틀랜드 장로교 주의의 챔피언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루더포드는 장로교 노회 정치를 성경적으로 적극 옹호하는 한편 독립파의 회중교회론을 논박했다. 17세기 영국-스코틀랜드 역사의 격동기를 헤쳐나간 루더포드의 저서들은 성경의 복음 진리를 훼손하는 거짓 가르침과 싸우며 개혁신앙을 변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 언약을 묵상하고 은혜 언약의 달콤함을 찬양했다. 제2차 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는 침례교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서로서 철두철미하게 개혁주의적 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고백서는 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6), 회중교인들의 사보이 신앙고백서(1658), 제 1차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1644)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이 소논문의 분석을 위한 자료로는 칼뱅의 『기독교강요』, 윌리엄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 윌리엄 퍼킨스의 『황금사슬: 신학의 개요』, 사무엘 루더포드 『생명언약 1~2부』, 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 등을 택했다. 이 자료들을 통해 개혁신학의 선조들이 생각한 최후 심판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그 엄중한 심판대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란 주제를 살펴볼 것이다.

반면 이에 대한 비교 자료로 예장 합신 2009년 94회 총회에서 이단성 인사로 규정한 변승우의 책자 중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 피터 럭크만(Peter S. Ruckman -예장 합동이 1998년 이단으로 규정한 말씀보존학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의 『요한계시록 주석』, 예장 통합 1995년 80회 총회에서 이단 규정한 안식교의 창시자 엘렌지 화잇을 통해 변승우, 피터 럭크만, 엘렌지 화잇이 생각한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의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얀색을 하얀색이라고만 말하기보다 검정색을 옆에 놓고 하얀색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해한다. 변승우와 피터 럭크만과 안식교의 엘린지 화잇의 구원론을 살펴보는 것은 정통교리를 더욱 선명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 소논문을 통해 마지막 때 최후 심판의 자리에 설 것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기보다 지금부터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참소망은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고 그 공로를 의지하는 데 있음을 되새기고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았으면 좋겠다. 개혁신학의 후예들은 무척이나 많고 문제 단체와 인사로 규정된 변승우와 엘렌지 화잇의 문제점도 적지 않지만 이번 논문에서는 오로지 그들의 최후 심판에 대한 개념과 구원의 방법 이해에 집중하겠다. 또한 그들이 사용한 성경본문 주해의 진위 여부를 가리거나 비평하는 일은 논외의 일로 여겨 여기서 다루지 않았다.

Ⅱ. 본론

1. 개혁주의 신학이 보는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 이해

1.1. 칼뱅의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 이해

칼뱅은 그의 작품 기독교강요를 비롯해 어떤 작품에서도 ‘종말론’(Eschatology)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칼뱅은 『기독교강요』2.16.18에서 사도신경을 강해하며 세계의 종말과 심판 속에서도 성도들이 위로를 얻는 이유를 언급한다. 이를 중심으로 칼뱅의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이해를 살펴볼 것이다. 다만 그 전에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한다.

이천년 전의 구원과 종말·재림·최후 심판 때의 구원의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오해이다. 지금은 절판됐지만 한 때 논란이 됐던 데이비드 차는 말세의 구원의 기준을 예수님의 초림 때는 그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고 지금은 변화가 왔는데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고 믿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성경에 있는대로 짐승의 표, 생체칩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이것이 말세의 깨어 있는 신앙이라고 서술한다.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구원의 기준이 마지막 때에 바뀌거나 변경되거나 변질된다고 가르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구원의 기준은 초림-재림(최후 심판)까지 모두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를 칼뱅의 진술을 통해 확인해보자.

1.1.1 최후 심판

1) 최후 심판의 대상: 칼뱅은 최후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보이는 형태로 내려오실 때 무한한 신성의 권능 가운데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때라고 설명한다. 그때는 마 25:31을 근거로 양을 염소로부터, 선택된 자들을 버림 받은 자들로부터 분리시키실 날이다. 그때 산 자든 죽은 자든 그의 심판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자리에는 그날에 살아 남아 있는 자들, 죽었던 자들 모두가 망라돼 심판의 자리에 소환된다(살전 4:14-17).

2) 최후 심판에서 얻는 위로: 칼뱅은 최후 심판 앞에서 성도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고 오히려 놀라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의 수중에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형제자매로 삼으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심판하는 영예를 나눠 갖도록 미리 지정하셨다(마 19:28).

둘째,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의 목적은 성도, 하나님의 백성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뱅은 가장 관대하신 임금이 어찌 자기의 백성을, 어찌 머리가 몸된 교회된 자기의 지체들을, 어찌 우리의 수호신이 그에게 피하는 자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흩어 버리고 저주할 수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셋째, 그리스도가 중재하시므로 아무도 능히 우리를 정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8:33-34).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이 재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수호자, 중재자, 구원자, 관대한 임금이시다. 최후 심판에 직면했을 때도 그의 중재·중보자로서의 직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중재하시는 은혜를 따라 최후 심판에도 구원받는다.

1.1.2.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

칼뱅의 구원의 근원은 칭의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적 행위에 의한 것이다.

1)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위

칼뱅은 회심의 의지를 비롯한 구원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빌립보서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확신하노라”(빌 1:6)라고 말할 때 ‘착한 일의 시작’은 의지 안에 존재하는 회심의 기원 그 자체를 지칭한다. 칼뱅은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의를 향한 사랑과 갈망과 열의를 불러 일으켜, 더 적절하게 말해서, 우리의 마음을 돌리시고, 빚으시며, 지도하셔서 의에 이르게 하심으로 선한 일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확정하셔서 견인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 일을 완성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실한 행위로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위로 마지막날,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구원의 상태를 유지하며 넉넉히 구원 받게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행위

칼뱅은 엄위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한 율법적 의, 행위의 순전함을 우리 자신의 척도가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서 생각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그런데도 자신의 행위의 의에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들을 놓고 칼뱅은 ‘가장 사악한 군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 앞에서 설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의 공로를 힘입은 사람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를 전가받은 사람

최후 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로움은 그의 백성에게 전가됨으로 행위 심판에서 면책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로움을 덧입는 것을 신앙의 선배들은 ‘능동적 순종’이라 했는데 칼뱅은 이 용어를 직접적으로 정교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서 씨앗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신앙의 선조들은 주장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자기의 의를 우리에게 교통시켜 주시는 그 법을 좇아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그의 힘이 흘러 들어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마치 우리의 순종인 것처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됨으로써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과 평행을 이루는 마지막 아담 예수의 순종은 당신의 백성을 의롭게 한다.

둘째, 십자가에서 죄값이 치러진 사람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의롭게 되는 동시에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을 얻는 절대적 방편이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값이 제시됐고 예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입으시고 죄값을 완전히 지불해 주셨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더 이상 치러야 할 죄값이 없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기를 저주에 묶으셨고 인간에게 드리웠던 모든 저주를 옮겨가셨다.

3)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행위

칼뱅에 따르면 우리 안에 구원의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신실하게 이를 완성해가신다. 우리 안에 새 영을 불어 넣으시고 착한 의지로 효과적으로 선을 택하는 열망을 통해 이를 이뤄가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인간이 “한몫 끼는 것을 분명히 배제하고 있다”는 게 칼뱅의 입장이다. “전체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므로 사람이 그것으로 영광을 취할 것은 극소량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칼뱅은 ‘심판의 놀라운 위로’라는 제목의 기독교강요 3.16.18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리스도가 중재하시므로 아무도 능히 나서서 우리를 정죄할 수 없으리라고(롬 8:33-34) 사도가 담대히 외치는 것을 볼 때, 친히 중재자 되신 그리스도가 자기의 보살핌과 보호 가운데 받아들이신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으시리라는 사실에는 더더욱 틀림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을 구해야 할 우리의 구속주의 심판좌 외에는 다른 어디에도 서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저 사소한 안위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의 근원이시요 심판의 최종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칼뱅은 구원을 위해 가장 작은 한부분이라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오려고 하지 말라, 다른 곳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라는 샘으로부터 우리를 가득 채우도록 하자고 권면한다. 칼뱅은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강조한다.

1.2. 윌리엄 퍼킨스·윌리엄 에임스·사무엘 루더포드·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의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

1.2.1. 윌리엄 퍼킨스의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 이해

최후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분의 나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을 영영한 불에 들어가게 하는 선고의 자리다. 성도들은 그때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로우시다고 고백할 것이라는 전제가 퍼킨스·에임스·루더포드의 신학에 담겨 있다. 따라서 최후 심판은 두려움과 공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되고 의로우심을 찬양하는 자리다.

1) 최후 심판의 대상: 윌리엄 퍼킨스는 그의 책 『황금사슬: 신학의 개요』제 50장~51장에서 최후의 심판에 대해 다룬다. 최후 심판이 있는 날 살아 있는 택자들은 즐거워할 것이며 유기자들은 두려움에 떨 것이다. 그 이유는 최후 심판의 자리에 택자와 유기자가 함께 설지라도 심판에서 영벌을 받을 대상은 유기자들이지 택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퍼킨스는 철저하게 최후 심판에서 영벌이 유기자들을 향한 몫이라고 선을 긋는다. “최후의 심판대,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 모든 사람들이 모였을 때, 유기자들과 구별된 택자들은 공중으로 높이 들려 그분의 오른편에 서게 된다. 그리고 생명의 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신다. ‘나의 아버지께 축복받은 자들아 와서 세상의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서 준비된 왕국을 소유하라’(마 25:32).”

2) 최후 심판에서 얻는 위로: 퍼킨스는 성경말씀을 근거로 △최후 심판은 의가 있는 곳인 새하늘 새땅을 바라보는 날(벧후 3:12, 13) △택하신 자들을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는 날(마 24:31)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날(마 24:30)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되는 날(살전 4:17)로 정리한다. 최후 심판은 택자나 불택자 모두 심판받는 날이 아니라 불택자를 향한 것이며 택자는 하늘에서 영원한 지복을 누리게 된다.

최후의 심판 후 택자의 상태는 하나님 영광과 위대하심을 바라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화할 것이며 천국의 기업뿐 아니라 새롭게 된 하늘과 땅을 상속받게 된다.

3)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 퍼킨스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가 구원의 근거라고 봤다. 베르나르두스의 『아가서 설교』를 인용, 퍼킨스는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다”며 “마치 모든 사람의 죄가 한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한 사람의 성화는 모두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정리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가 그의 선택된 백성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퍼킨스는 칭의를 ‘이중전가’의 측면에서 진술한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사면하셨다. 죄의 전가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로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로움에서 온다. 이는 의의 전가이다. 즉 죄는 그리스도께로,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에게로 옮겨지는 이중전가가 퍼킨스 칭의의 핵심이다.

퍼킨스는 그리스도인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 외에는 없다면서 심지어 “은혜속에서 이루어진 행위는 매우 합당하게 영생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오류 항목으로 넣는다. 다시 말해 아무리 은혜 속에서 복음적 순종을 하고 선행을 한다 해도 그것은 영생을 받을 자격을 갖추는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퍼킨스에게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합당한 공로는 신인이신 분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지, 피조물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1.2.2. 윌리엄 에임스의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 이해

윌리엄 에임스는 그의 책 『신학의 정수』 41장에서 세계의 종말을 다루며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인들의 죄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대해 간략히 다뤘다.

1) 최후심판의 대상: 최후 심판 때 모든 자가 그리스도에 의해 일어나지만 신자가 아닌 다른 자들은 사망과 정죄를 언도받는 날이다. 최후 심판이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선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는 형사법정에서 무죄가 되든, 유죄가 되든 소송을 당하는 사람은 법원에 출두해야 하고 재판석 앞에 서야 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무죄 방면되는 사람을 심판 받았다고는 하지 않는다. 반면 유죄 처리된 사람은 심판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최후심판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대상은 곧잘 신자가 아닌 비신자, 택자가 아닌 유기자임을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최후 심판의 대상은 모든 자라고 할 수 있으나 생명의 부활이 아닌 사망의 부활로 나아가는 불신자들이야 말로 최후 심판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2) 최후 심판에서 얻는 위로

최후 심판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최후 심판 때 불경한 자와 경건한 자가 최종적으로 분리된다. 신자들은 생명의 부활을 얻는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들 안에 거하시는 살리는 영의 역사가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반면 신자가 아닌 자들에게는 보복적 공의가 실행된다.

둘째, 최후 심판의 시행자는 왕권을 가진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왕이자 제사장이요 중보자이다. 신자들에게 최후 심판은 은혜로부터 유래한다.

3) 최후 심판에서 얻는 구원

최후 심판이 두려운 이유 중 하나는 죄 문제 때문이다. 신자들의 죄는 심판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셔서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에임스는 이를 명백히 한다. “신자들의 죄들은 심판되지 않는다. 현생에서 죄들은 칭의의 선고에 의해 가려지고 제거된다. 최후의 심판은 칭의의 선고의 확증이요, 표현일 것이다. 이들이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은 부당하다.” 칭의가 될 때 이미 치러진 죄값을 다시 드러내서 심판을 한다면 부당하다고 에임즈는 주장한다. 에임즈가 최후 심판에 대해 칭의 선고의 확증이요, 표현이라고 본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최후 심판 때 우리가 생명의 부활로 갈 수 있는 조건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칭의, 그 자체다.

1.2.3. 사무엘 루더포드의 최후 심판의 대상·위로·구원

필자가 수집한 자료에서 루더포드는 최후 심판에 대해 별도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칭의론을 통해 최후 심판의 대상과 그 가운데서 성도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를 충분히 추론해 낼 수 있다.

사람들은 “끝까지 견디는 믿음이 반드시 새언약의 조건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최후 심판의 날 “적합하고 완벽하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 믿음은 곧 그 정도와 부분에 있어서 끝까지 충만하고 온전히 성취된 순종으로서의 믿음이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루더포드는 새언약을 행위언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루더포드는 믿음조차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으로 돌리기를 거부한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은 결국 끝까지 견디지만,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것을 조건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요 5:24절을 신자가 끝까지 견디는 최후의 순간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그에게 주어진 말씀이라고 제시한다.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살아 있는 믿음은 충만한 수준에 이르러 완전하게 됐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상관없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게 루더포드의 진술이다. 행위언약 아래에서는 행위를 끝까지 지속해야 하는 게 구원의 조건이라면 은혜언약에서는 ‘아들을 믿는 자’가 구원의 조건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보지 않을 것이며 정죄를 받지 않는다. 참으로 모든 정죄로부터 해방된다(롬 8:1).

믿음은 그것이 자라 씨를 맺고 열매를 맺어 추수를 할 때가 이르기 전에 이미 견고한 평화와 위로를 가져다 주며 사람을 구원한다. 루더포드는 성경에 맹인에 대한 구원선포(눅 18:42), 발을 씻긴 여인에 대한 믿음(눅 7:50), 중풍병자의 믿음(마 9:2)을 예로 들며 만일 언제고 다시 넘어질 그들에게 끝까지 견디는 믿음을 조건으로 하여 사면이 선언된다면 참 위로와 안심하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영원한 위로(살후 2:16), 강력한 위로(히 6:18), 모든 위로(고후 1:4), 살아 있는 소망(벧전1:4; 히 6:18~19)이다.

만일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면 처음 믿기 시작한 해의 마지막 날에 죽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의로움과 구원에 대한 법적 권리와 소유권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지불된 값과 구속에 있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더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1.2.4. 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의 최후 심판의 대상·위로·구원

1) 최후 심판의 대상: 이 날에 배교한 천사들뿐만 아니라, 지상 위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고전 6:3, 유 1:6).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으로 나와서 생각과 말과 행실에 대하여 보고하고, 육신에 거하면서 행한대로 선악 간에 판단받을 것이다(고후 5:10; 전 12:14; 마 12:36; 롬 14:10-12;마 25:32-46). 최후 심판의 목적은 택자들의 영원한 구원과 불순종하는 자들의 영원한 저주를 통하여 그분의 정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롬 9:22-23). 이 날은 의인이 얻게 될 영광스러운 부활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드러나고 동시에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것인지 만천하에 드러나는 날이 될 것이다. 따라서 최후 심판은 죄를 단념하도록 하고 경건한 자들이 그 역경 중에 보다 큰 위안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언제나 경성하고 깨어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2) 최후 심판의 위로: 피영민은 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 32장 1항을 해설하며 “의인과 악인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와서 생각과 말과 행실을 보고하고 육신에 거할 때에 행한 대로 선악 간에 판단을 받을 것이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최후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상급은 다를지언정 신자들의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히 씻음받고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옮겨졌고 바다 같은 곳에 던져졌고 허물이 도말되었고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 같이 사라지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신자들의 죄를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해설한다. 칭의를 통해 얻은 죄사함과 구원이 최후 심판 자리에서도 역시 성도들을 의롭게 하는 근거다.

3)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 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 제 11장 1항은 성도들의 칭의에 대해 “그들을 의롭다고 간주하시고 용납하심으로써(고전 1:30, 31; 롬 5:17-19) 의롭다 칭하신다. 이것은 그들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거나 그들에 의해 무슨 일이 행해져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칭하시는 것이다”고 진술한다. 특히 신앙 자체나 믿음의 행동이나 설령 그것이 복음적 순종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의로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빌 3:8,9; 엡 2:8-10) 모든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이르는 수동적 순종을 그들의 전적이고 유일한 의로 전가함으로써 그들을 의롭다 칭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칼뱅, 윌리엄퍼킨스, 윌리엄에임스, 사무엘루더포드, 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에 이르기까지 최후 심판에 대한 개념과 그로부터 어떻게 성도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봤다(도표 참고).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칭의를 통해 얻은 구원이 심판대 앞에서도 유효하다고 봤다. 칭의를 성도들이 생명의 부활로 갈 수 있는 근거로 본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한사람의 순종으로 얻은 의가 성도들에게 전가됐고, 성도들의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됐다는 이중적 전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도들의 죄는 그리스도가 대신 형벌을 받아 주심으로 더 이상 대가를 치를 이유가 없어졌다.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의를 힘잆어 의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게 기본적인 개혁주의적 견해다. 물론 복음적 순종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개혁자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이 순종조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구원얻을 수 있는 공로로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개혁자들은 동일하다.

이제 한국교회가 문제시하는 단체·인물들의 최후심판에서의 구원 개념은 이들과 어떤 차이를 보일지 살펴봐야 할 때다.

2. 변승우·피터럭크만·엘렌지화잇 등 논란이 되는 인물이 보는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 이해

2.1. 변승우의 구원 이해:

변승우는 요한계시록 강해를 통해 최후 심판 이후에 새하늘 새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언급한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건 당연한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중 오직 이기는 자들만 들어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기는 자들이 누구일까? 변승우는 계 21:8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기는 자들과 반대되는 자들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사람들은 “믿는 자라도 이런 일들 중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이기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처럼 살지 말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변승우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그에게서 구별된 삶은 계 21:8의 항목에 하나라도 행하면 이기는 자가 아니고 이기는 자가 아닌 자들은 새하늘과 새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도리어 불못에 던져진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행위 구원론에 매우 근접해 있다. 이는 선행을 매우 강조한 개혁주의자들이 복음적 순종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신자의 의무이지 최후 심판에 구원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여기지 않았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변승우에게 있어서 최후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행위다. 물론 그는 정통교회 목회자와 신학자들(권영경, 이한수 등이다)의 글을 근거로 행위 구원과 행위 심판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행위 구원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주장이다. 이는 명백한 이단이라고 변승우조차 비판한다. 반면 행위 심판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바른 것이라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 구절에서(롬 2:6-11절) 바울은 매우 근본적인 신학적 원리를 개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 심판의 원리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최후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심판하십니다.” 이후 변승우는 존스토트, 로이드존스, 조나단에드워즈, 홍인규 등의 글을 제시하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 후 마지막 심판은 행위에 근거한다고 변증한다.

도대체 어떤 행위일까? 계 21:8에 이어 ‘은밀한 죄’가 포함된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은 자는 신·불신을 막론하고 지옥에 던지는 심판이다.

“(바울)그가 전한 복음에는 마지막 심판 때 은밀한 것을 심판하는 행위 심판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은밀한 죄를 숨기고 회개치 않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 때 멸망받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변승우의 말에 따르면 불신자보다 신자에 대한 최후 심판은 더욱 엄중하게 받아들여진다. 즉 불신자는 믿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고 영벌에 처해진다. 그걸로 끝이다. 그런데 신자에게는 두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믿음은 필요조건 1이다. 그렇다면 행하라. 행위는 필요조건 2가 된다. 은밀한 죄나 계 21:8에 해당하는 죄가 하나라도 있는가? 그렇다면 불신자와 동일한 영벌에 처해진다는 게 변승우 진술의 요약이다. 그는 행위 심판에 대해서 말하지만 최종적으로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공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가 말하는 행위 심판은 행위 구원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2.2. 피터 럭크만(Peter S. Ruckman)의 구원 이해:

럭크만은 최후 심판, 소위 ‘백보좌 심판’이 등장하는 계 20:1~5절을 주해하며 “환란 때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구약의 십계명을 더한 것이며, 천년 기간에는 산상수훈의 규칙과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구원받는다. 이 부분이 올바로 지켜지지 않는다면(이 구분을 거부할 사람들이 수천명일 것이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대면할 것이다), 여러분이 그 구절들을 자신의 신학에 맞도록 고치기 위해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문을 보기 시작한 때문이리라. 이것이 1909년부터 성령의 향상된 계시가 현재까지 없는 이유이다.” 그는 믿음을 통한 은혜는 교회 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마지막 때, 최후 심판에서는 믿음+십계명+산상수훈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2.3. 엘렌지 화잇(Ellen Gould White, 1827-1915)의 구원 이해:

화잇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안식교)의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녀는 시한부종말론자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 1782-1849)의 1844년 재림 예언이 불발로 끝난 후 실망하고 나온 사람들을 규합해 1863년 안식교를 설립했다. 안식교의 설립자 엘렌지 화잇의 심판론은 ‘조사심판’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안식교가 주장하는 조사심판이란 예수님이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1844년부터 지상의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면서 영생(eternal life)에 합격할 수 있는가를 조사하여 심판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을 완성하신 것이 아니라 시작이며 구원의 완성은 조사심판에서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엘렌 화이트도 그 조사심판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강조하였다. 엘렌 화이트: "모두는 그들의 대제사장(그리스도)의 (하늘 속죄소) 직분과 (조사심판) 사역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필수적 신앙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며, 또는 하나님이 부여하시려는(영생의) 신분(position)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 (괄호 안은 역자 주)(Ellen G. White, The Great Controversy, Pacific Press, 1950, pp.488-489)”

이 주장에 따르면 안식교의 엘렌지 화잇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에 진입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사건이지 실제로 영원히 구원을 주는 절대 근거가 아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조사심판이란 걸 통과해야 하는데 거기서의 조건은 하나님의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문제 단체나 논란의 인물들은 최후 심판에 있어서 동일하게 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거나 언급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Ⅲ. 결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구원의 최종 하이라이트는 최후 심판이라 할 수 있다. 일반인은 물론 성도들도 최후 심판이라는 단어에 맞닥뜨리면 위축되고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이를 틈타 한국교회에는 끊임없이 최후 심판, 대환란 등을 주제로 성도들의 신앙을 뒤흔드는 세력이 나타났다. 1992년 시한부 종말론을 대표로 1999년에 Y2K 지구 종말론, 2012년 마야달력을 기초로 세상이 끝난다는 종말론자, 2014년 한국전쟁예언과 베리칩=짐승의 표 등 종말론자들은 끊임없이 한국교회 언저리에 머물렀다.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위기 속에서 이런 종말론자들의 준동은 계속된다. 이들은 혹세무민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성도들의 건전한 구원관을 흔들어 놓기 일쑤다. 이러한 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과연 최후 심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 그리고 한국교회 언저리에서 활동하는 문제와 논란의 인물들은 그에 반해 어떤 입장인지를 살펴 보았다.

종파를 초월해 장로교인이나 침례교인이나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자들은 칭의로 얻은 바른 믿음으로 구원이 되며 그것은 처음 믿을 때나 세상 종말이 와서 최후 심판을 받으나 그리스도의 공로가 구원의 참된 기초임을 강조해서 가르쳤다. 반면 문제가 되는 인사들은 인간의 행위에 최종 구원이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이었다. 그 행위에는 하나님의 율법 중 십계명, 산상수훈, 복음적 순종이 포함된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런 율법은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로 이해했지만 그것이 구원을 위한 공로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때로 문제·논란의 인물들은 들어감(getting in)의 단계에서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머무름(staying in)의 단계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에 만일 선한 행위가 없다면 그 사람은 들어감(getting in)의 상태가 취소된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김경식은 그의 논문에서 들어감만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 구원에 도달함도 인간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근거가 된다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롬 5:9-10)고 말한다. 신약성경의 본문들은 구원의 초기 단계에 들어간 사람은 최종 구원에도 확실하게 도달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최후 심판의 구원과 관련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죄는 최후 심판 때 그리스도로 인해 감춰지고 가려진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우리의 믿음의 시작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완성과 끝으로서 신앙의 모든 과정에 유효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출발하기 위해서만 믿음이 필요한게 아니라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믿음을 가진 다음 내 행위로 채워야 구원받는다면 이는 개혁주의자들이 비판하고 거부한 행위구원과 다를 바가 없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의는 자기 의나 선행이나 복음적 순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통해 전가 받은 의로움이다. 우리의 죄는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의로움으로 우리는 최후 심판을 맞이하게 된다. “신자는 그리스도가 그들을 대신하여 율법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율법의 소리에 의해서 무죄가 선포될 수도 있지만, 그가 완성한 동일한 율법에 의해서 불신자는 정죄된다. 사도들이 설교한대로 율법보다는 복음의 소리가 (최후 심판의) 규범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공로를 쌓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 성도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일 뿐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자 중보자이시며 중재자이시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거기서 심판 권세를 위임 받아 모든 자들을 심판하신다. 그는 택함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심판자이시지만 성도들에게는 한량없이 자비하신 중재자, 중보자, 변호자이시다. 그가 우리 죄를 위해 변호하시는 이상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분의 백성은 최후 심판에서 그리스도의 변호를 받으며 넉넉하게, 최후 심판을 통과하며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확신을 가진 자마다 우리 구원을 위해 태초부터 활동해오신 성부·성자·성령께 한없는 영광과 찬양을 어찌 돌리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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