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가는 요한계시록 4강(2장~3장)

2장~3장 이기는 그(2:7, 11, 17, 26, 3:5, 12, 21), 생명나무의 열매(2:7), 감추었던 만나·흰돌·새이름(2:17), 새벽별(2:28), 흰옷(3:4), 보좌(3:21)

2021-05-03     정윤석 기자

메이저리거 류현진 선수가 LA다저스에 입단했을 때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어떻게 투구할 것인가?” 뭐라고 답했을 거 같나? 야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얘기를 듣는 순간 어떤 말인지 금방 공감하실 것이다. “포수 미트만 바라보고 정확히 던지겠다”고 말했다. 포수 미트 외에 타자의 습성, 잘 치는 성향 등등 온갖 생각과 걱정을 하면 볼은 내가 생각한 대로 가지 않는다. 오직 내게 포수의 미트가 보여야, 그의 리드대로 던져야 승패를 떠나 잘 던진 거다. 패스워드를 제대로 기입하는 것처럼, 포수 미트에 집중하는 것처럼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며 무엇을 입력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마음을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한다.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시면서도 어린양의 이미지로 설명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집중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을 잃는 행위를 지나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지난주에 우리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 키워드 ‘계시, 어제·오늘·장차오실 이,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 구름’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은 2장과 3장의 키워드, 이기는 그(7, 11, 17, 26, 3:5, 12, 21), 생명나무의 열매(2:7), 감추었던 만나·흰돌·새이름(17), 새벽별(28), 흰옷(3:4), 보좌(3:21)를 설명하며 요한계시록의 본질적 메시지에 접근하고자 한다. 요한계시록 2장~3장에도 수많은 상징적 단어들이 있지만 지면과 시간관계상 모두 다루지 못하고 도드라지는 개념에 집중해 보겠다.

이기는 그(7, 11, 17, 26, 3:5, 12, 21), 생명나무의 열매(2:7), 감추었던 만나·흰돌·새이름(17), 새벽별(28), 흰옷(3:4), 보좌(3:21).

2장~3장 2장과 3장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해 칭찬, 책망, 상급에 대해 말씀한다. 요한계시록 본문 중 비교적 해석이 어렵지 않은 장에 속한다.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실제로 도미티안 황제 당시에 지금의 터키 지역에 실제했던 교회들이다. 이 교회들을 역사의 흐름에 대입해서 시대별로 구분하는 해석을 취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모든 시대에 모든 역사속에 7교회의 특징을 가진 교회들은 존재한다. 따라서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현 시대에서도 그 교회들에 주시는 칭찬과 책망과 약속에 대해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들에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도로편의상 에베소~라오디게아로 이어진다.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스라는 교회가 있었는데 다른 교회가 아니라 일곱교회를 선택한 것은 당시 이 교회들이 세워진 곳이 대도시로서 일설에 의하면 지금으로 말하면 우체국 역할을 하는 기지들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고증된 사실은 아니다. 아무튼 참고만 하시고 몇 가지 중요한 단어만 짚고 넘어가겠다.

1. 이기는 자(2:11, 26, 3:5, 12, 21) 또는 이기는 그(7, 17)

먼저 나눠보자. 이기는 자, 이기는 그는 누구일까?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칭찬->책망을 하셨다. 이어서 개선할 것과 나중에 이어질 약속을 해주신다. 따라서 이기는 그는 해당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자들은 누구나 받아서 누릴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김, 승리는 사도요한이 매우 즐겨 사용했던 단어다. 헬라어로 니콘(νικῶν)인데 이는 winner, 어떤 대상을 패배시키고 승리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overcoming에 가깝다. 극복하다, 한계를 넘은 사람을 뜻한다. 즉 신앙적 핍박과 고통과 환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버티며 그리스도를 붙드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기는 자 또는 이기는 그는 계시록에서 가장 악용되는 구절 중 하나다. 이단들은 이기는 자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단수이다. 약속의 목자로서 단 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기는 자는 곧 이긴 자로서 마지막 때에 누려야 할 축복(생명나무의 열매, 둘째 사망의 해, 감추었던 만나와 흰돌)을 수여해주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기는 자를 통해서, 그를 만나야만 구원을 얻고 영생을 받는다.] 과연 이 주장이 맞는지 반박하며 이기는 자 또는 이기는 그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1-1. 단수이지만 집합적 개념이자 절대평가적 개념이다.

이기는 자는 호(ὁ), 이기는 그는 토(Τῷ)라는 단어를 썼다. 하지만 의미는 the one으로서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단사이비들 주장처럼 이기는 자, 그는 한 사람인 게 맞는걸까? 학교에서 100m 달리기를 했다. “선생님이 남자들 중 14초에 들어온 ‘사람’은 여기로 오고 15초 대로 들어온 ‘사람’은 이쪽으로 서!”라고 했다. 그러면 한 사람씩 나오란 의미인가? 여기선 14초라는 특별한 기준을 넘어선 ‘사람’은 10명이든 20명이든 모두 해당하는 포괄적 개념이자 절대평가적 개념이다. 따라서 일곱 교회에 이기는 그, 이기는 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승리하는 모든 자를 의미한다. 

1-2. 이기는 그는 약속과 축복을 수여받는 사람이지 수여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기는 그(2:7, 11, 17, 26, 3:5, 12, 21)는 생명나무의 열매(2:7)를 먹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2:11), 감추었던 만나와 흰돌을 받고, 그 이름을 알게 되고(2:17), 만국을 다스리고 철장을 가지고 다스리는 권세를 받고(2:26~27), 새벽별을 받고 등등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지 그 이기는 그가 이 모든 축복의 약속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주체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축복의 말씀에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내가’가 모두 주어로 제시된다. 축복의 수여자는 이기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을 나눠주고 수여한다는 의미이지 그것을 갖고 자신이 재가공해서 남들에게 나눠주는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1-3. 이기는 그는 구원자가 아니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떠나지 않을 자다.

일곱교회에 주시는 약속의 말씀은 사도요한처럼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이기는 그)가 받을 수 있는 축복들이다(1:9). 이기는 그는 지금은 정확하게 알 수가 확인할 수가 없다. 하나님만이 아신다. 따라서 ‘이긴 사람’, ‘이긴자!’라고 이 단어를 만들면 이상해져버린다. 일곱교회가 겪는 현실적 어려움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는 이기는 그가 장차 받을 축복이지 이미 이긴 사람이 받아누릴 축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제일 얄미운 사람이 누구인가? 제 언론사 동료의 체험담이다. 기획회의를 하기 전에 자신의 선배에게 아이디어를 나눴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선배가 자신이 나눈 아이디어를 해당 기사로 쓰고 있더란다. 선배여서 아무 항의도 못하고 가슴앓이만 했다고 한다. 연예인 세계에서도 개그맨들이 가장 군기가 엄격했다고 한다.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서 선배에게 말하면 그걸 가로채서 선배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행세하는 모습을 보여도 아무말도 못했다고 한다. 나는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가장 열받는 것일 거 같다.

예수님이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신앙의 극복자들, 신앙의 승리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다. 그런데 자신이 마치 예수에 필적하거나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축복의 수여자처럼 가로채는 사람은 구원자가 아니라 적그리스도다. 지금 그 짓을 하는 아주 악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모두 자칭 재림주들이다.

2. 생명나무의 열매(2:7)

2-1. 생명나무란 무엇인가?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서 처음 등장한다(창 2: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를 먹을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범죄한 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가장 큰 이유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영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창 3:22). 이 구절에서 생명나무는 영생을 주는 나무로 소개된다.

2-2.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는 무슨 뜻인가?

우선 생명나무를 먹을 수 없는 결과부터 분명히 하자. 이는 곧 하나님과의 단절과 분리, 구원·영생의 상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먹을 수 없고 차단됐던 그 생명나무의 과실, 열매를 먹게 하신다는 말씀은 생명나무에서 차단되며 누릴 수 없었던 것을 회복하고 누린다는 말씀에 다름 아니다. 즉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고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데이비드 아우내. 요한계시록주석. 솔로몬. 551 참고).

2-3. 구원과 영생은 과연 누구로부터 오는 것인가?

생명나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구원의 풍성함과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의미한다(양형주. 77참고). 요한은 요한복음에서도 ‘생명’, ‘영생’에 대해 수없이 반복해서 설명했다. 요한복음 1:4에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한다.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고 말씀한다. 즉 사도요한에게 생명나무의 열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도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주와 그가 가르치는 교리를 생명나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떠나는 것은 곧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먹는 것이라고 말해 공포와 두려움을 심어준다. 결국 이런 공포와 두려움이 이단에 빠진 사람을 참된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아버리는 역할을 한다.

3. 십일 동안 환난(2:10)을 받으리라.

십일이란, 환란과 관련해서 계시록에 등장하는 기간 중 가장 짧다. 황충이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다섯달(9:5), 짐승이 권세를 받는 마흔 두달(13:5) 등에 비하면 매우 짧은 환난의 기간이다.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는 ‘정해진 기간’, 서머나교회의 환난이 결코 영원하지 않음을, 그리고 생각보다 짧게 지나갈 것임을 말씀해 준다.

4. 감추었던 만나·흰돌·새이름(17)

버가모교회의 이기는 그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은 몇 가지 주요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감추었던 만나, 흰돌, 새이름이다.

4-1. 감추었던 만나는 무엇인가?

버가모교회가 받을 감추었던 만나(17)는 14절과 비교해서 봐야 정확해진다. 버가모교회에는 이스라엘을 타락시킨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다고 말씀한다.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초대교회 당시 우상에게 절을 하고 제물을 먹었다. 이것이 이들의 대표적인 문제였다(장운철. 175참고). 한마디로 이들은 우상숭배의 죄에 노출된 것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으며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으며 이기는 그에게는 감추어진 만나를 먹게 된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우상숭배 후 먹는 제물을 거부할 때 약속으로 얻게 될, 만나가 있음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 만나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라든가, 봉함된 비밀을 알게 된다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4-2. 흰돌은 무엇인가?

돌은 심판을 상징한다고 한다. 돌이 바벨론을 쳐서 멸망시켰고(단 2:44~45), 예수님도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마 21:42~44). 그래서 흰돌은 심판권을 가진 것을 상징한다는 게 신천지식 주장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흰돌은 무엇 때문에 주어지는가. 상이다. 이기는 그가 받을 상을 의미한다. 어떤 변호사가 사건 수임을 맡았는데 나중에 승소했다. 소송에서 이기면 성공보수를 받는다. 성공보수를 준다고 해서 갔더니 의뢰인이 성공보수라며 “다른 변호사들을 폐업시키고 개업시키는 심판할 권세를 준다”고 했다. 이게 성공보수가 될 수 있을까? 만일 다른 변호사를 심판할 권세를 성공보수로 주는 의뢰인이라면 선한 의뢰인이 아닐 것이다(김주원. 39 참고). 이처럼 계시록에서의 흰돌은 이기는 그가 받을 상급 중 하나를 의미하지 심판권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초청장은 초대 받은 그 사람 외에는 알지 못한다. 돌 위에 새이름을 기록하고 받은 자 밖에는 알 사람이 없도다라는 것은 초청의 의미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성경시대에도 잔치에 귀빈을 초청할 때 초청장을 전달했다. 이 초청장은 ‘테세라’라 불리는 흰돌이었다. 흰돌은 성경 시대에 잔치와 축제에 손님을 초청할 때 썼던 초청장이었다(김주원. 40~41; 김광수. 요한계시록. 135 재인용).

4-3. 새이름은?

우리는 성경에서 ‘새’로운 ‘새’것을 구원과 관련해서 특별히 많이 발견한다. 우리 존재가 예전과 그대로인 것 같지만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롭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5~18).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를 새사람으로 일컬으신다. 따라서 흰 돌에 새겨진 새이름은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적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참된 은혜를 의미하지 어떤 특정인이 세상을 심판할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5. 새벽별(28)

두아디라교회의 이기는 자에게는 두가지가 주어진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이다. 여기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당시 황제가 도미티안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이시다(1:5)는 게 신앙인들의 고백이었듯 신앙고백적, 평화와 평강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의미하지 실제로 내가 정치적 왕이나 권세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벽별도 비슷하다.

“새벽별을 수여받는 것은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제야 말로 새벽별, 곧 금성(Venus)에서 온 신성한 존재이자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 말씀에 따르면 로마 황제가 아닌 성도야 말로 그리스도께 직접 새벽별을 수여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존귀한 존재다”(양형주. 105).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께 속한 수많은 것들을 그의 자녀들과 함께 나누시기를 기뻐하신다. 계 3:21에서 보겠지만 우리를 보좌에 앉게 하시고,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다(엡 2:5~7).

그런데 이단들은 이런 용어를 교주나 이긴자라는 사람을 내세워 광명한 새벽별이신 그리스도(22:16)를 자신이 받아들여 자신이 예수님처럼 신이 됐다, 또는 재림주가 됐다는 식으로 오용한다(양형주. 105 참고).

소결:

#1 지금까지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교회와 관련한 말씀 중 몇 가지 주제만 뽑아서 설명했다. 여기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계시록 2~3장에서 종종 등장하는 말씀이 하나님안에서 새로운 목표나 새로운 무엇인가를 지향하기 보다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25)는 말씀이다. 이미 네게 있는 것. 없는데 만들어서 가지라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그것을 굳게 붙잡고 유지하고 버티라는 말씀이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3:2)고도 하신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계 3:11)는 말씀도 반복하신다. 모두 동일한 말씀이다. 새로운 것을 잡거나, 남이 가진 것을 잡으려고 하지 말고 '네가 가진 것'을 갖고 승부를 걸라는 말씀이다.

#2 교회는 성경에서 성도/ 제자/ 신부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는 것처럼 이기는 자는 참교회를 향한 표현 중 하나다.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이 표현은 앞 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복과 동일하다. 따라서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를 뜻한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3 이기는 그, 이기는 자는 곧 예수를 믿는 자이다.

요한1서 5:4~5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자가 곧 이기는 자다. 이 개념을 사도 요한은 요한1서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7, 11, 17, 29). 하나님께서 하시는, 성령님께서 전하시는 참된 메시지와 말씀들에 귀를 기울이는 주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성령님은 교회들에게 칭찬과 책망과 권면과 보상을 약속하신다. 계시록 2~3장이 지상의 교회에 대한 칭찬과 권면과 약속이었다면 4~5장은 천상의 교회가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리는 장엄한 찬양과 경배의 모습을 담은 구절이다. 5강에서 이어서 보겠다[계속]

[참고도서]

김주원. 이단대처를 위한 요한계시록으로 정면돌파. 수원: 기독교포털뉴스. 2019.
데이비드 아우내. 요한계시록주석. 서울: 솔로몬. 2003.
양형주. 신천지 백신. 두란노. 2020.
장운철. 신천지요한계시록의 실상 대해부. 수원: 기독교포털뉴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