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9강 해를 입은 여자, 붉은 용, 짐승, 666(12-13장)

2021-06-30     정윤석 기자

(가장 하단에 피피티 다운로드 링크가 있습니다: 유료회원 전용)
성경 66권의 진정한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BC1400년부터 AD90년경까지 약 1500년간 40여 명의 직업도, 연령도 서로 다른 저자가 기록했음에도 통일성이 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을 서로 다른 메시지로 읽으면 안 된다.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게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 그리고 성령께서 직접 그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말씀해 주신다. 여기에 삼위 일체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구원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그런 통일성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됨과 그분의 백성들의 끝없는 전투와 최종적 승리를 마치 거대한 전쟁처럼 박진감있게 담았다. 만일 요한계시록이 흥미진진하지 않다면 그것은 오로지 설교자들과 필자의 미력함에서 오는 문제이다. 계 12장~13장은 특별히 용과 두 짐승에 대해 박진감 있게 서술한다.

계 12장 해를 입은 여자, 철장을 잡은 아이, 천이백육십일, 큰 독수리의 날개

1980~90년대에 초등학교~고등학교를 다녔다면 체육 시간에 줄을 설 때 가장 중요한 게 기준점이란 걸 안다. 기준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온통 줄이 비뚤비뚤해진다. 손을 높이 들고 ‘기준’이라고 외쳤다. 그 아이를 기준으로 모이고 흩어졌다. 기준점이 제대로 돼야 모이고 흩어지면서도 혼란 속에 질서가 생기는 법이다. 요한계시록도 그 기준점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끝없는 방황을 하게 마련이다. 요한계시록의 기준은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영원토록 찬양 받으실 창조주 하나님이다(4:11).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다(1:5). 하나님의 공동체·백성은 그 어떤 권세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결국은 최종적 승리를 얻을 것이다(계 7:14-17; 21:3-4). 이 구원의 역사를 큰 틀에서 대서사시처럼 장엄하게 묵시문학적 상징으로 기록한 요한계시록의 절대적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백날 천날 재림을 강조해도 무의미하다. 자기 아버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아버지의 오심을 기다린다면 그게 제대로 된 기다림인가?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재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왕되심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완벽한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분들에 대한 기준을 바로 잡고 있어야 재림이 의미가 있다. 이 기준이 엉클어진 상태에서는 재림을 백날 천날 기다려봐야 아무 소용 없다.

리차드 보컴 ‘요한계시록신학’ 134. 김추성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286-308, 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 521-565 참고

1. 기준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 가더라”(5절). 요한계시록 12장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시비’거는 붉은 용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철장: 철장(iron scepter)- 지팡이와 구분하기 위해 셉터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셉터가 철로 돼 있다. 이 철장은 변하지 않는 왕권을 상징한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아이는 이미 구약에 예언한 분이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7~9). 이미 여호와께서 아들에게 열방을 유업으로, 소유를 땅끝까지 줄 것을 약속하셨으며 그에게 철장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 권세는 무엇일까? 사람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권세가 아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18:18~20). 아들이 가진 권세는 제자들이 모든 족속을 제자 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없다. 계 2장의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권세를 신앙의 승리자들이 받게 된다는 것이지 내 맘대로 독재적 권세를 휘두를 권한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 그의 철장 권세는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갔기 때문에 영원토록 보존된다. 보좌는 세상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고 탈취할 수 없는 장소다.

2) 그 권세는 그분이 수여하지 않는 그 어떤 자에게도 이양되지 않으며 이 권세는 스스로 취할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권세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서 승천을 단 한절에서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에 대한 다른 해석들

“비록 여러분은 이 ‘사내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영적으로 가르치지만 이 ‘사내 아이’는 후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진 한 사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님을 가리킨다”(피터 럭크만, 『계시록의 신비를 벗긴 요한계시록 주석』, 김형덕 역. (서울: 말씀보존학회, 1993), 259).

럭크만은 계 12장의 사건을 최종적 재림 직전의 대환란의 때로 해석하는 단점을 보인다. 그렇다면 1:3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계시록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성경으로 주어진 메시지이지 오늘날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진 메시지가 아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건 변질이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는 예수님께서 ‘계시록 2, 3장에 약속한 이긴 자이다”(이만희. 254).

이만희는 이 내용에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예수님과 그것을 수여 받을 존재를 혼합시켜 버린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철장 권세를 주신다고 한 것이지 스스로 철장을 잡고 만국을 다스리는 게 아니다. 철저히 이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권세이다. 우리는 그에게 속해야 받을 수 있다. 끝까지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따라야만 받을 수 있는 권세이다. 그런데 언제 이만희 교주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바가 있는가?

이제 여자에 대해 알아보자.

2.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다(1절).

가. 해·달·별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해달별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성경 장절은 대표적으로 창 37:9절이 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여기서 해와 달과 별은 이스라엘의 족장 야곱과 아내와 열 두 형제(요셉 포함)를 의미한다.

나. 해와 달과 별은 영화로움과 영광됨을 나타낸다.

해를 옷 입은 여자는 계 10장 1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었다는 표현과 영화로움과 영광됨에 있어서 동일하다. 발 아래 달이 있다는 것은 여자의 권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필립휴즈. 요한계시록 강해. 서울:여수룬. 1994. 198). 열두별의 관에서 열 둘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한다. 구약 교회는 열두 지파가 기본이고, 신약 교회는 열 두 사도를 기본으로 하였다(박윤선. 232).

3.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2절).

가. 1절이 구속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여자’로 표현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공동체의 영화로움을 보여준다면 2절은 구속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겪는 고난과 고통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메시아 예수가 오시기 전 이스라엘 공동체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비롯한 고대의 거대 왕조의 침략을 받고 처절한 고난을 받았다.

4. 한 큰 붉은 용, 머리가 일곱, 뿔이 열이라.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다(12:3).

가. 붉은 용은 곧 사탄을 의미한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12:9). 용은 동양에서 매우 신령한 동물로 취급 받는다.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顔)이라고 했을 정도이니까. 그러나 서양 고대신화 속에서 용은 싸워서 대항해야 할 세력으로 나타난다. 성경에서도 용은 사탄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인다.

나. 머리가 일곱에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다. 여자가 열두 별의 관을 쓰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다른 숫자도 아닌 일곱 왕관을 쓰고 있다. 만일 천사가 쓰고 있었다면 매우 거룩한 숫자로 여김 받을 숫자다. 무엇을 뜻하는가. 끝까지 어떤 요소이든 사탄조차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백성을 혼란케 하기 위해 모방하고 흉내낸다는 것이다.

1) 계시록에서 그 어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도 ‘다수의 머리’를 갖고 있지 않다.

2) 머리가 여럿이라는 것은 생명의 질김, 그러나 그 기괴한 모습 때문에 악한 세력의 대표격으로 여겨졌다.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가 대표적이다. 영화로도 종종 나오는데 이는 고대 신화속에서 괴물의 힘과 권세와 위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 뿔이 열이라.

뿔은 힘을 상징한다. 뿔이 열 개라는 것은 강한 힘을 의미한다.

시 75:10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시 89:17 주는 저희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5.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12:4).

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장 1/3이 타락하는 장면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그렌트 오스본). 그러나 여기서 ‘끌어다가’(쉬레이 σύρει)와 ‘던지더라’(에바렌 ἔβαλεν)는 용어는 사탄이 자신이 대적하는 상대를 내치고 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보는 게 적절해 보인다.

나. 용의 끔찍한 모습을 보여준다. 연상되는 구절이 있을까? 해산하는 아이를 삼키고자 하는 용의 모습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시 ‘왕’의 탄생을 막으려는 절대권력자 헤롯을 떠올린다(마 2:13). 이외에도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굴복시키고자 끊임없이 시도한다. 마 4:1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은 즉시 광야로 가서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6절)

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여자는 구약 계시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를 의미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는 새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새이스라엘이자 참이스라엘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아무리 이스라엘 사람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이방인이다. 새이스라엘의 기준은 혈통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전환의 기준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여자는 이제 새이스라엘 공동체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옛 이스라엘, 혈통적 이스라엘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 이스라엘이 아니다.

나. 양육은 아이가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여자가 받는다. 마치 산후 조리하듯. 도망가야 할 정도로 위태롭지만 하나님이 외면하신 게 아니다. "예비하신 곳이 있었다."(6).

다. 광야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공간인 동시에 연단받고 훈련 받는 장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장소였다. 이처럼 광야는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의 새로운 공동체가 겪어야 할 연단과 시험의 장소이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공존하는 장소다. 광야에 대한 노래를 한번 들어보자.

라. 천이백 육십일

8강 일천이백육십일 참고.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 12:7-9).

가. 10장에서 우리는 힘센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봤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은 힘센 다른 천사가 전하여 준 든든한 뒷배경이 있는 말씀이다. 여자는 광야로 도망하고 사탄은 그를 박해하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는 이미 우리를 양육하기 위해 장소를 예비해 놨다(12:6).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천사들의 대장인 미가엘이 자신의 사자들과 더불어 용과 그의 사자들을 이기고 승리했다.

나. 사탄이 하늘에서 했던 역할은 ‘밤낮으로 우리를 참소’하는 일이었다(10). 참소란 ‘무고’하는 것이다(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이를 밤낮 우리 형제들을 ‘고소’하던 자라고 번역했다. accuser(고소인), 고소인데 죄있는 사람에 대한 고소가 아니라 무고라는 의미이다.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게 없는데,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 지불이 됐는데 계속해서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마음 가운데 ‘네가 진짜 하나님의 자녀냐!’라며 참소하고 고소하며 우리의 자격 없음에 대해 지적질하는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났다.

8.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가. 하늘의 영적 전쟁에서 미가엘은 용과 그의 사자들을 이긴다. 미가엘의 승리와 형제들의 승리를 동일시한다. 우리 형제들도 용과 그의 사자들을 이겼는데 그 비결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과 여기에 생명을 바치는 정신으로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붙드는 것으로 이길 수 있다.

나. 우리는 순간순간 사탄의 공격에 직면한다. 우리들의 내적인 목소리는 무엇에 귀를 기울이나. 어떤 때는 사탄의 속삭임이 들려올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겨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그것을 증거하고 내세우며 그것을 끝까지 붙드는 것으로 이겨가야 한다.

여자는 지속적으로 용의 박해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하나님은 모두 예비해 놓으셨다.

9.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계 12:14).

가. 여자는 붉은 용의 박해의 대상이지만 두 날개를 받아 광야의 예비한 곳으로 날아가서 보호 받는다. 아쉬운 대로 호빗의 영상을 보며 상상해 보자. 큰 독수리에 업혀 가는데 계시록에서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서 간다고 말씀한다. 여자, 곧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날개가 달려 큰 붉은 용, 옛 뱀 마귀 사탄의 낯을 피해 간다는 것이다.

나. 뱀의 천적이 무엇인가? 용이 그냥 용이 아니고 큰 붉은 용이라고 하듯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큰 독수리를 내세우고 다른 곳도 아닌 ‘광야 자기 곳’에서 뱀의 낯을 피해 양육 받도록 하신다.

10.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계 12:15-16).

가. 뱀이 물을 강 같이 토해서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한다. 때로 그는 불을 하늘에서도 내리는 존재다(13장 13절). 여기서는 물을 사용한다. 물과 불을 부리는 대단한 존재다. 그런데 이번엔 땅이 여자를 돕는다(16).

12장에는 여자로 표현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향해 지속적으로 밤낮 시비거는 존재들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6), 큰 독수리가 돕는다(14), 큰 용이 내어 쫓긴 그 자리인 땅마저도 도와 준다(6). 분노한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다. 모래위에 서서 싸우려는 예수의 증거를 가진, 반석 위에 세워진 자들과 싸우려고 한다(마 7장 24). 싸움이 과연 되겠는가? 붉은 용, 짐승으로 일컬어지는 존재와 싸우려면 그 어떤 곳보다 우리는 예수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야 한다.

계 13장 용의 권세를 받은 두 짐승

13이란 숫자는 서양에서 '4'처럼 불길한 숫자로 일컬어진다. 13장에는 짐승의 실체를 폭로한다.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1-2절).

가. 외관이 무시무시한 놈이 바다에서 나온다. 바다는 고대로부터 두려움의 장소였다. 계시록은 그 고대, 우리나라 삼국시대보다도 더 이전, 삼한시대쯤에 쓴 문서다. 그 당시 ‘바다’는 결코 거룩하고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두 놈이 바다와 땅으로부터 나온다. 첫 짐승은 바다(1), 둘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온다(11).

나. 우선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여러가지 외관도 외관이지만 요한은 그 무시무시한 외관에 가장 중요한 본질을 하나 말해준다. 신성모독이다(1). 그리고 그것은 약한 것이 아니라 '권세'라고 말할 만큼 강력하다(2). 모습은 표범이고 발은 곰이고 입은 사자다. 장차 이 존재가 싸울 대상은 가장 연약한 상징인 어린양이다.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말하는 듯 하지 않은가? 어디 붙을래, 어디에 줄 설래? 라고 하면 어디에 줄 설 것인가? 승리를 위해,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당연히 일곱 머리 열 뿔과 표범, 곰, 사자의 집합체인 그 존재에 붙으려고 할 것이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2.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3-4절)

가. 머리가 일곱인 메두사처럼 이 짐승은 잘 죽지도 않고 질긴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다. 죽다가 살아나는 것처럼 11:11 두 증인,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방하는 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정작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경배하지 않으면서 죽다 살아난 것처럼 보이는 짐승에 대해서는 온 땅이 따르고 경배한다.

나. 그들의 신성모독은 계속된다.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짐승을 가장 강한 용사로 보고 그가 제일 쎄다는 착각에 빠져서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까지 한다.

이들의 모습은 데자뷰 되는 장면이 있다. 어디일까? 계 20:2~3절이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용이 무저갱에 결박돼 활동을 못한다. 그런데 천년이 지나서 놓이는데도 그를 따르는 수가 바다 모래 같다(계 20:7~8). 하나님께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계 1:4)로 자주 묘사되고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1:18)로 표현되는 반면 사탄은 죽었다 나타나고 활동이 중단됐다가 다시 시작되는 단절됐다가 매우 끈기있게 이어지는 존재처럼 묘사된다. 그럼에도 그를 따르는 팬들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만큼이나 많다. 계 12:17 용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다고 한 장면이 연상되는 순간이다. 모래는 지지기반이 약함을, 그러나 그 숫자가 적지 않음을 표현하는 듯하다.

3.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13:5-8절).

가. 과장,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42개월(3년반)을 일할 권세를 받는다. 그가 하는 일에 주목하는 게 짐승의 외관보다 중요하다. 껍데기는 늘 바뀌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게 짐승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까 언급했듯 신성모독을 한다(1). 권세가 있다(2). 온땅이 놀랍게 여겨 따른다(3).

나. 11장에서 두증인의 전철을 짐승이 따라간다. 두 증인도 죽었다가 살아난다(11:11). 사람들은 그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 잡힌다. 살아 남은 사람 중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11:13).

다. 짐승도 정확히 따라한다(13:3). 세상은 두 증인이 아니라 짐승을 보고 놀라며 따라간다. 그런데 하는 짓이 다르다.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한다(5). 하나님을 비방한다(6). 심지어 그 짐승은 성도들과도 싸워 이긴다(7). 물론 17장으로 가면, 최후 승리는 어린양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돌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이 '어린양'을 이긴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런 표현은 전혀 없다. 성도들과 싸워서 이길 수는 있어도 성도들이 따르는 어린양을 결단코 짐승이 이길 수는 없다(7).

라. 이 땅에 사는 자들은 그 짐승을 따른다(8). 반면 하늘에 사는 자들은 비방을 받는다(6). 하늘에 사는 자들과 땅에 사는 자들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하늘에 사는 자들이 짐승이 비방하는데 어떻게 비방을 받는다는 건가? 성경에서 때로 하늘은 실제 공중의 4차원의 공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거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이처럼 땅에 있는 자들도 예수와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단순히 땅에 사는 것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고 따르고 경배하는 자들=하늘에 있는 자들이고, 아무리 높은 데 살아도 예수를 경배하지 않고 우상을 따르고 경배하는 자들은 짐승을 따르는 자들이다(8).

4.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13:11절).

1절~2절에 등장하는 짐승이 무시무시한 외관이라면 11절의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어린양 같이 두뿔이 있다.' 때로 짐승은 어린양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말로서 구분이 가능하다. 용처럼 말한다(11). 용의 본질은 어린양 비방과 우상숭배, 짐승 경배다. 따라서 또다른 짐승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또한 본질적으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고 큰 이적을 행하는데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까지 한다(13).

5.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13-14).

11장 5절에 두 증인이 불로 원수를 삼키는 것처럼 두 증인과 유사한 흉내까지 낸다. 어린양과 유사했던 짐승이 두 증인과 유사한 이적까지 행한다. 그럼에도 구분하는 게 어렵지 않은가? 그렇다. 어렵지 않다. 결국 우상/짐승 경배를 하느냐, 아니면 어린양을 믿고 따르고 경배하느냐가 본질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설교를 듣고,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의 기도를 받았다 치자. 그런데 그 사람을 의존하게 되고, 그 사람이 있어야만 내 문제가 해결될 거 같은 의존성이 생긴다면 그건 ‘용처럼 말하는 자’ 일 수 있다. 말씀을 듣고 기도를 받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참 어린양의 말씀이다.

6. 이제 논란이 되는 666표에 대해 살펴볼 시간이 됐다. 성경에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가. 짐승의 우상이 생기를 받고 말하고 자기를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인다(15). 즉 표를 받은 자는 의식 속에 이상한 칩이 들어가 짐승을 강제로 경배하게 되고 강제적으로 우상숭배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 666은 모든 자, 즉 짐승을 경배하는 모든 자가 받는다(16). 작은 자, 큰 자, 부자, 가난한 자, 자유인, 종들이 모두 해당한다(16).

다.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는다(16) -> 오른손이나 이마는 실제를 의미하기보다 겔 9:6, 출 28:38, 계 17:5; 22:4에서 보다시피 누구의 소유인지를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라.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17). 이 매매가 실제적 매매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매매를 못하게 했던 이들이 결국 계 18:12~13에서는 오히려 슬피 울고 애통하며 전혀 매매를 못하게 되는 역전을 당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매매 품목에 (카이 프쉬카스 안드로폰 καὶ(그리고) ψυχὰς(영혼들) ἀνθρώπων(사람들의)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사람들의 영혼을 의미한다. 매매 품목에 사람들의 영혼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실제 생각하는 매매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다. 즉, 짐승으로 상징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의미한다(17).

바. 그 짐승에게는 수가 있다. 사람의 수다. 그 사람의 수가 666이다(18). 결국 숫자로 표현되는 어떤 사람, 용의 권세를 받아 하나님을 모독하고 우상을 경배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권세자인 사람을 의미하는 게 666이다. 이 짐승의 수를 이기고 승리한 자들이 14장에 십사만사천이라는 장엄한 숫자로 등장한다.

여러 사람이 줄을 서는 상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준’이라고 서두에 말했다. 기준을 제대로 잡으면 혼란스러운 거 같으면서도 질서를 찾아가게 된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우리 앞선 세대는 기준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시한부 종말론에 10만명 이상이 빠져서 혼란을 겪었고 당시 시한부 종말을 가능하게 했던 계시록 해석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결과 팬데믹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종말론에 휘둘리는 상황이 반복된다.

어디선가 전쟁이 난다고 예언하면 갑작스레 가장 호들갑을 떠는 것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요, 어디서 백신을 맞는다 하면 그것도 짐승의 표라는 등 음모론을 퍼뜨리며 사회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이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음모론, 그런 호들갑, 그런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짐승의 세력을 사랑과 평화와 믿음과 신뢰로 이기려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하지만 설령 전쟁이 있다 하더라도, 또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두렵고 공포스런 미래가 펼쳐지더라도 잠잠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겠다고 다짐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배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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