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가는 요한계시록 2강(서론)

요한계시록 1~22장까지 숫자와 키워드 조합으로 기억하기

2021-04-16     정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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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세상에 가장 재밌는게 불구경, 싸움 구경이란 말이 있다. 싸움이 붙었다. 어디에 돈을 걸겠는가? 한쪽은 어린양이다. 다른 한쪽은 짐승이다. 한쪽은 착하고 유약한 어린양, 또다른 쪽은 인상만으로 먹어주는, 그것도 그냥 짐승이 아니라 일곱 머리 열뿔 달린 짐승이다.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곰의 발에 사자 입을 가졌다. 게다가 용의 권세까지 받았다(계 13:1~2). 어린양과 짐승이 인생을 건 격투를 한다고 한다.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 내기에 참여해야 한다. 판돈이 있다.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한다. 이 격투의 승자는 단 한 사람이다. 자, 누구에게 걸 것인가? 드디어 싸움이 시작됐다. 자욱한 먼지가 온 천지에 피어오르고, 누가 적군인지, 누가 아군이지 모를 정도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다. 그러다 싸움이 그쳐간다.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승자이다. 먼지가 가라앉고 싸움의 승자가 걸어나오고 있다. 누구일까? 어린양이다. 어린양의 손에 적장의 수급이 달려 있다.

그렇다. 요한계시록은 일곱머리 열뿔달린 무시무시한 짐승·적그리스도·사탄의 세력과 어린양이 거대한 영적 전쟁을 치른다, 그 싸움에서의 최후 승자가 거대한 짐승의 세력이 아닌 어린양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설의 묵시문학이다. 어린양뿐 아니라 그 어린양을 믿고 따르는 자들도 덩달아 승리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이 커다란 핵심을 부여 잡고 계시록을 1장부터 22장까지 숫자로 풀어가겠다. 수학을 잘하려면 분수를 알아야 한다. 국어를 잘하려면 주제파악을 잘하면 된다. 지금부터 숫자와 주제파악을 버무려서 1장부터 22장까지 숫자로 쉽게 파악하는 요한계시록을 시작한다. 순식간에 돌파하니, 안전벨트 잘하시고 엑셀을 밟아보겠다. 요한계시록의 어려움은 단어 자체의 상징성에서도 비롯되지만 도대체 각 장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이해조차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각장의 숫자와 키워드를 만들어 연결하여 이해를 시도해봤다. 숫자라고 하니 7영, 4생물, 24장로, 한때·두때·반때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텐데 그게 아니다. 1장은 1, 2장은 2, 3장은 3, 4장은 4 이렇게 숫자대로 계시록 각 장의 키워드와 엮었다. 필자가 임의대로 엮은 것이니 서로 생각하는 키워드가 다를 수도 있고, 이해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나름대로 변형해서 이해하셔도 좋다. 도대체 요한계시록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고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각 장별 키워드를 숫자와 연결하기 전에 전체적 윤곽을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먼저 하나님과 어린양에 대한 예배, 경배와 그를 따르고 그 증거를 믿는 자들에 대한 기록과 그들의 승리가 기록된 장들이다. 1~5, 7, 10~11, 14, 19~22장이 그렇다. 이 장에서는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지상과 천상에서의 모습들이 다양한 관점과 각도에서 그려진다. 나머지, 6, 8~9, 12~13, 15~18장은 짐승, 심판, 어린양과의 거대한 전쟁 등이 묘사된다.

본론:

1장 - 예수 그리스도

‘1’가지만 생각하자. 요한계시록은 ‘예수’의, 예수를 위한, 예수에 의한 계시이다. 그 한가지만 생각하면 된다(1절). 요한은 본 것을 ‘다’ 증거했다(2절). 요한이 모든 걸 ‘다’ 증거했으니 동시성이라느니, 실상이라느니, 계시의 전달방식이니 엉뚱한 말을 붙여 사도요한격 목자가 이 시대에 또 나와야 한다(이게 신천지식 접근)거나 사도 요한의 증거가 마치 완료되지 않은 것처럼 말하며 요한계시록에 뭔가 덧붙이는 건 명품에 뭔가를 덧붙이는 허접한 행위다. 고급 샤넬 가방이 있으면 거기에 이것저것 붙이거나 빼버리면 명품 훼손행위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를 계시한 명품이다. 그 계시 그대로 보고 이것저것 갖다 붙이거나 여기저기서 빼버리면 요한계시록에서 금한 금령(계 22:18~19)에 해당한다.

2장은 이기는 그

‘이’기는 그가 누릴 축복에 대해 언급한다. ‘그’라고 했다고 이기는 자가 한명(신천지)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기는 그라는 의미는 ‘신앙의 승리자’(현대인의 성경)를 의미하는 단수이지, 단 한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령 ‘단 한사람’이라고 해도 7교회에서 각각 이기는 자를 말씀했으니 최소 7명이 나와야 한다. 이렇듯 이기는 ‘그’를 단 한 사람을 의미하는 단수로 해석(신천지가 그렇게 한다)하면 이상해진다.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말씀했다. “100m 달리기 잘하는 '사람' 손드세요!”라고 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한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앙의 승리자들은 누구인가? 이 또한 간단하다. 예수에게 붙어 있는 자다. 예수에게 잘 묻어가는 자다. 또한 이 말은 군사적인 용어로 어린양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와 일곱 머리 열뿔달린 무시무시한 짐승으로 상징되는 사탄과의 대결에서 가장 연약해 보이는 어린양에게 끝까지 붙어서, 충성하는 자를 나타낸다. 

또한 이기는 그는 '교회를 이기고 나오는 자'가 아니다. 그 7교회 안에서 신앙을 지키고 그 교회 안에 머무르는 자가 누릴 축복이다. 이기는 그가 교회를 떠났다는 말씀이 있는가? 아니다. 또한 이기는 그는 과거에 이긴 사람이 아니라 신앙의 마지막까지 버티며 이기는 사람을 의미한다. 요한1서 5:4~5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씀한다. 

리차드 도킨스같은 유물론 과학자들의 공격, 신천지나 안상홍 증인회 같은 이단사이비들의 준동, 예수를 믿으면 형무소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핍박받는 나라에서 숨죽이면서도 끝까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그가 곧 이기는 자다.

3장 - (일곱교회 중)세 교회

3교회가 남는다. 2장에선 에서버두(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3장에선 사빌라(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다. 7개 교회 중 3개 교회에 대해서도 이기는 그가 누릴 축복을 말씀한다는 점에서 2장과 동일하다. 패턴은 예수의 모습과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과 약속으로 이어진다. 배도한 7교회이거나 7교회가 잘못된 교회라면 약속을 하실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약속’을 해주신다. 그리고 칭찬만 받고 책망은 받지 않은 교회가 2장에선 서머나, 3장에선 빌라델비아교회다. 그리고 칭찬은 없이 책망만 받은 교회는 오직 라오디게아교회뿐이다. 이 교회들이 역사의 시대별로 나타난 교회들을 대표한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에베소교회는 사도시대·초대교회, 서머나교회는 핍박·순교하는 교회, 버가모는 세속화와 타협한 시대, 두아디라는 종교암흑시대··· 빌라델비아교회는 복음선교하는 18세기~19세기의 교회, 라오디게아교회는 20~21세기의 심판시대의 현대교회 등으로 해석하는 모습이다. 이걸 세대주의 해석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든 시대에 모든 유형의 교회를 다 보고 산다. 1세기의 역사 속에서도 라오디게아교회는 있었다. 21세기의 교회에서도 서머나·빌라델비아 교회를 만날 수 있다.

4장은 네 생물(이십사 장로)

‘사’ 네 생물, 이십사 장로가 하나님의 보좌에서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한다(10절). 2~3장이 지상의 교회를 보여준다면 4장과 5장은 이미 이기는 자들이 예배하고 경배하는 천상의 교회를 보여준다.

네 생물, 동양에선 좌우남북을 대표하는 짐승들이 있어 왔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봉황을 의미) 북현무(거북이를 뱀이 묶은 형태). 실제 동물도 있지만 신비의 동물들이 있다. 동서남북 4방위를 지키는 신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사고 속에 동서남북은 사방, 모든 곳을 의미하지 않는가. 네 생물도 어느정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네 생물이 하는 일은 음양오행 사상과는 다르다. 동양사상에선 네방위를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성경에서는 네 방위나 사방을 뜻하는 4생물(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이다. 이중 사자와 황소는 솔로몬 성전에 만들어졌던 형상이다(왕상 7:29). 여기에 2종류를 더한 게 계시록 4장의 네 생물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된 예배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발견한다. 그 목표와 대상은 하나님이다.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 씨는 자신의 손에 어느날 '네생물이 앉았다'고 했다. 요한계시록의 구도 속에서 보면 이 말은 결국 자신이 경배 받을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어떤 동물, 어떤 사방위, 어떤 존재도 경배의 대상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경배대상이며, 우리는 그 어떤 피조 세계의 요소보다도, 즉, 내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잘되고, 건강하고, 이런 요소로 인해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그 자신의 위대함 때문에 찬양해야 함을 발견한다(톰라이트. 모든사람을 위한 요한계시록. 서울: IVP. 2019, 78). 그리고 4장은 피조세계의 모든 생물이, 그리고 12+12(12의 중요한 의미는 계 21장 12, 14절을 보라)의 24장로로 표현된 존재가 천상의 교회에서 참 예배 드림을 보여준다. 하나님만이 예배 대상임을 보여주는 4장에 이어 5장에서도 예배 받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가 누구일까?

5장- 사도요한의 ‘오열’과 어린양

경찰에 고소를 당한다. 처분 결과는 우편으로 온다. 거기에는 당사자 외에는 펴보지 말아야 하며 제 3자가 우편물을 뜯어서 볼 경우 법적처벌이 있을 수 있다고 나온다. 이것이 인봉이다. 5장에 두루마리의 편지가 나오는데 아무도 펴서 볼 수가 없다. 그것을 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펐던 요한이 ‘오’열한다. 5장은 사도요한이 크게 울고 오열하는 장이다. 두루마리가 일곱인으로 봉하여져서 아무도 인을 떼지 못하자 크게 운다. 그러자 장로 중 한 사람이 ‘어린양이 일곱인을 떼실 것이라’고 하신다(5절). 일곱인은 완벽하게 봉해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것이 어린양에 의해 완벽하게 떼어졌다. 따라서 계시록이 다시 인봉됐다던가, 그리스도외에 인봉을 뗄 누군가가 나타난다던가, 또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인봉 뗄 누군가 나타났다고 하던가, 그 어떤 미완성된 주장도 허용될 수 없다.

인봉을 떼신 어린양을 향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경배하던 네 생물, 24장로, 만만천천의 천사들이 동일하게 어린양을 찬양한다. 어린양에 대해 이토록 하나님과 동일한 대상으로 여기며 장엄한 예배를 드리는 표현은 성경에 요한계시록 외에는 없다. 계시록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다고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모든 내용에서 예수가 곧 영원토록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1장부터 5장까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 보좌의 네 생물 24장로의 장엄한 예배와 그들이 누릴 축복을 약속했다면 이제부터 이것을 반대하고 막고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에 내리는, 그리고 짐승인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엄혹한 심판이 그려진다.

6장 - 여섯 인 심판

여섯인 심판이 시작된다. 6장, 8장, 16장은 인/나팔/ 대접 심판이 이어진다. 인/나팔/대접심판을 6장에 같이 두는 이유는 계시록은 한 사건, 또는 동일한 주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어서다. 이 세 재앙들은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일곱 인 재앙이 바로 일곱 나팔 전체의 재앙으로 연결되며(계 8:1), 일곱 나팔 재앙이 바로 일곱 대접 전체의 재앙인 것으로서 상호 연결된다(계 15:1). 여기서 일곱이란 숫자는 천지 창조의 7일과 관련된 것으로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일관되게 심판하실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결국 창조도 심판도 다 하나님의 섭리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어린양이 얼마나 연약한지 세상 누구나 안다. 양도 약한데 어린양은 어떻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계시록 6장은 어린양에 의해 이 세상에 진노의 날의 시작되고 마쳐진다는 것을 알려 준다. 여기서 인을 떼는 것은 봉함된 비밀을 푸는 게 아니라 인류 진노의 시작과 끝이라는 것을 알려 주며,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진노와 어려움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내 얼굴을 가려 달라며 하나님을 피하려 한다. 끝까지 인간은 어리석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을 바라보기 원하신다. 그 어린양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6~17)고 말한다.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누구의 얼굴을 보기 원하나, 혹시 그분에게서 피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오늘도 하나님, 어린양이신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바라는 사람들이 참 성도들이고 인 심판을 피해갈 자들이다.

7장 - 14만 4천

“칠일은 7, 칠이 14다.” 그래서 7장과 14장에만 나오는 개념이 있다. 14만 4천이다. 외우기 쉽다. 14만 4천은 오직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만 나온다. 그 십사만 사천명이 보좌와 어린양에게 구원이 있다며 ‘경배’를 올리는 예배가 장엄하게 펼쳐진다(10절). 이는 6장 17절, “진노의 큰 날에 누가 능히 서리요”에 대한 답변으로서 제시된다.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없다. 그런데 엄혹하고 요란한 심판도 14만 4천 앞에서는 잠시 침묵하고 있어야 한다. 계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즉 종들의 이마에 인치는 사역은 그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뜻이 이루어진다.

14만 4천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인을 친다고 했는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문자적 이스라엘로 보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스라엘 지파의 계수는 전쟁을 위한 계수다(민 1:20). 당연히 남자 중에서 뽑는다. 여자는 해당사항이 없다. 문자적으로 보면 여자는 14만 4천에 들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지파도 구약에서 언급한 지파와 맞지 않는다. ‘단’지파가 빠져 있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 대신 요셉 지파를 넣었다. 장자인 르우벤이 아니라 ‘유다’ 지파를 가장 앞에 넣었다. 문자적 이스라엘 12지파가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들의 총수를 의미하는 상징적 숫자라는 걸 말해준다. 이 14만 4천을 인을 친 후 계시록에 셀 수 없이 큰무리가 등장한다. 이들은 전쟁과 완전히 무관한 어린양의 피 뿌림으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다(14). 어린양의 피의 은총을 입지 않은 사람은 14만4천과 무관하다. 바꿔 말해 14만 4천은 어린양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총합이다. 

8장 - 나‘팔’심판

나‘팔’ 계시라고도 할 수 있다. 우박, 불, 바다, 별, 강 등이 해를 입는다(6절~12절). 인 심판의 또다른 차원에서의 설명이다. 인>나팔 심판은 같은 사건을 새로운 각도와 관점에서 설명한 것으로서 어린양을 경배하지 않고 거절하는 짐승의 세력들에 대한 엄혹한 심판이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9장 - '구'멍에서 나오는 연기

‘구’멍에서 연기가 나오며 세상이 어두워지고 이 땅이 전갈, 다섯달의 괴로움(황충으로 표현된 메뚜기의 생존 활동 기간을 의미하는 기간이다), 황충(전쟁을 위해 예비한 말), 아바돈, 아불루온 등으로 표현되는 임금을 통해 이 땅에 화가 있다고 말한다. 인/ 나팔을 심판이라고 하는데, 심판이라기 보다 ‘계시’사건이라고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당하는 사람들이 ‘회개’(20절), 회개!(21절)하라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회개, 무엇으로부터 돌이키라는 것인가? 십사만사천명처럼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7:10)는 인정, 경배(7:11),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7:14)이 되길 바라시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짐승을 경배하는 사람들조차!

10장 - 펴놓인 작은 책

10은 젓가락과 떡을 연상시킨다고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자. 10장에는 사도 요한이 작은 책을 받아먹는 사건이 나온다. 5장의 책은 예수님이 인봉을 직접 떼신다. 그런데 10장에는 ‘작은 책’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복음의 증인이 받아먹기에 감당할 만한 크기임을 의미한다(양형주. 신천지 백신, 306). 그러나 말씀을 듣고 받아먹을 때는 달고 좋지만 실제로 이것을 삶 가운데 실천하고 선포할 때는 쓸 수밖에 없는 복음전도자의 고통을 대변한다. 일곱 우레에 대해서는 설명이나 언급을 시도하는 게 불필요하다. 출 19:16 “제 삼 일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삼상 2: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보통 우레는 심판과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한다. 여기까지만 언급하고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하신다. 일곱인/ 나팔/ 대접 모든 게 기록됐는데 심판을 의미하는 일곱 우레만큼은 우리에게 감춰져 있다.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먹은 사건 이후에 11장에서는 두 증인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작은 두루마리는 두 증인이 선포하고 다니는 말씀, 복음의 말씀으로 봐야 한다.

11장 1+1, 두 증인.

그들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계 1:20 참고)라고 설명한다. 촛대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했으니 아마도 교회, 하나님으로부터 권세(3)를 받은, 권능(6)을 받은 자들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이들에겐 입에서 불이 나오고 죽이는 권세가 있다. 하늘을 닫아 비를 오지 못하게 하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재앙을 줄 수 있는 권능이 있다. 다만, 증언을 마치기까지다(7). 결국 죽음을 당하지만, 정말 큰 권세를 가졌지만, 결국 죽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증언을 마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한 증인이 아니라 두 증인인 이유는 증언의 확실성을 의미한다(민 35: 30 무릇 사람을 죽인 자 곧 고살자를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신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예수님도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라며 제자들을 둘씩 보내셨다.

짐승은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이 누구에게 있든, 상대를 죽이려고 한다. 그런데 그 장소가 영적으로는 소돔이라고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데,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라고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은 유대 땅 골고다인데, 어째서 소돔과 애굽이라고 할까?(11:8). 이는 계시록을 읽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사실은 골고다인데,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악한 상징으로 읽히는 장소로 소돔과 애굽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장소. 이는 바벨론도 마찬가지겠다. 이미 기원전 514년, 즉 요한이 계시록을 쓰기 근 500년 전에 멸망한 바벨론을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세상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로 활용한다.

이제 계시록의 반을 지나왔다. 계시록의 반이 지나가는 11장에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15)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는 짐승과 음녀의 세력을 굴복시키시고 새하늘새땅, 새예루살렘을 열어가는 계시록 19~22장에 다시 디테일하게 반복된다.

12장 - '시비'거는 일곱머리 열뿔

‘십이’, ‘시비’거는 존재에 대해 설명한다. 해를 옷 입은 여자, 일곱머리 열뿔이 달린 붉은 용이 아이를 삼키려고 대기한다. 계속 시비를 터나 하늘은 아이의 편이다. 용은 쫓기는데 이는 옛뱀, 마귀, 사탄이라고도 한다. 하늘에서 쫓기고 이 땅에서 난동을 피운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들을 이기게 된다(11절). 땅이 때로 여자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13장 - 짐슴의 표 666
13은 서양에서 불길한 숫자로 여겨진다. 13에선 하나님을 훼방하는 세력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낸다. ‘짐승’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짐승을 경배하게 된다(8절). 보좌에 계신 분과 어린양을 경배하느냐, 아니면 짐승을 경배하느냐의 싸움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진정한 전쟁이다(8절).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질 인류와 인류간의 세계대전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어린양을 경배하느냐, 짐승을 따르느냐의 영적 대전쟁에 대한 말씀이다. 앞으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실존적 문제다. 이는 미래에 펼쳐질 대 격전이 아니라 지금 내가 여기서 겪는 경배에 대한 심각하고 처절한 싸움이다.

이 짐승이 11장에 등장하는 두 증인처럼 기적들을 베푼다(12절, 13절). 사탄은 짝퉁이다. 흉내를 참 잘낸다. 짐승을 경배하는 본질을 드러낸 숫자가 666이다. 다시 정리하지만 계시록은 사람을 딱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 하나님의 인 맞은 자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다(8절). 이 반대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 짐승의 표를 받았다고 설명한다(8).

14장 - 14만4천

7장과 더불어 14장은 14만 4천이 등장한다. 이들은 짐승을 경배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6절).

15장. - 마지막 재앙의 시보

시보. 시간을 알려 준다. 어떤 시간인가?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는데 이게 마지막 재앙의 시간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짐승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에 서서 거문고를 갖고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른다. 폭풍우가 지나고 참된 평안을 찾은 듯한 분위기다. 짐승의 표를 받고 그를 섬기느냐, 아니면 죽느냐의 기로에 섰던 순교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은 모습이다. 그들의 노래는 일관되다. 4장과 5장에서 이미 보지 않았던가. 장엄한 찬양의 광경을. 그 모습이 다시 반복된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마나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3절) 비교: 계 4:9, 5:12;14, 7:11~12, 11:16, 14:7.

하늘에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린다. 교회 이름을 증거장막성전이라고 백날 해봐야 예수를 경배하지 않으면, 사람이 예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면 소용없다. 그건 성경의 증거장막성전이 아니다. 교회 명칭이 '증거장막의성전'이 아니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곳이 참된 증거장막의 성전이다. 교회 명칭을 ‘증거장막의 성전’이라 해놓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지 않고 참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그곳은 666 짐승의 전당이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간판에 있지 않다. 간판에 진리의 근거를 두고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그건 헛된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

16장 - 대접심판

팔 일은 팔, 팔 이 십육이다(구구단). 인 - 나팔 - 대접 심판은 6장, 8장, 16장으로 이어진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심판의 3중주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계시가 이어진다. 1 독종/ 2 피바다/ 3 피의 강과 물 / 4 해의 불/ 5 어둠, 아픔, 종기 6 강물의 마름/ 그럼에도 이들은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대접 심판조차 심판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회개'를 원하는 계시사건이라고 봐야 옳다(11절). 여기서 우리는 멸망받기로 예정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를 보게 된다. 그것은 그 마음에 ‘회개’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끝까지 그리스도께로 돌아서기를 거부하는 게 사람들의 본성임을 잘 보여준다.

큰 날에 있을 전쟁, 아마겟돈 전쟁이 있다. 큰 성도 무너지고 만국의 성들이 무너진다(19). 중요한 건 계시사건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원망과 불평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때도(13장 5~8절), 원치 않는 일을 당할 때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비방한다(21절).

17장 - 일곱의 비밀

일곱에 대한 숫자가 무척 많이 나오고 그것에 대한 설명까지 친절하게 해주는 장이다. 일곱대접, 일곱머리 열뿔(짐승의 비밀을 이른다 - 7절), 일곱머리 - 일곱산(9), 일곱왕(10)이 나온다. 그 일곱의 뜻을 정확히 밝혀 주고 있다. 열뿔은 열왕(17:12), 많은 물(1절과 해석은 15절에 있다. 백성/ 무리/ 열국/ 방언)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에 대한 이야기다(1절). 음녀는 하나님을 모독한다(3), 일곱머리와 열뿔이 있다(3), 자주 빛과 붉은 빛 옷(4),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다(4),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4),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6). 

음녀는 어린양과 더불어 싸운다. 그래도 어린양을 이기지 못한다.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어린양뿐만이 아니다.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14). 신앙의 승리는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어린양에게 묻어가며 얻는 것이다. '그와 함께 싸우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그와 함께 있는 자들',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라고 하셨다. 싸움은 어린양이 해주시고 그 대가는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이 얻는다. 물론 우리의 신앙에 투쟁적 요소가 있음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전쟁에는 백마를 탄 장군은 물론 기마병, 보병, 포병 등이 참전한다. 최전방에 있는 그들이 이겨야 승리한다. 그러나 완전 후방에 땅을 기반으로 살며 그들의 보호속에 있는 주민들이 있다. 어린양이 승리하시니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그 속에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 묻어서 함께 승리자가 된다.

18장 - 바벨론 음녀의 패망

18은 욕으로 많이 쓴다. 큰 성 바벨론이 망하니 입에서 욕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이여(2), 망하는 시그널이 있음에도 음녀는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7). 그럼에도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시라 그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8). 이 엄혹한 심판에도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고 하나님은 끝까지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설 것을 말씀한다(4). 계시록은 심판으로 절단 낼 것이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심판을 통해 각성하고 회개하고 깨닫고 돌이키라는 메시지다. 하나님의 심판은 내 백성을 구분하는 행위다(4).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즐거워할만한 일이다. 하나님이 '성도, 사도, 선지자'들을 위해 베푸시는 의로우신 행위이다(20).

19장 - 우리 '식구'들의 승리 -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의 승리

십구-식구(그리스도안의 가족)들이 승리의 찬가를 부른다. 할렐루야송이 세 번 나온다. 첫째는 참되고 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한다(2절). 둘째는 하나님의 종들,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 작은 자가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말씀한다(5절). 셋째는 전능하신 이의 통치를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자는 찬양이다(7절).

한 식구된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의 백마탄 자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운다. 이분의 눈은 불꽃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옷은 피뿌린 옷이다(11~13).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른다(15). 식구들이 승리한다. 그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다(16). 그분의 승리는 17장 14절에서도 언급됐다.

반면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다. 짐승은 잡히고 거짓선지자도 잡히고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들도 잡혀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그 나머지도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린다(18~21). 완전한 대 패배다. 일곱 머리에 열 뿔이 달린 무시무시한 존재가 어린양으로 불리던 말 탄자의 입에서 나오는 검에 죽는다. 어린양과 그를 따르는 식구들에게 최종적 승리가, 반면 그를 반대하고 짐승의 표를 받고 경배하던 그들에게는 최종적 패배가 있음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20장 - 천년왕국

이 장에는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요한계시록을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해도 20장 4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만 딱 확인하면 그가 무/전/후천년설 중 무엇을 지지하는지 파악이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는 20장을 다룰 때 차후에 설명하겠다. 

무서운 옛뱀, 마귀, 사탄이 결박당한다(2). 그런데 그 무서운 사탄을 잡고, 결박하는 더 힘세고 무서운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다(1). 사탄은 공포스런 존재로 묘사되지만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이길 수 없다. 결박당하고 만다(2). 그러나 반드시 놓이는 날이 온다(3). 이 패턴은 하나님의 패턴과 유사하지만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관용어로 그의 영원성이 표현된다(1:4;8, 4:8, 16:5). 반면 짐승은 있다가 도 사라지고, 죽게 된 거 같다가 다시 나타나는 등 등락과 명멸을 반복한다(계 13: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계 20:2~3). 결박당했다가 풀려나기도 한다.

그가 어떤 상태로 바뀌든 그가 하는 일은 똑같다(7~8). 즉, 그에게 회개란, 회심이란, 반성이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토록 그는 반항하고 저항한다. 그 대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다. 나와서 하는 일이라는 게 고작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하는 것이다(8). 그들을 싸움을 붙이는 일이다.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는 성을 두른다(8, 9). 그러나 하늘에서 이번엔 천사가 아니라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운다(9). 그리고 다시 마귀가 불과 유황에 던져지니 거기는 마귀뿐만 아니라 짐승과 거짓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다(10). 마귀/ 사탄/ 거짓 선지자들을 두려워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은 천사의 손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에 순식간에 정리되는 날이 올 것이다.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날이 온다(13). 그때는 모든 죽은 자들, 큰자나 작은 자나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12). 모든 죽은 자들이 그렇다(13).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다(14).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진다(15).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데, 또 하나의 자격을 언급한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다(15).

책들에 대해서는 간단히 살펴보자. 책이 아니라 '책들'이다.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이 펴졌다. 이건 생명책이다. 아마도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으니 심판책과 생명책이 별도로 있는 거 같다(12). 심판의 기준은 행위책(심판책)이다. 그런데 살아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다(15). 이 생명책으로 살아 보려고 수많은 이단사이비 단체들이 자신들의 회원 명부를 생명책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생명책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의 앞에 펴져 있는 것이다(11, 12).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함부로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21장. 새하늘 새땅의 신랑 신부

둘이 하나되는 게 21이다. 부부의 날도 21일이지 않는가. 21장에선 새하늘 새땅에 들어선 신랑과 신부의 혼인잔치가 열린다. 저자는 끊임없이 본다. 그의 시선에서 사탄의 승리는 1도 없다. 오직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이 세상에 대한 심판과 그리스도께서 여실 새하늘 새 땅이다.

새하늘 새땅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같이 아름답다(2). 2절에선 오히려 우리가 신부가 아닌, 마치 새하늘새땅이 우리를 위해 단장한 신부 같다고 표현한다. 새하늘 새 땅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옥보석, 홍마노 등 금은 보석이 아니다. 새하늘 새 땅의 특징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에 있다(3).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새하늘 새땅을 누릴 수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신다(4).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다.

신앙의 승리자들은 이것을 누리게 된다(7). 둘째 사망을 받을 자들의 명단이 나온다. 생명책이 있다면 사망록도 있다.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음행자들, 점술가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항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8).

22장. 둘둘. 영원한 생명나무

투투라는 그룹이 처음 나왔을 때 스물 둘의 멤버들이 모였다고 소개했다. 그토록 젊은 그룹. 하나님의 나라는 22살의 젊음처럼 생명을 얻는 곳으로 기억했다.

생명나무가 3회 나온다(2- 열매와 치료, 14-나아가며, 19-참예)가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는다. 반대로 사망나무가 없다. 창세기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 2:9)가 등장한다. 그러나 계시록에는 둘다 나오지 않고 오직 생명나무만 있다. 그곳은 안전하다. 내 의지이건, 타력에 의해서건 내가 사망나무를 접하거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접하거나 하나님을 반역할 어떤 것도 접하지 않게 된다. 젊음 같은 생명은 안전하게 확보되고 유지된다.

생명수(17)

젊음은 빨리 지나간다. 속히(6- 타케이: τάχει, 7 타퀴: ταχύ, 12 ταχύ, 20, ταχύ) quickly.가 4회 등장한다. 6- 속히 되어 질 일. 6절만 일에 대한 신속성이다. 그 외는 모두 그리스도가 속히 오신다는 말씀이다.

7- 속히 오신다. 그래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12- 속히 오신다. 그래서? -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20- 진실로 속히 오신다. 그래서?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은혜와 행함과 지키는 자들에 대한 복이다.

6절은 진행될 일의 신속성이다. 7, 12, 20은 그리스도 재림의 신속성이다. 그분께서 속히 다시 오신다. 행한 자가 누릴 복의 재림이시오, 은혜의 재림이시다. 그분의 오심을 아멘으로 받자. 주 하나님이 빛을 비추시고 그의 종들이 세세토록 왕노릇한다(5). 그래서 그곳엔 밤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와 성령으로 늘 함께 하신다. 늘 동행하신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 아멘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에 대한 우리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그분이 재림하실 때도 우리는 그분과 이미 함께 하는 상태에서 만나게 된다. 존재론적으로 사라지거나 우리와 단절된 상태에 계셨던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이 오시는 것이다.

결론: 
첫 서두에서 우리는 두 존재의 거대한 전쟁을 살펴봤다. 어린양 대 일곱머리 열뿔 달린 짐승의 거대한 전쟁이었다. 어디에 내기를 걸겠냐고 했다. 유약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의 자격과 신분을 가진 어린양께 당신의 인생을 걸겠는가? 인상만으로 먹어주지만, 그러나 하는 일이라곤 하나님께 반항하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싸움 붙이는 짐승에게 인생을 걸 것인가? 요한계시록 1장~22장을 읽으며 우리는 이 세상의 진정한 승리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고 최종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지, 가슴이 웅장해지는 감동을 얻게 된다. 그 어찌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계 7: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