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계보 12]대기업형 이단·사이비의 서막 – 박태선(1917~1990년)

2020-08-21     정윤석 기자

이순화에서 김백문에 이르기까지 이단·사이비들은 규모로 따지면 소기업형이었다. 김백문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 중 대기업형 이단·사이비의 서막을 연 두 사람이 1950년대에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한다. 그 양대 산맥은 박태선(전도관), 문선명(통일교)이다. 우선 1990년 2월 7일 사망한 박태선부터 살펴보겠다. 박태선의 전도관은 편의상 3기로 구분했다. 1기는 성장부터 장로교인으로서 신비체험을 하기까지(1917~1954), 2기는 이단 규정을 받고 전도관을 창설하고 갖가지 사회문제를 일으키기까지(1955~1979), 3기는 명칭을 전도관에서 천부교로 바꾸고 대내외적으로 신으로 천명하고 사망하기까지(1980~1990)이다.

박태선 1기 - 장로교 출신으로 피갈음과 신비 체험(1917~1954년)

박태선의 출생지 평안남도 덕천(빨간색 표시)

박태선은 1917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난봉꾼이었다. 물질적으로 어렵지 않았는지 술집에 가서 노는 날이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많았다고 한다. 밤 중에 어머니는 술집에 가서 놀고 있는 아빠를 찾아오라고 내보낸 적도 있다. 술집에 가면 아빠는 술집 여자들과 놀고 있었다. 박태선의 모친은 그가 7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밤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고 신경쇠약에 걸린 후에 맞은 임종이었다. 부친은 곧 새장가를 갔으나 역시 일찍 세상을 떴다. 그 외로움 속에서 박태선은 아홉 살부터 예배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평남 덕천군의 교회였다(김성여. <박태선 장로의 이적과 신비경험>. 1955. 서울:신천신지사, 24에서 최중현. <한국메시아운동사 연구>. 1999. 서울: 생각하는백성, 226 재인용).

박태선의 성장은 이단 교주들과 조금 달랐다. 나름 유학파였다. 동경에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머물면서 정밀 기계공장을 경영했다고 한다. 일제 시대 당시 유학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 공장을 경영할 정도로 사업가적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이후 귀국, 서울에 터전을 잡고 같은 사업에 종사하며 탄탄대로를 걷는다. 교회도 빠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처음 출석한 교회는 남대문교회였다. 남대문교회는 예장 통합측에 소속한 유서깊은 교회다. 집사 생활을 하던 박태선은 겉으로는 남대문교회의 충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남모를 호기심이 꿈틀댔던 것 같다. 부흥사로 이름을 날리던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에 1948년경 참석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의 역사를 체험하게 됐다고 한다(최중현, 230 참고).

이북 출신으로서 영체교환과 피갈음으로 유명한 정득은이 서울에 자리를 잡을 때였다. 정득은이 여 선지자로 이름을 날리자 1948년~1949년 박태선이 그녀를 만나 영체교환이라는 의식에 참여했다고 한다(최중현, 234). 박태선은 이에 대해 ‘영적 의미’일 뿐이라고 반론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미 성공한 사업가였다. 340명의 직원을 거느렸고 게다가 장로교인이었다. 공산당에게 잡히면 반동분자가 될 게 뻔했다. 집의 구들장을 뜯어내고 피신용 공간을 만들어 그 속에 20여 일을 숨어 지낸다. 이 때 ‘하늘로부터 오는 생수’를 체험했다고 한다. 그 후 빠져 나와 1951년 1.4후퇴 때는 평택으로 내려가는 길에 온 몸의 피가 바뀌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피난 길에 육체가 극도로 쇠약해질 때 소변을 봤는데 소변으로 자신의 몸에 있는 피가 빠져 나왔다는 것이다.

“마지막 피가 다 빠져 나오니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전신이 시원하고 상쾌함이 오는 것이었다.··· 피가 다 빠져나간 후 때가 낮인데 주님께서 나타나시었다. 가시관을 쓰시고 손에 못자욱이 분명하여 거기서 피 흐르는 주님, 옆구리에서 막 피가 쏟아지는 주님, 발에서도 피가 흐르는 주님이 나타나시었다. 피 흘리시는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피를 마시라’ 하시며 그 피를 내 입에 넣어 주시어서 내 심장 속에 정하고 정한 주님의 보혈을 흘려들여 주셨다.”(김성여, 1955:65~66, 88~89; 최중현 1999, 242 재인용).

박태선 2기 – 전도관 창설··· 신문에 보도된 기괴한 행각들(1955~1980)

남대문교회를 떠나 창동교회에서 ‘장로’로 불렸던 박태선은 드디어 1955년 1월 1일부터 7일까지 서울 무학교회를 필두로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하기 시작한다. 한국 기독교가 그의 부흥회를 예의주시하며 이단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1955년 7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박태선 전도관 운동에 대해 ‘사이비 종교 운동’이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음해인 1956년 2월 15일 자신이 속한 장로교 경기노회가 이단으로 규정한다. 급기야 박태선은 7월 1일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를 조직하고 정통교회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기독교편1권>. 1997. 서울: 국종출판사, 180). 이후부터 박태선과 관계된 기괴한 행각들이 신문에 대서특필되기 시작한다. 1957년, 신천지의 이만희가 전도관에 들어갔다는 시기에 이미 박태선은 이단으로 규정된 뒤였다. 이만희가 들어간 때부터 탈퇴하던 1967년 이후까지도 박태선 관련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1957년 3월 18일 <세계일보> ‘괴! 박장로 전도관의 정체’라는 제목 아래 ‘남녀 12명이 혼음?’

유튜브 종말론사무소 영상 갈무리

1958년 9월 10일 <경향신문> 19세 정신병 소년, 수족 묶고 마귀 쫓는다며 곤봉으로 마구 패서 치사

1958년 9월 17일 <경향신문> 생수는 박 씨가 손을 댄 맹물, 그 물 마시면 병 낫고 천당에 간다. 한갑에 백환짜리 되는 캬라멜은 생수의 백배나 되는 큰 힘 가지고 있다. 안찰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약하고 죄를 지어서 병이 낫지 않는다’고 덮어 씌워. 신앙촌 이탈하면 영육이 썩어 문들어진다 공갈. 전국 신도는 3만여명.

1959년 2월 20일 <경향신문> 신도 가두어 놓고 강제안찰

1959년 4월 19일 <동아일보> 식모가 주인 집 아들 식도로 난자···박태선 장로교 맹신하다 정신이상 보여

1960년 12월 10일 박태선 전도관 신도들, 동아일보 피습,

1960년 12월 11일 <동아일보> 박태선 씨, 3.15 부정선거 개입.

1963년 6월 13일 문교부, 전도관 생수사건 진상조사···눈에 생수 넣어 집단 결막염

1966년 7월 8일 <경향신문> 박태선 씨 업무상 횡령혐의··· 신앙촌 간부 6명 입건

1975년 6월 10일 <경향신문> 박태선 씨의 장남, 26만 5천달러 해외 도피, 외환관리법위반 혐의로 긴급 구속, 탤런트·가수 등과 엽색 행각.

주요 기사의 보도에 따르면 박태선의 전도관은 공포의 ‘안찰’행위를 했다. 심지어 사람의 수족을 묶어 놓고 마귀를 쫓는다며 곤봉으로 죽기까지 때렸다고 한다. 1958년 11월 24일에는 폭행, 혼음,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된다(박영관. 이단종파비판(1). 서울: 예수교문선선교회. 1976, 414). 이후 3.15 부정선거(3·15 부정선거, 개표조작 등 1960년 3월 15일 직접 선거에 의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를 말한다) 개입 혐의로 1961년 1월 27일 2차 투옥된다. 그에 대해 박영관은 “(그는)불법의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회로부터 이탈했고, 성경의 교리에서 떠났으며, 사회에서는 물의를 일으키고 국가의 법을 위반하였던 것이다”고 썼다(박영관, 415). 자칭 재림주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던 박태선의 장남은 ‘부’를 주체 못하고 1975년 26만달러(3억1천만원)의 외화 밀반출 혐의로 구속된다. 1975년도, 대기업 사원의 초봉이 10만원 하던 때이니 지금의 화폐가치로는 약 100억원 이상이라고 추산할 수 있다. 그의 외화밀반출보다 더 관심을 끌었던 건, 탤런트·가수 등과 엽색행각을 벌인 일이었다.

부산 기장읍에 위치한 신앙촌

박태선은 사업가 출신답게 이미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서 1957년 시온산업(주)이란 사업체를 시작했고 관련 사업체를 통해 캐러멜, 생수, 간장 등을 판매했고 지금은 생명물식품(주)에서 간장, 두부, 요구르트 런 등을 생산한다. 이중 요구르트 런은 대형 마트점에도 공급된다. 일년 매출액은 95억 7,505만원, 기장에 있는 시온식품(주)은 일년 매출액은 6억 5천여만원이다. 전도관은 종교+산업의 복합체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도관이 1980년이 되면서 더욱 극단으로 치닫는다.

박태선 3기 – 천상천하 유일한 하나님 등극, 천부교 시대(1980년~사망)

비둘기표시를 한 박태선의 천부교 건물

1980년 8월 1일 박태선은 단체명을 전도관에서 천부교로 변경한다. 이때부터 극단적인 주장들이 노골적으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99%가 죄인인 예수를 증거한 신약은 폐하고 자신의 말이 곧 성경이라고 하면서 5,789세의 하나님이라고 하다가 1985년 이후에는 자기 나이가 1조 5천억세라고까지 한다(박태선. 하나님 말씀. 천부교. 2014. 72~73, 허병주. 사이비 이단 천부교 제 1대 교주 박태선 장로의 사상연구. 2018 총신대학교선교대학원 선교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42).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이탈하였으며 본격적으로 박태선의 분파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천부교의 상징은 감람나무 잎을 물고 있는 비둘기상으로 대체된다. 천상천하에 유일한 하나님이라던 박태선은 말년에 폐결핵과 당뇨, 신장병 등 각종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1990년 2월 7일 사망했다(탁명환. 기독교이단연구. 서울: 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86. 183 참고).

천부교는 ‘전도관’으로 활동하던 1979년, 한 때 전국 600~700여개의 조직과 소사제1신앙촌, 덕소제2신앙촌, 기장제3신앙촌을 세우고 신도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시온초중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신도 수 70만여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1989년 신도 수 3천40여명, 집회장 수 63개소로 축소됐고 2017년에는 공식적으로 800여명으로 감소했다(허병주, 26). 집회장소는 카카오맵으로 검색한 결과 2020년 기준, 전국 30여개소로 나타났다.

박태선의 교리는?

사진: 한국의 신흥종교(기독교편1권). 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80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데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박태선은 천상천하의 유일한 하나님으로까지 불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영모님으로 불리며 ‘동방의 의인’으로 여겨졌고 자신의 출현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이 임박했다고 주장하면서 구원받으려면 신앙촌에 입주해야 된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이를 믿고 신앙촌에 입주했다. 박태선은 또 자신이 말세에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이 땅위에 나타나 죄를 구분하여 심판하고 의인을 불러 모아 14만 4천의 수가 차면 예수님을 오시게 하여 그들과 더불어 천년성을 이룩한다고 했다. 신도들은 박태선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여 박태선이 예수 재림을 마음대로 조종하는데 악조건일 때는 공산 치하 때 오시게 하고 호조건일 때는 평화시에 오시게 한다고 하며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게 한다고 믿었다(탁명환. 기독교이단연구. 서울: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98, 180쪽).

1980년 이후 박태선은 이단사이비성을 극심하게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를 하며 자신을 구세주로 변신시키고 나섰다.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로 인해 그들의 피는 더러워졌는데 예수의 피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직 모든 것을 승리한 이긴자인 감람나무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묵시록 2:17에 나오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터이니’의 말씀을 인용해 우리의 더러워진 몸 속에 세라믹의 원소를 기로써 천상천하의 하나님인 박태선이 우리 몸 속에 넣어주며 이슬성신을 내려준다. 만나는 이슬과 같은 은혜이며 이러한 것을 이긴자요 말세의 완성자인 그가 내려주는데 이는 곧 요엘 2:29의 물붓듯 부어주는 은혜다. 이로써 우리의 몸은 썩지 않게 되며 피가 맑아져 영생한다”(심창섭외. 기독교의 이단들.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2000. 319-320참고).

박태선은 이외에도 이사야 41:1~29를 근거로 동방의 의인, 계 2:17을 근거로 이긴 자(흰돌을 받은 자는 동방의 의인이요, 이긴자라 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돌은 장차 철장을 가지고 나타난 이긴자라고 해석한다), 계 11:4의 감람나무, 호세아 14:5~7의 이슬은혜 등으로 일컬어졌다. 요한복음 4:1~26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생수를 근거로 감람나무가 주는 생수를 마시면 영생한다고 주장했고 박태선의 안찰이 죄사함과 치유와 의인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쳤다(심창섭. 322 참고). 천상천하 유일한 하나님이라던 그는 1990년 2월 27일 사망한다.

- 1950년대에 시작한 박태선 계열 이단사이비에는 어떤 곳들이 있나요?
이단·사이비의 교리가 김성도에 이어 백남주, 김백문에게 전수된 것처럼 김백문의 이단 사상은 다시 박태선과 문선명에게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박과 문 두 사람 모두 1950년대에 이단사이비의 역사의 무대 위에 전면적으로 나타나게 됐지요. 그중 박태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신장개업한 연도는 1980년대 전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에덴성회의 이영수(1942년생)가 있습니다. 그는 전도관의 전도사 출신으로 이미 1973년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이탈자 10여명과 함께 집회를 하며 공식적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삼천년성의 이현석도 박태선을 추종하다가 1980년 이탈했으나 조희성의 영생교에 잠시 몸담았다가 독자적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조희성의 영생교도 전도관 이탈신도들을 규합해 1981년 10월 10일 경기도 부천에서 영생교를 시작합니다. 김순린의 한국중앙교회는 1982년 서울하왕십리에 박태선 전도관 출신 탈퇴자들과 시작했습니다. 이외에도 김풍일의 새빛등대중앙교회(현 김노아, 세광중앙교회), 손영진의 목단교, 이불교라는 곳도 있습니다. 대기업형 이단의 출발인 박태선은 그 영향력도 이전의 이단사이비와는 비교불가할 정도로 컸습니다. 박태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대다수 자신을 ‘이긴자’라고 주장하고 ‘육체영생’을 주장하는 특징을 보였습니다.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이만희에 대해서는 차후 신천지 편에서 상세히 다뤄보겠습니다. 

- 1950년대 이전까지 중소단체에 불과했던 이단사이비 단체들이 박태선, 문선명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가 있을까요?
우선 당시 기독교인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인구 1600만명 중 29만명, 6.25한국전쟁 후 50만명, 1961년 60만 7천여명, 1979년 598만명으로 급증합니다. 1950년대에는 기독교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눈에 띄지 않는 시절입니다. 그런데 왜, 대기업형 이단사이비의 신도들이 폭발적으로 늘어간 걸까요?

저는 박태선이 이전 이단·사이비와는 다른 특징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1950년대에 나타난 박태선·문선명과 이전 이단·사이비는 어떤 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종산복합체라는 점입니다. 전도관은 비즈니스가 결합된 형태의 모습을 띄었다는 겁니다. 1957년부터 이미 전도관 계열 시온산업 등을 통해 전도관 신도들이 회사에서 일을 하며 그곳에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해 냈습니다.

불치병을 낫게 한다는 치유의 역사를 강조하죠, 천년왕국이 자신들의 단체에서 이뤄진다는 종말론적 신앙을 고취했죠, 거기에 더해 생업까지 그곳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는 점에서 1950년대 후반기 불안한 현대사를 살아가던 한국인들의 심성에 박태선의 전도관은 폭발적 매력을 끌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종교적 영역에만 제한된 것으로 보이는 정통 교회들은 당시 전도관에 들어간 신도들에게 매우 싱거운 것처럼 보였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