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가는 요한계시록 1강(총론)

2020-11-23     정윤석 기자

그리스의 밧모섬은 지중해의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찬란하다. 미세먼지 하나 찾을 수 없는 2천년전에는 얼마나 더 눈부셨겠는가. 사도요한은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1:16)고 말했는데, 아마도 밧모섬의 눈부신, 그래서 차마 쳐다볼 수 없는 빛나는 태양을 보면서 한 말일 것이다. 그렇다. 계시록에는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이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으로서 차마 쳐다보기조차 어려운 강력한 존재로 계시된다.

요한계시록은 어렵다. 앞에서 읽고, 뒤에서부터 읽고 중간에서부터 읽고 또 읽었다. 대략 50회에서 왔다 갔다 한 거 같다. 요한계시록 주석과 책과 만화도 봤다. 종말론 관련 서적도 읽었다. 그래도 어려웠다. 그렇게 어려운 요한계시록을 읽고 또 읽는 건 고역이었다. 사실 내게 요한계시록을 어렵게 하는 건 세대주의적 관점도, 이단들의 왜곡에서 나온 해석도 아니었다.

구조분석

내가 요한계시록이 어려웠던 이유는 구조 분석이라는 따분함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분석하더라.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계시록 본문에 대입, 1장은 본 것, 2~3장은 이제 있는 일 4장 이후는 장차 될 일이라는 구조로 나누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독서를 하다가, 또는 재밌는 책을 읽으면서 구조를 분석한 경험이 있는가? 단연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이미 그 책은 재밌는 책이 아니었으리라. 책 읽기는 그냥 읽어야 즐겁고 흥미롭다. 성경 읽기도 비슷한 요소가 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좋은 경험, 감동적인 경험을 하기보다 성도들은 구조 분석부터 한다. 이는 요한계시록 읽기의 즐거움을 뺏어가는 행위였다. 즐거움과 기쁨이 없으면 모든 일이 그렇다. 오래가지 못한다.

다양한 해석학

그 다음으로 어려웠던 이유는 해석 방식의 나열 때문이었다. 상징적이냐라는 부분. 요한계시록의 여러 가지 상징들이 그렇듯이 모든 계시록의 내용을 상징으로만 봐야 한다는 해석, 과거적이냐. 요한계시록의 모든 계시가 이미 사도 요한시대에 이루어진 내용이라는 관점, 미래적이냐, 역사적이냐···. 계시록 본문은 저기서 우리를 이미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해석방법의 종류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어려운데 그걸 머리 속에 꾸겨 놓고 그 따분한 서론적 작업을 들어야 한다. 이 과정 때문에 계시록은 답답했다.

낯선 상징

그 다음으로 낯선 상징 때문이다. 일곱 촛대, 일곱 별, 일곱영, 네 생물, 이십사장로, 14만 4천, 666, 일곱머리 열뿔 등등 요한계시록은 어떤 성경보다도 다양한 묵시적 상징으로 가득하다. 그 상징의 해석방법을 모르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이란 산맥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냥 읽었다. 마치 소설 읽듯, 수필 읽듯, 그야말로 성경책 읽듯. 공부가 아니니까. 그러면서 요한계시록의 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인적으로 정리했다. 그래서 이 글은 요한계시록의 주석도 아니고, 연구서도 아니다. 아마도 도움이 된다면 개인적 나눔으로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읽기의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데서 의미가 있을 거 같다.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먼저 요한계시록은 단순하게 이해해야 한다.

1. 요한계시록 단순하게 이해하기

1-1.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매우 간단하다. 1장 1절, 첫째 구절과 22장 마지막절, 20~21절로 이해해 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렇게 시작한다. 계시의 전달 방식이고 뭐고 곁가지 중요하다는 것에 귀를 열 필요가 없다. 성경에서 계시가 통으로 전달됐는데 전달방식이 어떻고, 누가 계시를 받은 종이고 따지면 피곤해진다(이게 신천지식이다). 그냥 우리에게는 요한계시록 전체가 전달됐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계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다. 그분의 존재에 집중하지 않으면 계시가 이만희 계시, 안상홍 계시인지, 문선명 계시인지, 왜곡해도 헷갈려진다. 1:1 첫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한다. 즉 이 계시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그분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분을 믿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이게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다른 길로 새면 그건 요한계시록을 잘 못 읽어낸 것이다.

마지막 절을 보자.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22장 20절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하셨다.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면 된다. 재림주니, 재림의 방법이니 이런 거 다 정말 필요없고 쓸 데 없다. 사도요한이 믿었던 그 주 예수, 사도 요한이 2천년전에 믿고 전했던 그 예수님이 '주'이시고, 그분이 속히 다시 오신다. 다시 말하지만 2천년 전의 '그분'이 다시 오셔야 재림이다. 인격의 변이가 생겨 다른 사람이 예수로 오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개념은 2천년전에 사도요한이 믿었던 그 예수가 다시 오신다. 그래서 '재림'이다. 출근했던 아버지가 다시 오신다. 그러면 출근하셨던 아빠가 그대로 인격적으로 다시 오셔야 한다.

그런데 안상홍이 갑자기 내가 네 아빠야!라고 문을 두드리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안돼요라고 문을 안 열어주니, 성경을 내밀면서 내가 네 아빠야라고 해도 절대로 문을 열어 주면 안된다. 이만희가 내가 네 아빠야 라며 부채들고 한손을 들고 서서 초인종을 누르면 정신병원에 신고하면 된다. 성경책을 펴서 내가 네 아빠인 이유를 설명하려 하면 역시 정신 차리라고 뜨거운 물을 확 끼얹어야 한다. "네 아빠가 영으로 임해서 내가 대신 왔어!"라고 하면 아버지 사칭 죄로 신고해야 한다. 예수는 영으로 임해서 대신 누구 속에 들어가서 다시 올 이유가 하등의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1:18)이기 때문이다. 빙의나 임재의 방식으로 다른 인격속에 영으로 들어가 재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분이다.

인격의 변이를 거쳐서 바뀐 존재가 오는 게 아니라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게 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고백이고 그에 대해 "주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이라고 고백하는 게 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심판주로 벌벌 떨 정도로 무섭게 오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이라고 외칠 수 있는가? 당연하다. 그분은 그의 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 앞에 드리신 가장 위대한 구원자 주님이시다. 나를 피값을 주고 사서 죄 없다 하시고 나란 존재를 하나님 앞에 드린 분이다. 우리가 경배하고 믿고, 신뢰하고 예배하는 바로 그분이 오신다. 당연히 할렐루야 외치게 되지 않겠는가? 이게 요한계시록의 핵심이다.

1-2. 삼위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받을 복(1~5, 7, 10, 11, 14, 19~22장)과 짐승인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받을 저주(6, 8~9, 12~13, 15~18장).

요한계시록은 이분적 구도로 완벽하게 스토리를 진행해 간다.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맞는 것이 하나님의 인(7:2, 9:4)이라고 표현된다. 짐승인 우상 숭배를 하는 자가 받는 것을 짐승의 표(16:2, 19:20)라고 한다. 하나님의 인은 눈에 보일까? 아니다. 영혼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영적 소유를 의미한다(7:3). 지금까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찍힌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왜냐? 영적 소유의 의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꿔 말해서 짐승의 표 또한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성경은 매우 명확하다. 짐승의 표와 하나님의 인으로 딱 인류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의 백성, 하나님의 종과 짐승의 종으로 딱 나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 당연히 사탄의 백성이 아니다. 짐승의 종이면 당연히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따라서 베리칩은 전혀 여기에 끼어들 틈이 없다. 베리칩을 받으면 짐승의 표이니 그걸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인가? 웃기는 정의다.

이렇듯 계시록은 딱 두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경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짐승과 적그리스도를 따르며 우상을 따르고 믿고 경배하는 자는 우상숭배자다. 이게 짐승의 표라고 표현된다. 따라서 지금 대한민국 안에서도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영적'으로는 존재하는 것이다. 베리칩 실행과 아무 관련이 없다. 북한 같이 기아로 굶주리는 나라에서 그리스도를 믿으면 요덕 수용소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앞에 굴복해 김정은 우상숭배에 마음을 바친 사람은 짐승의 표를 받은 것이다. 그게 영적인 의미다.

선악/ 은혜와 심판/ 하나님과 사탄/ 어린양과 짐승/이라는 철저한 이분적 구도 속에서 요한계시록은 복과 저주, 은혜와 심판을 매우 선명하고 철저하게 그려간다. 특히 각 장은 그에 대해 충실하고 선명하게 설명한다. 삼위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받을 복은 대표적으로 1~5, 7, 10, 11, 14, 19~22장에서 서술한다. 짐승인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받을 저주는 6, 8~9, 12~13, 15~18장에서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영적인 복과 저주이기에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고통과 어려움에서 모두 면제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1-3. 묵시적 상징, '영적'이라는 말이 계시록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다.

11장 8절이 계시록을 여는 열쇠와 같은 개념을 제공한다. 두 증인이 죽는데 그 시체가 큰 성길에 있다.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이다. 그런데 계시록은 마태/마가/누가/요한에서 말하는 곳과 다른 지명을 말한다. ‘영적으로 하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소돔/ 애굽이라고 말한다. 계시록은 이렇게 '영적'으로 보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갈 수가 없다. 각종 표현을 영적, 그것도 사도요한이 의도한 영적 의미로 해석하지 않으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게 된다. 내 나름대로의 '영적 의미'로 해석하면 계시록 해석이 먼 안드로메다로 가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세가지를 염두에 두고, 계시록으로 향해 간다면 우리는 계시록을 1장부터 22장까지 마치는 순간 우리도 사도요한처럼 "아멘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복음을 들은 사람처럼 감격에 겨워 고백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