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가는 요한계시록 7강(7장, 14장)

14만 4천과 셀 수 없는 큰무리

2021-05-31     정윤석 기자

가장 하단에 강의용 피피티 파일을 첨부했습니다(유료회원 전용)
여호와의 날, 그분의 진노가 불같이 일어난다. 세상을 향한 참교육이 시작된다. 그분의 참교육 앞에서 누가 과연 설 수 있을까? 계 6장 17절은 그렇게 반문하는 듯하다.

“그들의 큰 진노의 날이 닥쳐왔다. 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공동번역).

“그들이 진노를 받을 큰 날이 이르렀다. 누가 이것을 버티어 낼 수 있겠느냐?”(새번역).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7장이 이어진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십사만 사천이라는 아주 독특한 숫자가 등장하는 장이다. 십사만사천은 딱 두곳, 계시록 7장과 14장에 등장한다.

데일 카네기는 명연설의 방법을 설명하면서 종종 ‘침묵’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라고 말한다. 연단에서 속사포처럼 말하는 것도 효과가 있지만 때로 강단에서 침묵하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인 맞은 십사만사천이 등장하기 전 후에 그런 현상, 침묵하는 듯한 모습이 잠깐 나타난다. 7장에서 14만 4천이 등장하기 전에는 잠시 바람이 잦아든다. 더불어 8장 나팔 심판이 시작되기 전 일곱째 인을 뗄 때(8:1)는 반시쯤 고요하다. 7장과 8장의 사이에 뭔가 집중해야 하는 사건이 있는 게 틀림없다. 7장은 두 단락으로 나눠서 볼 수 있다. 십사만사천이 나오는 1~8절과 셀수 없는 큰 무리가 나오는 9~17절이다.

1. 14만 4천 인침 받기 전에 일어난 일(1~4절).

1-1. 네 천사: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다.

땅의 네 모퉁이는 땅의 네 끝, 동서남북 천지 사방을 의미한다(1절).

“The end! The end has come upon the four corners of the land”(NIV 겔 4:2).

“After this I saw four angels standing at the four corners of the earth”(NIV 계 7:2).

1-2. 네 천사: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불지 못하게 한다.

십사만사천은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하나씩 서서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는 가운데 인침을 받는다. 십사만사천의 인침은 반드시 성취될 것을 보여주는 환상이다.

1-3. 또 다른 천사: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갖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온다.

1) 6장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진노의 날로 대변되는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진다’(6:12)는 표현을 봤다. 해가 검은 상복 같다는 것은 여호와의 날의 징계와 심판의 엄혹함을 상징한다(욜 2:2, 10). 7장은 그와 반대되는 분위기로 반전된다. 바람도 잦아들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갖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온 또 다른 천사를 만나게 된다.

2) 해 돋는 쪽은 동방, 한국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신천지가 그렇다(양형주. 신천지백신 1권 234). 이만희 교주는 <계시록 완전해설>에서 “해돋는 쪽은 지구의 동쪽을 말함이요···지구 중 아시아, 아시아 중에서도 동방, 동방 중에서도 땅끝, 따 모퉁이 한반도이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돋는 데 동방이 한국이면 동방박사도 한국사람이고, 욥도 동방의 의인이니 한국의 의인이라는 의미가 되니 이상한 해석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1장 16절에 해가 힘있게 돋는 것 같더라며 그의 얼굴의 밝기뿐 아니라 쳐다볼 수조차 없는 영광을 나타낸 표현이란 걸 우리는 경험했다. 그렇다면 천사가 해돋는 쪽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동방이라는 의미 자체보다 그 천사들의 기원됨이 그리스도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 찬란한 영광됨은 인·나팔 심판에 나타난 ‘어둠’(6:12, 8:12)과 대조된다.

3)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도 네 천사들에게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7:3)고 한다. 역시 십사만사천을 인 칠 때 이 세상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땅이나 바다를 해하는 심판은 이마에 인치는 동안 멈춰진다. 이는 십사만사천의 절대적 인침을 의미한다.

4) 이마에 받는 인의 구약적 배경은 겔 9:4~6이다.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이마에 표하는 행위를 베옷을 입은 서기관에게 명한 구절이다.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표가 육안으로 보이는 ‘먹’ 같은 것으로 실제적으로 칠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었다는, 심판으로부터 면제됐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이다. 세상과 땅에 속한 사람들과 구별됐다는 영적인 표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 하나님의 인을 제대로 이해해야 666 짐승의 표(13:17~18)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인이 무엇인가 다시 정리하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선택됐다는, 그래서 여호와의 긍휼하심을 얻어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표식이다(아우내. 189, 이필찬. 361 참고). 더불어 이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14:1)는 말씀을 통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표징임을 우리는 파악하게 된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는 외적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과 정반대의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5) 에스겔서에서 ‘이마에 표’를 하라고 했고 계시록 7:2~4에서 ‘인침’이라고 표현했지만 의미에선 동일하다. 이마에 하나님의 구별된 표를 받는다는 점에서다. 이 표를 받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을 하나님의 사역이다.

2. 7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 십사만 사천.

2-1. 십사만 사천의 인을 치는 위치는 하늘이 아니라 ‘땅’이다.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한 상태에서 인을 치기 때문이다. 즉 땅에 사는 십사만 사천이 인을 맞는다. 계시록에서 땅은 종종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공간이며 심판의 대상이 되는 공간을 상징한다.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계 11: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계 11: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그런데 이런 땅에서도 하나님의 인침 받은 백성이 있다.

2-2. 이스라엘 자손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다(4).

지파는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이다. 영락없는 이스라엘 지파로 보인다. 그런데 구약에 등장한 이스라엘 지파와 뭔가 차이가 있다.

“첫째, 구약의 지파 목록에서 요셉의 이름이 자주 누락되고 그 자리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대신했다(수 14:4). 이것은 요셉이 그의 아들과 함께 열거된 유일한 경우다.

둘째, 이것은 성경의 지파 목록들 중에서 유다의 이름이 맨 먼저 나온 유일한 경우다. 대부분의 경우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이 맨 먼저 나온다.

셋째, 단 지파는 완전히 누락되었다. ···

넷째, 각 지파에서 정확히 같은 숫자인 12,000명이 선택된 것은 전례가 없다. ···그러나 이 네가지 특징들은 많은 해석자들로 하여금 그 목록은 문자적인 것이 아니며, 야곱의 육신적인 후손들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캔들 이슬리. Main Idea로 푸는 요한계시록. 서울: 도서출판 디모데. 2005. 173).

그러나 이 말씀을 근거로 십사만사천은 7년 대환란 후 그리스도를 믿는 선택받은 유대인들의 실제 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누가 그런 주장을 할까? 우선 시한부 종말론으로 혹세무민했던 사이비 이장림(이답게로 개명)을 들 수 있다. 

이장림: “144,000명은 ···그들은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서 선택된 144,000명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해석할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라고 하였으니 문자 그대로 읽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이답게. 요한계시록강해. 서울:새하늘교회. 1999. 180)

“144,000명은 구원받은 성도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시대에 구원받은 유대인들이다.”(이답게. 299).

변승우: “각 지파에 인 맞은 십사만사천명은 문자 그대로 유대인으로 보는 것 외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변승우. 350).

“계 7장에 나오는 인은 구원의 인이나 하나님의 종들에게 치는 인이 아니라 신실한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치는 보호를 위한 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이 신실한 유대인들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변승우. 389).

신천지: “십사만사천을 많은 목자들은 상징 수라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본문에 기록한 대로 각 지파 일만 이천씩 모두 열두 지파를 합한 ‘실제수’지 상징수가 아니다.”(보혜사·이만희, 천국비밀요한계시록의 실상, 도서출판 신천지, 2005년 160페이지).

JMS: "십사만 사천은 수리적 차원을 넘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당세의 말씀을 믿고 따른 자, 메시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정해진 숫자가 아니다.“(김주원. 115; 세계청년대학생MS연맹, ‘초급편’ 223-224 재인용). 여기서 메시아는 JMS를 의미한다.

십사만사천의 참 의미는 계 14장에 가서야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다.

3. 14장에 나타난 십사만사천

계 7장이 지파와 계수만 표현하며 십사만사천을 표현했다면 14:1~5절에는 특징이 섬세하게 서술된다. 그 특징을 살피면 십사만사천이 무엇일지, 누구일지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3-1. 어린양이 서 있는 곳에 함께 선다(1).

3-2.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1).

3-3.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른다(3)

3-4.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다(3).

“땅에서 구원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 밖에는, 아무도 그 노래를 배울 수 없었습니다”(새번역).

3-5.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다(4).

3-6.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4).

3-7.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다(4).

3-8.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5).

7장과 14장의 십사만 사천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7장에는 숫자를 계수하는 과정이, 14장에는 그들이 어떤 존재들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십사만사천을 문자대로 보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남자들 외에 여자들은 십사만사천들에 들 수 없다. 그리고 반드시 한 지파당 12,000명을 넘어서는 안된다. 총 수 십사만사천을 넘어서도 안된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혈연적 지파는 이미 해체된지 2천년이 넘었다. “현대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바벨론 유수 때 실질적으로 10개의 지파들이 사라졌다(B.C6세기). 오직 ‘유대인들(유다의 후손)’과 레위 혈통의 제사장들만 남았다. 우리가 아는 한 요한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10개의 ‘잃어버린 지파들’ 가운데 12,000명이 동시에 살아 있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켄들 이슬리. 174).

그렇다면 이들은 영적인 이스라엘을 의미하는가? 답은 그렇다이다. 갈라디아서에서도 우리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여러분은 사라의 자녀인가? 성경은 그렇다고 말한다. 

성경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말씀한다(갈 2:7). 아브라함의 자손이 뭔가? 참된 이스라엘이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4).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이스라엘로 불렀고 베드로 사도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참된 나라 공동체로 보았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7:4은 ‘우리 하나님의 종들(3절)’인 그리스도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로 부르는 것과 개념적으로 일치한다. ···여기서 이스라엘 지파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출애굽기에 나오는 열두 지파의 경험과 여기에 나오는 영적인 지파들 사이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켄들 이슬리. 174). 출애굽시 이스라엘 12지파도 애굽의 재앙에서 보호를 받고 탈출할 수 있었듯이 영적 이스라엘도 동일하게 재앙과 심판을 벗어나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다는 의미로서 ‘이스라엘 12지파’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유로 십사만사천이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들의 충만한 숫자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천도, 수만도 아닌 하필이면 십사만사천이라고 했을까?

4. 십사만사천의 계수법

십사만사천이란 숫자에 대해 변승우는 “작위적으로 곱하기로 하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 즉 12와 12를 곱하면 144이고 거기에 1천을 곱하면 144,000이라는 “이 괴상한 해석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곱해서 해석하는 것이 단 한번이라도 나옵니까? 없습니다···왜 12에다 12를 더하면 안되고 곱해야 합니까? 많은 것을 뜻하는 수가 1,000뿐입니까? 또 1,000이라도 그렇지 왜 1,000을 곱해야 합니까?”라고 부정한다. 그는 14만 4천을 실제수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변승우. 348).

그러나 다음과 같이 반론이 가능하다(유튜브 종말론 사무소 참고)

(성경에서 숫자를 만들 때) 더하기도 한다. 더하기의 경우 다음과 같이 사용하기도 한다. 하늘의 수 3과 땅의 수로 일컬어지는 4를 더하면 7이다. 요한계시록에 7이 엄청나게 많이 등장한다. 7교회, 7금촛대, 7별, 7영, 7인, 7천사, 7나팔, 7대접, 7머리, 7산, 7왕 등이다. 곱하기도 한다. 3과 4를 곱하면 12다. 3, 4의 곱도 완전, 전체를 의미하는 방식이다. 12는 여러번 사용된다. 이스라엘 12지파, 12사도, 12000스다디온, 이스라엘 각지파 12000명, 완전, 전체란 의미로 계시록에서 사용된다. 이 수를 다시 더하면 12+12=24다. 12는 완전수라고도 한다. 이스라엘이 12지파이고 예수님도 사도들을 택할 때 12명을 택했다. 24는 완전에 완전을 더한 것이라는 의미다. 24 장로(계 4:4)가 대표적이다. 12를 12와 곱하기도 한다. 144다. 완전수, 충만한 수를 상징하는 12를 곱절했으니 144는 그 완전성을 더욱 강조한 의미를 가진다. 144가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계 21:16, 17이다. 1만2천스다디온, 144규빗, 예루살렘 성곽의 치수다. 이 방식은 십사만사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천이 많다는 것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라고 변승우는 묻는다.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반복적 표현이 성경에 수도 없이 등장한다.

삼상 23: 23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탐지하고 실상을 내게 회보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천천인 중에서 그를 찾아내리라

시 68: 17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시 119: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시 144: 13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단 7: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계 5: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결국 십사만사천이 완전수 12와 12를 곱하고 여기에 많은 숫자를 의미하는 1천을 곱해서 계산한 독특한 숫자라는 해석은 전혀 모순되거나 이상한 게 아니다.

5. 셀 수 없는 큰무리(계 7:9).

이스라엘 12지파의 인치는 사건 후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온다. 이는 당시 대로마제국에서 목숨을 내놓는 핍박 속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의 황홀한, 그러면서도 상상도 할 수가 없을 정도의 위대한 비전이다. 그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5-1.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었다(9)

1) 흰옷과 종려나무는 전쟁 모티브와 관련해서 사용된다. 흰옷은 승리의 축하를 위한 축제복장이며 종려가지들은 시몬 마카비 군대가 예루살렘 성의 재탈환을 축하하며 흔들었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이필찬. 369).

5-2.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며 찬양했다(10).

1) 무슨 말씀이 연상되나? 5장 13~14의 모든 만물이 하는 일과 동일하다. 즉 이긴자, 네 생물, 24장로, 십사만 사천, 셀수 없이 많은 흰 두루마기를 입은 무리들은 공통된 모습을 가졌다. 표현만 다를 뿐이다. 온 세상, 어디서나, 종족, 인종, 나라, 연령, 학벌, 빈부, 성별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이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 있던 이십사 장로들(4:4, 5:8~10)의 모습과 유사하다.

5-3.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다(14).

5-4.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14).

어린양은 피로 값주고 1:5~6; 5:10 처럼 그분이 값주고 사신 백성들이 곧 14만 4천, 흰 두루마기를 입은 무리들(14)임을 알 수 있다.

셀수 없는 큰 무리가 누릴 축복(15~17).

5-5.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15. 비교 22:3).

5-6.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15, 비교 21:3).

5-7.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한다(16, 21:4).

5-8.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신다(17, 21:6).

5-9.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17, 21:4).

큰 무리의 특징은 14장의 14만4천의 특징뿐 아니라 네 생물, 이십사 장로와도 매우 흡사하다. 그들이 누릴 축복은 새하늘 새땅에 들어가서 누릴 참된 하나님의 신부의 축복과도 동일하다. 결국 십사만사천, 큰 무리, 그리스도의 신부는 단어가 다를 뿐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일컫는 서로 다른 표현, 단어이다. 

결론

1. 양극단을 주의해야 한다.

구원받은 자가 늘 소수라는 점을 강조하며 한국교회 90%가 마귀 들렸다고 한다든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구원 받지 못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하는 이단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반면 셀 수 없는 큰 무리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제외해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른다는 보편 구원론의 극단을 주의해야 한다.

2. 십사만사천의 특수화를 주의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십사만사천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인을 맞았다는 데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과 별개로 존재하는 숫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큰 무리들은 패잔병이거나 십사만사천은 특수부대인 것처럼 인식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많은 이단·사이비 단체들이 십사만사천을 특정단체, 특정인종에 한정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십사만사천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얻는 구원을 더 상위 개념으로 승격하고 종교 피라미드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악용돼 왔다. 이런 사이비세력에 속지 않으려면 그리스도를 믿는 보편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3. 큰 무리를 통해 보편 교회의 장엄함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십사만사천이 등장하는 7장과 14장을 통해 엄혹한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보호받고 선택받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의 공동체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성경에는 구원받은 자가 소수라는 의미의 말씀도 있지만 셀 수 없이 많은 큰 무리라는 말씀도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려는 아합 왕에게서 피신하며 너무도 서글퍼하며 용기를 잃는다. 그때 하나님은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라며 엘리야 외에도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많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로 외로워질 때, 의로운 일로 핍박 받는 때는 생각을 다시 한번 가다듬어 보자.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얻는 십사만사천의 용사들과 셀 수 없이 많은 큰 무리, 그리스도의 대군이 우리 곁에 함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어떤가. 마음속이 다시 한번 웅장해지지 않는가?
참고도서. 
데이비드 아우내. 요한계시록. 솔로몬. 
캔들 이슬리. Main Idea로 푸는 요한계시록. 서울: 도서출판 디모데. 
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 이레서원. 
이답게. 요한계시록 강해. 새하늘교회. 
변승우.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김주원. 요한계시록으로 정면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