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8강(10-11장) 그리스도의 진정한 팬이어도 좋다

펴놓인 두루마리·두 증인·한때두때반때(천이백육십일, 마흔두달)

2021-06-15     정윤석 기자

(요한계시록 8강 피피티 다운로드 파일은 가장 하단에 있습니다: 유료회원 전용)
팬심이란 말이 있다. 어떤 대상을 지지하고 무슨 상황에서도 팬의 마음으로 편 들어준다는 의미이다. 기독교 책자 중에 카일 아이들먼의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도 있었다. 팬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께 완전히 헌신된 제자가 되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책이다. 그런데 요즘은 팬, 무시하면 안된다.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만년 하위권 팀 롯데자이언츠의 원년 팬이다. 자이언츠 팬이라는 얘기만 들어도 다른 사람과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팬심은 때로 남녀노소, 지역, 학연, 혈연을 뛰어 넘어서 하나로 묶어준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팬만 돼도, 역사는 바뀔 수 있다. 팬심과 팬을 무시하지 말라! BTS같은 아이돌들의 진정한 팬들은 대상에 열광한다. 마음과 시간을 바치고 헌신한다. 스타가 원하는 것을 자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 그가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가 모독 당할 때 자신이 당한 것처럼 슬퍼하고 분노한다. 스타의 원하는 일을 하며, 그가 요구하는 일에 즐겁게 헌신한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팬이 되도 세상은 바뀐다. 팬심 무시하면 안된다.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의 열광적이고 진정한 팬들(물론 긍정적 의미에서다)이 다양한 표현으로 넘실 된다. 표현이 좀 세속적이라 생각한다면 ‘제자’란 말로 바꿔서 생각해도 좋다. 아니면 하나님의 참된 공동체로 생각하고 봐도 좋다. 그 진정한 제자들, 하나님의 참된 공동체, 백성들이 다양한 단어들로 표현되며 등장한다. 그리스도, 하나님 편에 속한 존재들, 하나님의 참된 공동체가 요한계시록에 어떻게 표현됐는지 생각나는 대로 한번 써보자.

일곱 교회, 네 생물, 24장로, 순교자들, 십사만사천, 셀 수 없는 큰 무리, 두 증인, 신부 등등 무수히 많다. 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도 다양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땅에 속한 자들, 이세벨, 니골라당, 짐승, 용, 음녀, 바벨론 등등이다. 이 표현 역시 많이 등장한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통치 아래에서도 끊임없이 반발하며 대적하며 훼방하는 짐승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상대로 대적하는 짐승의 세력이 무시무시해 보이긴 해도 결국 하나님께 패배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들의 백성들을 눈물도 사망도 고통도 없는 새하늘 새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으로, 그것이 속히 이뤄질 사건이라고 말씀하며 계시록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리스도의 편에 선 존재들 중 지난 주에는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살펴봤다. 오늘은 계시록 10장과 11장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속한 자 중 작은 두루마리 책을 받아 먹는 사도요한의 모습과 두 증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12~13장에는 다시 예언해야 할 사명을 띈 사도 요한과 두 증인과 대조적으로 용과 짐승이 등장한다.

우선 8강에서는 10장과 11장을 살펴보겠다. 이를 통해 참된 예언이 무엇인지, 두 증인의 활동을 통해 무엇이 사람들을 감동감화 시키는지 되새기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10장 힘센 다른 천사, 펴놓인 작은 두루마리,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입꿀배쓰.

1. 힘센 다른 천사:

천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라고 보내진 존재다(히 1:14). 그런데 이 천사, 좀 남다르다. 그러면서도 뭔가 친숙하다. 무엇이 남다르고, 무엇이 친숙할까?

1-1. 남다른 점

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됐다. 천사가 구름을 입는다고 한다. 12장에 여자가 한명 나오는데 그도 뭔가를 입었다. ‘해’다. 천사는 그 여성처럼 해는 아니지만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표현한다. 예수께서 구름 타고 오신다고 한 점을 우선 기억속에 저장해 두자.

나. 머리 위에 무지개(계 4:3), 그 얼굴은 해 같고(계 1:16), 그 발은 불기둥 같다(1:14~15). 뭔가 싱크로율이 맞아들어가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눈치 챈 독자들도 있겠지만 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화로움을 상징할 때 동원했던 단어들이다. 이는 힘 센 다른 천사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라는 의미일까? 이런 해석은 문제를 낳는다. 천사=하나님&그리스도라고 하게 되면 신론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힘센 다른 천사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힘입고 그의 뜻을 전달하는, 또는 실현하는 자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이필찬. 451-452. 백금산. 만화요한계시록2. 서울:부흥과개혁사. 2010. 12).

다.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2절)

5장에 두루마리는 일곱인으로 봉해져 요한을 눈물짓게 했다. 10장에선 힘센 다른 천사가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중요한 것은 ‘펴놓인’이라고 했다. 이제 더 이상 요한은 울지 않는다. 왜 울지 않을까?

이미 인봉을 뗐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작은’이라는 수식어가 있다고 두루마리를 계 5장에 나오는 두루마리와 다른 것으로 오인하면 안된다. 이것을 서로 다른 두루마리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크기에 대한 묘사가 있을 뿐 서로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 성경에서 같은 두루마리임에도 때론 ‘작은’을 붙이기도 하고 떼기도 하기 때문이다.

계 5장 두루마리 βιβλίον(비블리온)

계 10:2 작은 두루마리 βιβλαρίδιον(비블라리디온)

계 10:8 두루마리 βιβλίον.

계 10:9 작은 두루마리 βιβλαρίδιον.

계 10:10 작은 두루마리 βιβλαρίδιον

또한 두루마리와 관련해서 등장하는 천사가 힘있는 천사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작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이는 본질적으로는 다른 두루마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라. 오른발은 바다, 왼발은 땅

오른발은 바다, 왼발은 땅을 밟고 있다. 얼마나 광대한 크기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 복음을 담은 작은 두루마리를 힘이 센데다 크기까지 엄청난 천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입은 형상을 하고 서 있다. 이는 복음의 광대함과 위력과 강력함을 동시에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마. 사자의 부르짖음과 일곱 우레의 소리

우레는 하나님의 현현, 또는 하나님의 음성과 목소리, 임재를 상징하는 신적 표현이다. 천사가 철저하고 강력한 그리스도의 대행자임을, 그의 권위를 힘입는 천사임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의 외침은 사자같고, 일곱 우레가 소리를 내어 말하는 거 같다. 일곱은 완전수로 일컬어진다. 일곱영, 일곱교회, 일곱 촛대, 일곱 우레, 모두 일곱이다. 천사의 광대함에 대한 묘사는 그를 심부름꾼으로, 대행자로 사용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광대함의 또다른 표현이다.

1-2. 친숙한 면

가.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천사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계 1:6)라고 한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의 표현(계 1:18)뿐 아니라 사도요한, 네 생물(4:9), 이십사 장로(4:10),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계 5:13)의 하나님 찬양의 표현 속에서 등장했다. 더불어 세세토록은 영원토록으로서, 지금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계 1:4)라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사용됐다. 천사가 누구의 대행자이고 그가 어디에 속한 존재인지를 다시한번 보여준다.

나.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세세토록에 이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표현을 담고 있다. 이 힘센 다른 천사는 거대하고 장대하고 상상을 뛰어넘는 존재이지만 그가 하는 일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찬양과 경배이다. 6절에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이다. 그리고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시다".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으로 봐서 이는 그분에 대한 찬사이자, 그분에 대한 영광이자, 그분에 대한 신뢰다(6).

다.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내가 속히 오리라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 반드시, 그리고 속히 일어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7). 복음에 대한 약속, 복음이 이뤄질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터인데 그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해 주신 대로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이 완성될 것이다." 하고 다짐했습니다."(공동번역 7절).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려고 할 때 하나님의 비밀이 그분의 종들인 예언자들에게 전해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7절).

"But in the days when the seventh angel is about to sound his trumpet, the mystery of God will be accomplished, just as he announced to his servants the prophets."

"the mystery of God"- 토 미스테리온 투 데우 τὸ μυστήριον τοῦ Θεοῦ-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이상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11장에 두 증인이 나온다. 그들은 복음의 증거의 사역을 한다. 12:5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가 등장한다. 12:7 용이 가장 싫어하고 대적하는 것, 즉 여자의 남은 자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의 싸움이 언급된다. 이로 봐선 하나님의 비밀은 용, 짐승이 가장 싫어하고 대적해야 할, 숙명을 걸고 싸워야 할 세세토록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됨, 그것을 증거하고 삶으로 복음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들을 당신의 공동체로 부르신다는 복음으로 보는 게 적절할 듯하다.

더불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 11:15)라고 말씀한다. 모든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그분께서 세세토록 왕노릇하신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이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비밀임을 알 수 있다.

2. 사도요한의 책 받아먹음.

2-1. 펴 놓인 두루마리를 먹은 사도요한.

가. 먹었다는 것은 사도요한의 인생 속으로 그 복음이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대로 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먹는 것으로 힘을 낸다.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것을 은유적으로 적용해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으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마 4:4). 이 말씀을 조금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빵을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어야만 살 것이다.

나.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다. 복음은 내게 너무 유익하나 그것을 전하고 그것을 예언하며 사는 것은 써서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복음을 나만 알고 나만 누리는 것은 참으로 달콤한 일이다. 그러나 복음을 알면 알 수록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게 되고 또 그것을 전하면 갈등이 일어난다. 복음과 말씀은 내 입에서는 달지만 실천을 할 때는 쓴 법이다. 때로 고통을 준다.

2-2. 다시 예언해야 한다(11). 다시 예언하고 사는 삶은 고통스럽고 어려울수도 있다. 사도요한이 ‘이미 한 예언’은 일곱교회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제 ‘다시 예언’은 교회를 넘어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두루마리의 예언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 두루마리에 뭐가 쓰여 있을까?

어렵지 않다. 이미 예언자들에게 전해 주신 내용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 반복돼 온 1:5~6, 5:9~10, 두루마리의 인을 뗄 자격이 있는 분이 어린양이라는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두루마리의 내용이 어린양과 그의 나라의 새 백성, 새 왕국에 대한 이야기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를 방해하고 훼방하는 세력에 대한 엄혹한 심판을 담았다는 의미이다. 다른 이상한 내용을 연상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이다. 두루마리에는 어린양과 그 백성의 공동체의 승리와 용과 짐승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패배가 담겨 있다. 하나님의 비밀은 절대왕권을 가진 당시 시대뿐 아니라 세속 문화 속에서, 기독교가 개독교로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어쩌면 작아보이고 평범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린양이 떼신 두루마리에는 힘센 다른 천사가 관여하는,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장대한 존재가 쥐고 있는 세상 위대한 어떤 것보다 가치있고 힘센 권위가 담겨 있다.

우리는 세상 앞에서 참으로 작은 자이다. 지금 시대에도 그런데, 2천년 전에, 그리스도인 자체가 소수이고 믿으면 죽는 시대에는 오죽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가진 자들은 눈으로 보이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매우 여린 존재들이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본다면 이는 힘센 천사,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존재, 머리에 무지개가 있고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고 오른 발은 바다를, 왼 발은 땅을 밟고 있는 광대한 존재가 관여하는 일이다. 우리 뒤에는 진정한 백이 있다. 그분은 광대한 천사조차 우리는 돕고 섬기라고 보내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뒷배경이다. 뒷배 있는 사람을 우리는 조심하는 문화가 있다. 사대주의라 한다. 어차피 약한 국가로서 사대주의로 살아야 한다면, 큰 힘을 가진 자에게 붙어야 한다면 차라리 우리는 하나님께 붙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자끄 아노 감독의 베어(1992년 국내 개봉)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상을 잠깐 보고 우리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되새기면 좋겠다.

11장. 두 증인과 한때두때반때

1. 성전의 측량(1)

1-1. 지팡이 같은 갈대: '갈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라모스'(κάλαμος)는 물건이나 건물 같은 것을 재는 도구로 '길고 곧은 장대'를 가리킨다(후크마 주석). 갈대, 혹은 장대로도 번역됐다.

1-2.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

측량을 하는 목적에는 보호와 파괴의 두가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미 성전 바깥은 내어주었다고 하셨으니 1절의 대상은 보호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1-3. 측량에서 제외되는 성전 바깥 마당

가. 이방인에게 주었다. 성전바깥마당을 이방인에게 주었다는 것은 요한의 시대에 매우 익숙한 표현일 수 있다. 성전은 이미 로마제국에 함락됐다. 더불어 기원전 168년경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4세가 예루살렘을 정복·약탈한 바 있다. “안티오쿠스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무엄하게도 성전 깊숙이 들어가서 금, 은은 물론이고 값비싼 기물들을 빼앗고 찾아내는 대로 모두 약탈하였다. 많은 사람을 죽인 다음, 오만 불손한 욕설을 남기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마카베우스상 1:20-24). 그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단 사흘만에 8만명을 죽이고 어른, 아이, 여자를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성전 제단에 돼지피를 뿌린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처럼 쑥대밭을 만든다는 이미지가 담겨 있다(기민석. 기민석의 성경속 이야기. 한국일보 2019.1.1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1111315085781 참고).

나.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예루살렘 정복 기간은 6년 3개월 정도다. 마흔 두달이면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역사속에 나타난 기간보다는 짧다. 구약적 개념으로 이를 문자적 해석을 하면 문자적 성전이 성소는 제외하고 나머지만 파괴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역사속에서 그런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완전히 파괴되고 모욕당할 정도로 붕괴됐다. 따라서 거룩한 성과 성전은 문자적 개념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성전으로 불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로 해석하는 게 적절하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보호 받는 영역과 동시에 보호받지 못하고 고난 받는 영역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왜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가? 나의 거룩함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성전도 이 세상에서는 보호받는 곳과 이방인에게 짓밟힘 당하는 곳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충만히 받으며 꽃길을 걷는 거 같지만 때로 알 수 없는 고난에 직면한다. 이 양면성은 우리의 사는 동안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참된 공동체 또한 마찬가지다.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참된 공동체 또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동시에 세상으로부터의 박해를 받는다(백금산. 37-38. 이필찬. 479). 이 기간은 하나님의 참된 공동체적 관점에서는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며 신자 개인에게는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이후부터 그가 종말,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의 전 기간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물론 짓밟는 듯한 고난을 함께 겪게 될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자. 우리의 앞길엔 꽃길만 열리는 게 아니다.

# 마흔 두달=한때두때반때=삼년반=천이백육십일

계시록은 이 기간을 아주 다양한 상황에서 표현한다. 이방인이 짓밟는 기간도 마흔두달(11:2),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11:3).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를 낳은 여자가 양육받는 기간(12:6),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뱀의 낯을 피하는 기간(12:14), 신성모독하는 짐승이 권세를 받는 기간(13:5)이 모두 같은 기간이다. 이를 세대주의자들은 짐승이 권세를 받기 전삼년반, 그리고 권세를 받은 이후를 후삼년반으로 정하고 이를 합해 총 7년동안 전무후무한 대재앙이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성경적 근거는 없다. 동시적으로, 다발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초림부터 재림사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참된 공동체가 겪을 보호와 고난의 기간을 표현한 것이 삼년 반인 것이다(백금산. 21. 이필찬. 479).

2. 두 증인의 권세와 죽음&부활

2-1. 권세를 받은 두 증인(3)

가. 이미 사도 요한은 증거를 하다가 밧모섬에 갇힌 사람이다(계 1:9). 증언, 증거는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고난을 담보한다.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증거하지만 이는 곧 세상에서의 고난을 의미한다.

나. 증인이 한명이 아니라 두명이다. 두 증인인 이유는 증언의 확실성을 의미하는 구약적 배경에서 온 것이다(민 35: 30 무릇 사람을 죽인 자 곧 고살자를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신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예수님도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라며 제자들을 둘씩 보내셨다. 제자들은 실제로 두명씩 갔지만 계시록에서 두 증인은 실제 두명의 인물을 의미하기보다 증언의 확실성을 위해 사용한 상징적 숫자이다.

2-2.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는 기간 1260일(3)

굵은 베옷은 회개를 상징한다. 마 11: 21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두 증인은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예언’의 정의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한다. 보통 사전적 정의가 한국 교인들의 뼛속 깊게 새겨져 있다. ‘미래에 대해 미리 하는 말’, 많은 사람이 그렇게 이해하는데 사전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성경을 통해 그 정의가 맞는지 규명해야 한다. 예언은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창조주·구속주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심판을 선언하고 회복한 후 새이스라엘로 변화하는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것’이다. 이게 선지자 예언의 핵심이다. 예언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모독하고 그의 백성을 훼방하는 자들에게 닥칠 운명과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따르는 주의 백성들에게 다가올 참된 희망을 역설한다. 그것이 진짜 예언이다. 어떤 사람이 앞으로 결혼은 누구와 해야 하고 사업은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신변잡기에 대해 누군가 말한다면 그것은 무속인이 하는 일 아닐지 되짚어 봐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에는 미래의 비밀을 암호풀이하듯 풀어가는 단순한 호기심적 접근이 아니라 순종과 삶의 변화가 요청되는 법이다.

2-3.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4)

가. 두 증인=두 감람나무=두 촛대(계 1:20)라고 설명한다.

촛대는 이미 교회를 상징한다고 했다. 교회가 증거하는 증언의 확실성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두 교회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두 감람나무는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슥 4:14)을 참고로 하나님의 성전을 완공할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대제사장처럼 하나님의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그리스도의 예언 사역을 감당할 사람임을 의미한다.

2-4. 입에서 나오는 불, 비가 오지 못하는 권능, 물이 피로 변하는 등 여러 가지 재앙(5-7)

권세와 권능을 행하지만 기한이 있다. 증언을 마치기까지다(7). 바꿔 말해 증언을 마치기 전에는 권능이 끝나지 않는다. 두 증인은 증언하며 살고 선지자로서 활동한다. 그들의 삶은 엘리야와 모세를 연상케 한다. 왕하 1:10, 12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러 오는 자들에게 불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아합왕 시절 하나님의 심판으로 북이스라엘에 삼년 반의 가뭄이 든다(왕상 17-18장).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이적은 모세를 연상케 한다(출 7:20~22).

2-5. 두 증인의 죽음과 땅에 사는 자들의 기뻐함(10)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전쟁을 일으킨다. 심지어 두 증인을 이기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시점이 있다. ‘증언을 마칠 때’이다. 바꿔 말해서 증언을 마치기 전에는, 사명을 다하기 전에 두 증인은 죽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목숨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증언을 마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지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두 증인이 사명을 다하기 전까지는 생명을 잃지 않으리라. 그러나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하나님의 소관이다. 스데반이 그랬다. 얼마나 더 살기를 바랐을까. 얼마나 호흡이 더 이어지길 바랐을까. 그러나 돌 맞아 죽는다(행 7:59~60). 더불어 내게 큰 권세가 있는 거 같지만 결국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죽음의 날이, 짐승에게 죽기까지 할 수 있으니, 권세와 권능이 있는 동안 진실로 하나님 앞에 낮아지자.

2-6. 소돔과 애굽(11:8)

짐승은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이 누구에게 있든, 상대를 죽이려고 한다. 그런데 그 장소가 영적으로는 소돔이라고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며,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라고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은 유대 땅 골고다인데, 어째서 소돔과 애굽이라고 할까?(11:8). 이는 계시록을 읽는 매우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사실은 골고다인데, 골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악한 상징으로 읽히는 장소로 소돔과 애굽을 선택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장소,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탄압하는 장소, 이는 바벨론도 마찬가지이다. 계시록의 생각은 우리 시대의 관념 속에 있지 않고 그 시대의 관용적 표현과 그 시대의 상징의 세계속에서 날아다닌다. 그래서 그 시대의 배경을 잘 읽고 파악해야 계시록이 읽힌다.

2-7. 구름 타고 승천함(11-12)

두 증인의 권세는 매우 강력하지만 결과적으로 짐승에게 제압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약한 것 같지만 강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 같지만 살아난다. 강력한 힘에 패배하는 것 같지만 두 증인은 결국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리한다는 메시지를 준다. 짐승이 죽이지만 그들은 죽지 않는다. 땅의 백성들이 그들의 패배를 기뻐하지만 그들은 지지 않았다.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상징한다. 엔데 네페레 ἐν(in) τῇ(a) νεφέλῃ(cloud) 구름 속에서 승천한다는 의미이다.

비교) 구름을 타고라는 용어가 계 1:7에도 나온다. 메타(with) 톤(the) 네페론(cloud)(μετὰ τῶν νεφελῶν)이다. 구름과 함께. 살짝 다르지만 구름 안에서, 구름과 함께라는 면에서 두 증인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데칼코마니같다. 두 증인이 얼마나 그리스도에게, 예수에게 충성된 지를 죽음 - 부활 - 승천의 과정으로 보여준다.

2-7. 지진과 죽은 사람 칠천(13).

칠천은 하나님을 반역한 자들에 대한 완벽한 심판의 의미를 가진 숫자이다. cf. 왕상 19:18 바알에게 경배하지 않은 남은 자 칠천명. 열왕기에는 실의에 빠진 엘리야에게 남은 자들이 7천명이라는 말씀으로 위로를 주신다. 그런데 계 11:13에선 반대로 사용한다. 지진으로 7천명이 죽지만 그 나머지는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모습으로 변모한다. 두 증인, 교회의 역할이 결국 이 세상에서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짐승보다 약하지만 강하고, 희생으로 오히려 살아나고, 죽음으로 이기고 부활한다. 사람들은 두 증인의 희생과 순교를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들의 진정한 권세는 땅을 치고 비를 그치게 하고 여러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 것보다 죽음과 순교에 있다. 그렇다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죽음과 순교에 이르러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일반화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보쿰. 128).

2-8.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리로다(11:14).

첫째 화는 다섯째 천사의 나팔(9:1~12), 둘째 화는 여섯째 천사의 나팔(9:12~21) 이제 셋째 화가 일곱 천사의 나팔과 함께 시작됨을 알 수 있다.

2-9.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15).

가. 그리스도의 왕되신다는 선포는 어디로부터 들리나?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는 것이다.

나. 이십사 장로의 경배(16)가 이어진다. 전능하신 분께서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하신다. 이는 계 4장~5장에 이어지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경배와 동일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방들이 분노한다. 그리스도의 왕노릇에 분노하는 세력들이 있다. 이는 그분의 왕권을 전혀 인정치 않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되심에 반항하며 끝까지 거역하고 거부할 뜻을 밝힌다. 많은 죄 중에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가 그분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죄임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스데반 황.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라. 인천:개혁복음주의회. 2017. 378). 이들의 모습은 시편 2편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으시며 진노하고 심판하신다. 반면 종, 선지자, 종,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고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킨다. 심판과 회복의 동시성, 양면성을 우리는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다. 하늘에 있는 성전이 열리며 성전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인다.

이 땅에 두 증인의 권세와 증언의 마지막, 그리고 전쟁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사도요한의 시선은 하늘에서 내리는 계시에서 떠나지 않는다. 끝까지 듣고, 끝까지 보고, 끝까지 경험한다. 그의 귀에는 하늘에 큰 음성이 들린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보좌와 이십자 장로가 엎드려 경배하는 모습이 계 4장 5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생히 들린다. 급기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며 성전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인다. 언약궤가 무엇인가? “언약궤는 이미 BC587년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솔로몬 성전의 파괴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마카비2서 2:7~8에 의하면 예레미야가 언약궤와 분향단을 이스라엘 회복의 날에 대비하여 감추어 놓은 것으로 기록한다.”(이필찬. 511). 사도요한이 하늘의 성전안에 언약궤를 봤다는 것은 종말에 회복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순간임을 보여준다.

라.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19).

기억나는가? 하나님의 임재의 엄중함을. 이 표현은 구약에서 많이 등장한 표현이다. 우레, 번개, 구름, 나팔소리 등등.

출 19:16 “제 삼 일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계 4:5).

삼상 2: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시 77: 18 회리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여기에 큰 우박이 포함된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극대화하는 장치다(이필찬. 512).

그리스도의 진정한 팬이 돼도 좋다. 어감이 나빠도 다시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자신이 좋아하는 팀의 팬이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던가? 자신이 환호하는 스타의 모습에 열광하지 않는 팬이 있던가? 자신과 같은 팬이 있을 때 공감하며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지 않는 팬이 있던가? 두 증인이 뛴다. 짐승은 날뛴다. 두 증인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져도 진 게 아니다.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가 하늘에서 상을 준비하고 계신다. 두 증인을 죽인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준비하고 멸망시킬 것을 벼르신다. 이제 본격적 투쟁이 12장과 13장에서 기다리고 있다.
08강 요한계시록(10 11장).pptx(용량이 커서 다운로드 링크를 올립니다)

참고서적

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

백금산. 만화 요한계시록

리차드 보쿰. 요한계시록 신학.

스데반 황.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라. 인천:개혁복음주의회.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