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가는 요한계시록 5강(4장~5장)

이후에 마땅히 될 일, 나팔소리 같은 음성, 24장로와 네 생물, 보좌에 앉으신 이, 인떼는 자의 자격, 새노래

2021-05-09     정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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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4장~5장은 5단계의 점층법적 찬양으로 고조된다

이원론은 아주 악한 사상이다. 선과 악, 육과 영 등 이원화된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한쪽은 극한의 정죄로, 한쪽은 지고의 선으로만 분화시켜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 빠지면 이 세상에는 선과 악 두가지 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나머지는 타협이라며 배제한다. 초대교회 이단인 마니교는 어둠과 빛의 왕국의 대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빛의 왕국이 승리했지만 완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빛의 왕국에선 자신의 신적 에너지를 빚어넣어 원초인간(the Primal man)을 만들고 이들을 군대로 구성해 다섯 신과 함께 어둠의 왕국 소멸을 위해 보낸다. 그러나 아르콘이라 불린 어둠의 군대는 이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물질 세계를 만들어 원초인간을 가두기 위한 감옥으로 사용한다. 빛의 왕국의 신은 물질 세계에 갇힌 원초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물질세계에서 꺼내는 과정을 시작한다. 여기서 구원의 본질은 인간 속에 있는 잠자고 갇혀 있는 신을 깨우는 일이 된다(저스틴 홀콤. 이단을 알면 교회사가 보인다. 부흥과개혁사. 2015. 92). 이원론은 위험한 사상이지만 흥미롭고 재밌다. 이런 이원론에 바탕한 고대 신화는 지금까지도 헐리우드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이원론, 또는 선신과 악신의 영원한 전쟁의 시각에서 요한계시록을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서론에서 설명했지만 요한계시록은 이분법적, 이원론적 관점에서 구분할 수 있는 용어가 나오긴 한다. 그러나 엄격한 차이 또한 존재한다. 이원론에서는 선과 악의 신이 대등하게 영원한 전쟁을 이어가는 구도를 그린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주권과 통치의 영역 중에서 기생하는 사탄의 최후의 저항과 패배를 기록한다. 대등한 전쟁과 전투의 개념이란 아예 없다.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내려진다. 즉, 악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끊임없이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는 점이다(9:20~21, 16:9, 16:11). 더불어 요한계시록의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의 사자(계 5:5)로서 공의로우신 동시에 어린양(5:6, 12)으로서 사랑의 구원자이시다. 그는 죽임을 당하실 정도로 사랑이 풍성하시며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현재 사는 땅과 하늘을 새롭게 해 주시는 분이다.

여기서 잠시 요한계시록의 장별 구조를 다시 살펴보자.

1장은 서론, 2장~5장은 지상과 천상의 교회, 6장~16장은 일곱인·나팔·대접 심판, 17장~20장은 큰 성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 21장~22장은 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을 그렸다(계시록의 구조는 김추성,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서울:이레서원. 2015. 목차 참고). 계시록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완전한 통치자이시자 주권자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4장. 이후에 마땅히 될 일, 나팔소리 같은 음성, 24장로와 네 생물, 보좌에 앉으신 이

1. 이후에 마땅히 될 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은 4장~22장까지 나열되지만 가장 중요한 서두인 4~5장의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4~5장은 천상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경배하는 장엄한 광경이다. 중요한 것은 어린양으로 상징화된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급으로 경배 받으신다. 이것이 마땅히 될 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요한계시록은 20장~21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그보다 4장~5장에서 이미 가장 중요한 결론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4~5장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최종적 승리, 피조물의 최후의 상태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온 인류와 피조세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장엄한 찬양과 경배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말하면서 천상의 장엄한 경배의 광경부터 보여줬을까? 이유를 한번 나눠보자.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 기준에서 앞으로 마땅히 될 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내 시점’을 기준으로 인위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해석의 기초는 이 말씀이 쓰여진 당시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부터 찾아야 한다. 그 후에 우리 시대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논해야 한다. 그래야 바른 해석과 적용이 나온다.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전제한다. 영화 쿼바디스를 참고해보자. 콜로세움에서 순교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2. 나팔소리 같은 음성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여기서 또 ‘나팔’이 뭐냐하고 따지면 이상한 해석이 된다. 나팔소리 ‘같은’이다. 국어시간에 졸았다 해도 기억날 거다. 이건 직유법이다). 그 음성이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이신 것이다. 그런 나팔소리같은 음성이 사도요한 당시 일곱교회에 대해 계시하셨다(1:10). 그리고 2장과 3장 마지막에 “이기는 그에게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고 4장~5장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4~5장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 함께 앉은 자들이 나오는 게 어쩌면 당연한 순서이다.

3. 24장로와 네 생물

계시록에는 수많은 상징적 언어들이 있다. 이들을 일일이 모두 구체적으로 적시하며 해설하는 것은 억지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다. 그래도 정리할 수 있는 건 정리해 놓는 게 좋겠다. 4:4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 24보좌가 있고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금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10). 24장로에 대해 누구냐라는 궁금증이 생기지만 우리가 4장과 5장에서 그들이 누구냐보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느냐에 주목해 보자. 24장로와 4생물의 행동을 통해 얻는 게 있다.

먼저 24장로다.

3-1. 이들은 보좌에 앉았다(4). 라오디게아 교회의 참된 이기는 자(3:21)가 갖는 특권이다.

3-2. 흰 옷을 입었다(4). 흰옷은 어떤 교회의 이기는 자들이 받을 특권일까? 사데교회의 참된 이기는 자들이 받을 특권이다(3:5).

3-3. 금관을 쓰고 있다(4:4 스테파노스 크리소스 στεφάνους χρυσοῦς). 이는 서머나교회의 이기는 자들이 받을 ‘생명의 관’(스테파논 테스 조에스 στέφανον τῆς ζωῆς)과 유사하다(2:10).

3-4.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린다(10).

3-5.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린다(10). 이십사 장로들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낮추고 그분께 경배한다. 금관조차도, 자신에게 부여된 금관조차도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서 드린다(10). 그들이 하는 일 또한 찬양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3-6. 24장로는 그렇다면 누구인가? 역대상 24:1~19에 보면 제사장의 24수와 통한다. 요한은 유대인으로서 24라는 숫자가 제사장을 임명했던 숫자임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24제사장의 하는 일은 “이와 같은 직무에 따라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그의 아버지 아론을 도왔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더라”(19절).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돕는 제사장들이 24명이었다(박윤선. 요한계시록주석. 서울: 영음사. 1984. 118).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구약의 구원받은 공동체 전체를 대표한다(그레고리 비일. 요한계시록 상권. 2016. 542).

다음으로 네 생물이다.

3-7.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4:8)라고 찬양했다. 이는 이사야 6:2~3과 비교해서 보라.

로마 콜로세움에서 순교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참혹한 고통속에서 앞으로 참된 예배와 위대한 승리가 올 것이라는 기대였다.

3-8. 전능하신 주 하나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로다(4:8).

제우스와 로마 황제가 참 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참신이심을 경배하고 있다. 5장에서부터 예배는 점층적 구조로 확장된다.

3-9. 당신의 피로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셔서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5:9)라고 찬양한다. 어린양이 인봉을 뗄 자격을 갖추심은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한 사랑에 기초한다. 우리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 죄값을 치러 주셨다(벧전 1:18~19, 계 1:5).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는 게 있다. 어떤 죄에 대해 처벌을 받았으면 다시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우리의 죄에 대해 피값을 치러주셨다. 따라서 우리가 죄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게 된다.

3-10. 만만천천의 천사들의 찬양에 이어 하늘과 땅과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곧 온 우주안에 있는 만물이 옥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 찬양과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토록 받으소서(5:13)라고 찬양한다.

3-11. 모든 심판은 이 보좌로부터 시작된다(6:1, 8:2, 15:7, 김추성.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서울:이레서원. 2015. 146~147 참고)는 것은 서론에서 이미 설명했다.

이 세상에 내려지는 심판은 우리를 피값주고 사신 분에게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그의 나라와 제사장들은 그 심판에서 예외가 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도록 고통당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에 대한 보응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선과 악의 영원한 전투를 얘기하기보다 핍박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보응이고 그에 처절히 당하고 멸망·멸족할 수밖에 없는 사탄과 그 하수인의 세력을 다룬다(6:9).

소결: 4장~5장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은 모든 예배의 중심이다. 천하 만민,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를 받으시는 왕에 대한 예우를 다하는 순간이다(5:13). 인·나팔·대접 심판의 근원은 사탄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온다. 인 심판의 근본은 어린양이시다(6:1). 나팔 심판의 근원지도 하나님 앞의 일곱 천사에 의해서 시작된다(8:2). 마지막 심판인 대접심판도 네 생물에 의해 시작한다(15:7). 네 생물이 어디에 있던 존재들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존재들이다(4:5). 하나님의 보좌, 어린양의 주권, 성령님의 통치 아래에서 모든 게 진행되고 이 심판의 완성은 파괴와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왕 되심으로 보여주는 심판인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다. 심판의 결과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가 완성되어 간다.”(김추성, 37). 완성과 회복이 요한계시록의 최종적 주제이다.

4. 하늘의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이, 모양이 벽옥/ 홍보석/ 녹보석 같더라.

보좌는 왕권을 상징한다. 보석은 ‘같더라’라는 표현을 썼음으로 하나님의 보좌의 영화로움과 존귀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물을 동원한 것이지, 그 보석 자체에 이거저것 구체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영화로우심과 존귀하심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토록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왕권을 갖고 계신다. 그 하나님은 성도들의 하나님이시다. 이 땅에서는 지상의 교회들은 10일 동안의 환난, 사탄의 회의 공격 등으로 어려움을 당하지만 참된 왕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주관하신다. “아무리 악이 만연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을 준다고 해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행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손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레고리 비일. 540).

공항에 비행기가 많아도 그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관제탑이 그들을 통제한다. 하늘의 보좌는 요한계시록의 모든 것을 핸들링하는 관제탑이다.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 보좌의 등불 일곱과 일곱 영

5-1.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영광과 경외감과 두려움을 표현하는 관용어다. 출 19:16,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5-2. 등불 일곱은 레위기 8:2과 일곱 영은 슥 4:10에서 그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사도 요한이 구약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계시록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5장.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

진시황과 그를 암살하려는 무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영웅’이 있었다. 진시황은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에만 접근을 허락했다. 신뢰를 얻으면 얻을 수록 거리가 가까워진다. 신뢰를 완전히 얻기 전에 가까이 할 수 없다. 보좌란 그렇게 두렵고 어려운,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배타적 영역이다. 5장은 '오열'의 장이라고 했다.

1. 사도요한은 왜 울었을까?

사도 요한이 운다. 왜 울까? 보좌에 앉으신 이의 너무도 두려운 그 자리,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오른손에 일곱인으로 봉한 두루마리가 있기 때문이다(1). 그러니 두루마리를 떼거나 펼 자가 아무도 없다. 하늘 위, 땅 위, 땅 아래 그 어느 곳에도(3) 없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를 뗄 자가 없어 보이니 운 것이다. 그 두루마리 안에 모든 성도들이 알아야 할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4:1)들이 기록돼 있을 텐데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영역에 있으니 답답함에 오열한다.

2. 일곱인으로 봉한 두루마리를 누가 떼나?

2-1. 인 떼는 자의 자격

1)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5)

2) 하나님이어야 한다(7)

3) 죽임을 당하사···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 존재여야 한다.

이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인을 뗄 자격이 없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한다(7). 여기서 ‘취한다’는 에이레펜(εἴληφεν, take)으로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 어떤 행동을 할 때 사용됐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에서 ‘가지고’도 에이레펜(εἴληφεν)이란 단어를 썼다. 세자도 황제 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있고 할 수 없는 행동이 있다. 왕권을 이어받기 전에 보좌에 가서 오른손에 있는 어떤 물건을 취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이런 행동은 선 넘는 거다. 권력은 비정한 것이다. 역사를 보면 누구나 그 비정함과 잔인함에 대해 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하고도 아무일이 없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4) 어린양이 곧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니까 가능한 일이다(17:14, 19:16).

5)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본질적으로 동일하거나 아니면 대등한 권세가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6) 따라서 인 떼는 자격은 오로지 '어린양'만이 가능하다(7).

2-2. 인을 떼기 위해 두루마리를 취하자 벌어진 일

호위하듯 보좌에 둘러선 이들이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듯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양 앞에 엎드린다(8).

이는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동일하거나 적어도 동일한 권세를 갖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 어린양이 서로 다른 존재이거나 서로 대적하는 사이라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에게 어린양은 바로 응징을 받았으리라. 또한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 또한 처절한 보응을 당했을 것이다. 제대로 경호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곱 인봉된 두루마리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 인봉된 내용은 6장에서 어린양과 그를 수종드는 네 생물에 의해 떼어진다.

3. 새노래란 무엇일까?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께 엎드려 경배하며 새노래를 불렀다. 새노래가 무엇일까?

9절에 답이 있다.

3-1.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인봉을 떼기 합당하시도다라고 찬양하는 것이다.

3-2. 일찍이 죽임을 당하시고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찬양하는 것이다.

3-3. 그들이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라고 영광돌리는 것이다.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새노래에 대한 답이 이미 나와 있다. 이것이 새노래다. 다시 답해보자. 새노래가 무엇인가? 지난 4강에서 그리스도없이 새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새노래 또한 예전에 못 들어봐서 새것이 아니다. 아무리 헌 것이라도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것이요, 아무리 못 들어본 처음 듣는 말이라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낡은 것, 고물, 나아가 폐기물이다. 오늘날 계시록을 이용해서 폐기물같은, 그리스도없는 계시록을 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폐기물 같은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요한계시록을 이용해 한국교회는 사탄의 해석에 점령당했다고 비하한다.

2) 요한계시록을 이용해 계시록 시대에는 새로운 구원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요한계시록을 이용해 특정 집단, 특정 지역에 예언이 성취됐다고 한다.

4) 자신의 집단의 특정 인물과 계시록의 두 증인 등 특정 존재를 동일시 한다.

5) 요한계시록의 예언 성취를 마지막 때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성취될 말씀이라며 현 시대의 특정 현상을 계시록의 몇 장, 몇 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6) 요한계시록은 2천년 동안 비밀로 감추어져 있다가 마지막 중의 마지막 때인 지금 풀려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7) 계시록을 이용해 특정 시기에 재림이 있다고 주장한다.

3-4. 요한계시록에 노래는 몇 개가 있을까?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새노래 이렇게 세 개가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계 15:3이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신천지는 모세의 노래는 구약 말씀, 어린양의 노래는 예수님이 주신 신약 말씀 새노래는 계시록을 해석하는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새노래라고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새 말씀이기에 새 노래라고 한다(이만희. 요한계시록의 실상. 경기도: 도서출판신천지. 2005. 126p 참고). 잘못된 주장이다. 이미 계 15:3 본문에 새노래가 어떤 노래여야 하는지 등장한다. 다른 데서 답을 찾을 이유가 없다. 계 15:3에서 새노래는

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분의 일이 크고 놀랍다고 찬양하는 것이다.

② 그분이 하시는 일이 의롭고 참되시다고 높이는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이다. 비교해서 볼 말씀은 출 15:1, 시 40:3이다.

결과적으로 새노래는 우리를 세상속에서 구원해 주셔서 너무나 좋고, 아름다운 새하늘과 새땅으로 인도하신 것에 대해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새노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부르는 찬양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와 찬양의 자세가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김주원. 60).

결론:

5장은 5단계의 점층법적 찬양으로 고조된다. 보좌에 앉으신 이>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신 어린양> 네생물과 이십사 장로의 찬양> 만만이요 천천인 천사들>하늘위 땅 위, 땅 아래, 바다 위와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의 찬양으로 대미를 장식하려는 듯하다가 네 생물의 '아멘'과 이십사 장로의 '경배'로 마무리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12).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인 헤아릴 수 없는 천사들이 두루마리를 취하신 어린양을 찬양한다. 아.. 그뿐 아니다. 이 세상, 이 세계, 아니 온 우주의 피조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한다(13).

여기서 잠깐. 계 1:6에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피로사신 '사랑의 왕'이심을 설명했다. 5:9에선 다시 이 표현이 반복된다.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임금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런데 노예가 아니라 10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라고 말씀한다. 우리를 나라, 제사장이며 왕노릇하는 사람들로 삼으신다는 내용이다. 사랑의 왕의 나라(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새로운 나라이다)와 제사장(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다)이요 왕노릇하는 자이니 우리가 당연히 어떠한 사람이 돼야 마땅한가?

"벧후 3: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벧후 3: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떵떵거리고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과 평강과 거룩과 경건의 왕노릇하는 자들로 살아야 함을 계시록 4~5장은 말씀한다[계속].

참고문헌

김주원. 이단대처를 위한 요한계시록으로 정면돌파. 수원: 기독교포털뉴스. 2019.
김추성,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서울:이레서원. 2015.
박윤선. 요한계시록주석. 서울: 영음사. 1984.
그레고리 비일. 요한계시록.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저스틴 홀콤. 이단을 알면 교회사가 보인다. 부흥과개혁사. 2015.

강의용 ppt 다운로드 링크 https://drive.google.com/file/d/12rOMH925e3sdeKoNncyaNbtkYM2amOs5/view?usp=sha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