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 짐승의 표 받은 사람도 회개·구원 가능? 콜!"

변승우 요한계시록 강해에 나타난 문제점(1)

2021-05-17     정윤석 기자

666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도 회개·구원이 가능할까? 변승우 목사는 OK라고 말한다. 그도 처음엔 여느 사람들처럼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은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몇가지 성경 구절을 통해 이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게다가 총신대 이한수 교수와 그레고리 비일의 요한계시록 관련 서적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생각을 바꾼 구체적 이유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666표를 받으면 회개가 불가능하거나 영원히 버림 받는다고 정확히 말한 구절이 없지만 반대로 표를 받은 자들도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구절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변승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없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697).

둘째,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계 14:9~10) 이 부분에 현재시제가 쓰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받고’에 현재시제를 썼다는 것은 표를 받고 경배한 뒤에 계속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696~697 참고). 바꿔 말해 설령 666표를 받더라도 돌이키고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이 부분에서 변승우 목사는 성경뿐 아니라 그레고리비일의 <요한계시록> 1274p, 이한수의 <요한계시록> 266을 근거로 제시한다). 특히 계 16:1~11에서 대접 재앙을 내리는데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을 제시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라며 그들이 회개할 수도 있었음을 함축하는 구절이라고 해설한다(699~700 참고).

셋째,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7년 대환난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때 적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짐승의 표를 받는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바울은 재림 때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기 때문에 이것은 666표를 받고 회개가 불가능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한다(701).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환난을 통과하는 동안 적그리스도를 따르며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림의 때가 되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하셨으니 666표를 받아도 회개·구원이 가능하다는 해설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성경에 ‘사망에 이르는 죄’가 딱 두가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성령훼방죄와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 타락 두 가지다라고 설명한다. 666표를 받는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의 요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성령훼방죄·사망에 이르는 죄는 성령의 역사를 시기심 때문에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는 것이다. 또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4가지 요건을 충족시킨 후 예수님을 자발적으로 배반해야 하는데 표를 받는 것은 강요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죄일 수가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번 장에서는 변승우 목사의 주장 중 셋째와 마지막 주장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의하고 첫째와 둘째 주장에 대해서만 반론을 하겠다. 셋째와 마지막 주장에 대한 논의는 차후에 구체적으로 하겠지만 첫째와 둘째 주장에 대한 반증에서 어느 정도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반론 1. 저자의 주장대로 666표를 받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들이 완전히 버림 받았고 절대 회개할 수 없다는 명시적인 성경구절이 하나도 없을까? 반대로 표를 받은 자들도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구절은 많을까?

1-1. 짐승의 표를 받으면 심판받을 뿐 아니라 완전히 버림 받음을 뜻하는 명시적인 성경구절들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증.

1) 짐승의 표가 처음 등장하는 계 13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계 13:8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짐승의 표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짐승을 경배하지 않는 자들은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한다(15절). 그리고 나서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한다. 짐승의 표는 이처럼 처음 짐승(1절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의미함)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주는 것이다. 짐승을 경배하는 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다고 분명히 말씀한다. 따라서 짐승의 표 666은 영원한 심판, 완전한 버림을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말씀이다. 구원받지 못함을 뜻하는 가장 가혹한 표현, 하나님의 소속이 아닌 사탄의 소속임을 말해주는 가장 분명한 표식, 그것이 짐승의 표 666이다.

2)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개역개정. 계 19:20).

“그러나 짐승과 그를 따르던 거짓 예언자는 함께 잡혀서 산 채로 유황이 타는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그 거짓 예언자는 짐승을 대신해서 기적을 행하여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던 사람들을 유혹하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흰 말을 타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칼에 죽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새들이 그들의 시체로 배를 채웠습니다.”(현대인의성경 계 19:20). 짐승과 거짓 선지자뿐 아니라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도 ‘유황불붙는 못’에 던져지는 운명에 처해진다.

다음 구절들은 명시적으로 심판과 버림 받음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다. 저자도 분명히 본문을 제시하면서도 그는 “표를 받고 그대로 사는 자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며 회개하면 다 용서받는다며 회개·구원의 가능성을 해당 본문에서 끌어낸다. 그런데 성경 구절을 그대로 살펴보자. 이 말씀은 짐승의 표를 받으면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니, 표를 받지 말라는 말씀이지 짐승의 표 666을 받아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본문이 아니다. 이건 말씀의 본의를 왜곡하는 아주 나쁜 해석이다.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란다.

3)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4:9~11).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불과 유황의 고난, 밤낮 쉬지 못함이란 표현이 이어진다. 모두 영원히 저주 받을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을 향한 특징적 표현이다. 여기서 회개·구원의 가능성을 끌어내고 그들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접근하는 해석은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구조와 본의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무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해석이다. 짐승의 표와 대조되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온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다. 이들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고 말씀한다. 수고를 쉬는 자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자의 대조,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의 대조, 그것은 짐승과 어린양만큼이나 선명하게 대조된다. 이런 말씀을 따라서 666표를 받으면 심판 받는다는 말씀은 있어도 완전히 버림받고 회개할 수 없다는 명시적 말씀이 없다는 변승우 목사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1-2. 저자의 주장대로 표를 받은 자들도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구절이 많다는 주장에 대한 반증

저자는 ‘명시적’이고 ‘정확하고 확실한 것’을 좋아한다. “666표를 받으면 회개할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구절이 없습니다”, “666표를 받으면 회개가 불가능하거나 영원히 버림 받는다고 정확히 말한 구절이 없습니다.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은 있지만 정확히 말한 구절은 없습니다”, “저는 666표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모든 구절을 찾아서 주의 깊게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절대 회개할 수 없다는 명시적인 성경구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확실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 묻겠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도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말씀한 구절이 있는가? 단연코 없다. 전부 그가 유추해서 끌어내서 억지로 해석해 낸 거 밖에 없다. 저자는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고작 제시한 구절이 계 20:4~5절이었다(그 외에 몇 가지 있긴 하지만 2차 변론 때 다뤄야 할 내용이다). 그는 이 구절을 인용하며 마음에 걸렸다고 하면서도 “회개하면 하나님이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없는 일이 된다”고 말해버린다. 그러면서도 명시적으로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도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구절은 단 한구절도 제시하지 못했다. 우선 그가 마음에 걸렸다는 해당 구절의 본의가 과연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으로 보이는지부터 살펴보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계 20:4~5).

이 말씀은 ‘666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명시적인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하는 게 아니라 변형해서 “이 구절 역시 표를 받은 자들은 휴거되거나 천년왕국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즉 회개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고 부정해 버린다. 이상하지 않은가?

변승우 목사의 설명이 옳다고 보는 사람은 성경을 다시 읽기 바란다.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새번역. 계 20:4~5).

“그들은 심판할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예수께서 계시하신 진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해서 목을 잘린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낙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노릇을 하였습니다.”(공동번역. 계 20:4~5).

변승우 목사의 주장은 바리새인·서기관·대제사장들도 회개했으면 구원받았을 것이다, ‘가룟 유다’도 회개했으면 구원 받았을 것이다, 애굽의 바로왕도 회개하면 재앙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는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는 진짜 구원 받지 못한 사람도 회개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말과도 유사하다. 물론 회개하면 당연히 구원받는다. 그런데 말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변승우 목사의 말이 이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면 과연 성경이 통칭하는 바리새인에 속하는 사람일까라는 의문이다. 가룟유다도 마찬가지다.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면 그가 성경에서 언급하는 지금의 가룟유다로 남았을까, 회개하고 재앙을 받지 않았다면 그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애굽의 바로왕이었겠느냐라는 점이다. 아니었을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도 자꾸 ‘바리새인’ ‘가룟 유다’, ‘애굽왕 바로’도 회개했으면 구원받았을 것이다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의 자연스런 의도를 왜곡하며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더불어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거절할 수 없는 섭리 자체를 부정해야만 나올 수 있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거역하고 자신의 고집을 관철시키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외면하는데서 오는 매우 오만한 주장이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4:9~11). 이 말씀은 분명히 “이마나 손에 표를 받으면 구원받지 못하니 그걸 받지 말라!!!”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이 말씀을 왜곡해서 자꾸 “회개하면 하나님이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짐승의 표도)없는 일이 된다”며 표를 받아도 회개와 구원이 가능하다고 몰아가는 것이 정상적 해석으로 보이는가?

따라서 666표를 받은 자들도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구절은 많다는 변승우 목사의 주장은 거짓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변승우 목사의 자기 관념과 신념과 교리에 빠져 왜곡된 성경해석을 선택하고 믿고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믿고 따르겠는가?

반론2. 저자의 주장대로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계 14:9~10) 이 말씀에서 현재시제가 쓰였기 때문에 설령 666표를 받더라도 돌이키고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또한 계 16:1~11에서 대접 재앙을 내리는데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은 짐승의 표를 받아도 회개하고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게 바람직한가?

1.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계 14:9) 이 말씀에서 현재시제가 쓰였기 때문에 설령 666표를 받더라도 돌이키고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증.

저자는 계 14:9~10의 본의 자체를 자신의 신념과 선입견(666표를 받아도 회개·구원이 가능하다)을 따라 성경을 왜곡해서 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시제니 과거 시제니, 시제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장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있다.

Εἴ τις προσκυνεῖ τὸ θηρίον καὶ τὴν εἰκόνα αὐτοῦ, καὶ λαμβάνει χάραγμα ἐπὶ τοῦ μετώπου αὐτοῦ ἢ ἐπὶ τὴν χεῖρα αὐτοῦ,(If anyone worships the beast and his image and receives his mark on the forehead or on the hand).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형상을 경배하고 그의 표를 이마에나 손위에 받으면). 해당 구문은 저자의 말대로 Εἴ(에이, if)가정법 현재를 사용했다. 현재 Εἴ(에이)~ 한다면 미래에 ~을 할 것(πίεται 피에타이: 마시게 될 것)이라는 영어구문의 if가정법에 해당한다. 짐승을 경배하고 표를 받으면 어떻게 된다는 건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οἴνου τοῦ θυμοῦ 오이노 투 뒤모, wine of the anger)를 마시고 불과 유황(πυρὶ καὶ θείῳ 퓨리 카이 데이오 fire and brimstone)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질문하겠다. 둘 중에 하나만 고르면 된다.

질문) 만일 번역자라면 위 구절에 대한 해석 중 바른 해석에는 동그라미에, 나쁜 해석에는 엑스자에 표시하시오.

① 짐승의 표를 ‘받고’가 현재시제로 돼 있으니 마지막에 회개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회개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니 짐승의 표를 받아도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O X)

② 짐승의 표를 받으면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불과 유황의 고난을 받으니 절대로 짐승의 표를 받으면 안된다(O X)

나쁜 해석은 원문의 본의를 충실히 전달하지 않고 강조점을 강조하지 않으며 자신의 의도로 왜곡해서 전달하려는 해석이다. 위 문제는 초등학생도 풀 수 있다. 모두들 올바른 해석과 적용에 동그라미를 쳤을 줄 믿는다.

2. 저자의 주장대로 계 16:1~11절 말씀은 짐승의 표를 받아도 회개하고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씀인가?

저자의 계시록 해석에서 실망스런 부분은 자신의 ‘회개’관을 성경 말씀에 투영하려는 나쁜 자세에서 온다. 회개하면 어떤 죄도 용서 받는다. 이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걸 가룟유다나 바리새인,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 이세벨의 행위에 참여한 자, 애굽의 바로 왕에게 일부러 대입(변승우 목사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예를 들면 그렇다는 의미이다)하며 그들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논의하는 게 바람직한지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게 바람직하지 않음은 이미 논의했기에 여기에선 생략한다. 성경 본문에서 명시적으로 밝혀 놓은 것을 사람이 자기 논리를 따라 억지로 성경의 진술에 반대되는 정의를 내리는 것은 위험한 법이다. 좀더 자세히 계 16:1~11절을 들여다 보자.

2-1.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재앙을 받는 대상이 누구라고 하는가?

1)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16:2)이 대상이다. - 첫째 천사의 대접

2)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사람들이다(16:6). - 셋째 천사의 대접.

3)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고 회개하지 않고 주께 영광돌리지 않은 사람들이다(16:9). - 넷째 천사의 대접.

4)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다(16:11). - 다섯째 천사의 대접.

여기서 변승우 목사가 좋아하는 ‘명시적’으로를 대입해보자.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구절이 16장에 등장하는가? 단연코 나오지 않는다. 더욱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우상숭배자들에게는 첫째 천사의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대접이 쏟아지면서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난다고 말씀한 게 명시적이고 정확하고 확실한 말씀이다. 그나마 “회개하지 않더라”는 말씀은 짐승의 표나 우상 숭배자에게 내려지는 첫째 천사의 대접 사건에서가 아니라 넷째와 다섯째 천사의 대접 사건에만 언급된다. 따라서 그가 좋아하는 ‘명시적’인 태도로 본다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구절은 없다.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회개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짐승의 표를 받거나 대접 심판에서 제외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2-2.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계 16:9),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16:11)는 말씀이 과연 짐승의 표를 받아도 회개하면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씀인가?

1)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은 666표를 받은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에게조차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리고 기회를 주었지만 돌이키지 않은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참되고 공의로우심, 그리고 끝까지 기회가 있음에도 거절하는 악한 인간의 본성을 확인시켜주는 말씀이다(16:7). 여기서 가장 주목해 봐야 할 것은 과연 그들이 돌이켰느냐 하는 부분이다. 끝까지 그들은 돌이키기를 거부한다고 일곱 대접 재앙 내내 성경은 분명히 언급한다. 16장 본문에는 짐승의 표를 받아도 회개하고 구원이 가능하다는 명시적이고 확실하고 정확한 구절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본문을 근거로 짐승의 표를 받아도 회개·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2) 해당 본문이 명시적으로 말씀하는 것은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숭배한 사람들, 성도들의 피를 흘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 심판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결코 회개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하나님 비방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지막까지 기회가 주어져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지금 일곱 대접 심판을 내리시는 장면이다. 그런데도 끝끝내 회개하지 않았다는 명시적 말씀을 비틀어서 “그들이 회개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구절”(여기서 멈췄으면 변승우 목사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고 인정받았을 수도 있다)에서 오버하여 “그들이 회개할 수도 있었음을 함축한다”, “짐승의 표를 받아도 회개·구원이 가능하다”고까지 언급하는 것은 성경의 메시지를 대하는 바른 자세가 아니다. 회개치 않아서 지금 처벌 받는 사람에게 666표 받아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이 정상적 해석인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3) 성경에서는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완악한 백성에게조차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는 말씀은 충분히 등장한다. 마술사 시몬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도 마찬가지이다(행 8:22). 계 2:20~23절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이세벨, 그로 더불어 간음한 자들, 이세벨의 자녀들(이세벨의 가르침에 완전히 몰입된 제자그룹)이다. 이세벨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회개치 않았다고 말씀한다. 이 구절에서 분명한 것은 회개치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회개할 기회는 주어졌다는 점이다. 이게 이세벨에게 회개할 가능성이 있어서 주신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오래참으시는 자비하신 성품과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움을 표현하시는 말씀일까? 생각해 보자. 성경은 분명히 이세벨뿐 아니라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회개치 않았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이는 그들이 회개할 가능성을 함축하는 말씀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시는 자비하신 성품과 그의 심판의 공의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 666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까지 내비치는 말씀은 아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회개치 않았다는 게 명시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런 그들에 대한 대접 심판은 하나님의 훼방에 대한 공의로운 대가이지 회개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 서울:이레서원. 2013. 158-160p, 674p. 참고). 따라서 변 목사의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변승우 목사는 666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도 회개·구원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OK!라고 답변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개념을 정리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그것은 666 짐승의 표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기본 전제이다. 그는 “저는 지금 666표가 뭐냐? 이런 것을 다루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면 당연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가 짐승의 표 666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리하고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면 이 논의는 조금 더 수월했을 수 있다. 그가 분명히 하지 않았지만 그의 논의 속에서 짐승의 표 666은 미래에 출현할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강제로 주는 외적 표시로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그는 베리칩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조금더 세밀하게 짐승의 표에 대해 정의했다. 짐승의 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짐승의 표 666은 신약성경에서 계 13장에만 나오는 숫자다. 이에 대해 성경은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13:18)고 말씀한다. 666은 땅에서 올라온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는(13:11) 짐승의 숫자다. 하나님을 비방할뿐 아니라 그에 속한 자를 싸잡아 비방하고 신성모독하는 총체적 세력을 의미한다.

2. 13장 11절의 짐승은 13장 1절의 짐승, 바다에서 올라온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인 신성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는 짐승, 용의 권세를 받은 짐승으로부터 권세를 이양받은 존재이다(13:12, 13:15). 666은 한마디로 사탄의 권세를 이양받은 짐승, 그리고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는, 용에 속한 사람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3. 짐승의 표, 짐승의 이름, 그 이름의 수와 대척점에 있는 개념은 계 14장 1절에 어린양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현된다. 십사만사천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눈에 보이는 표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로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의미한다(14:12).

4. 짐승의 표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로서 바다에서 올라온 용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고 나머지 모든 자들(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13:8, 15).

5.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고 불과 유황불에 던져지게 된다(계 14:10). 불과 유황은 심판을 상징한다.

이처럼 저자의 주장과 달리 성경에는 짐승의 표 666을 받은 자들이 받을 심판과 버림 받았음을 의미하는 말씀들이 엄중하게 담겨 있다. 반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한다는 말씀 또한 하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움 또한 드러내고 있다. 이런 명시적 구절이 있음에도 짐승의 표 666을 받아도 회개하고 구원이 가능하다는 변승우 목사의 주장은 매우 허황될 뿐 아니라 성경적 지지를 전혀 받을 수 없는 그만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