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계보11]사이비종교 최악의 참사 ‘백백교’

2020-01-29     정윤석 기자
1992년 개봉한 영화 백백교의 한 장면

‘이단계보’라는 주제로 한국교회 사이비 종교사를 산책하고 있습니다. 이순화, 남방여왕, 김성도, 정득은, 백남주, 황국주, 김백문···. 이들의 공통점은 자칭 재림주 교리의 첫단추를 뀄다는 점입니다. 1950년대에는 이들의 뒤를 이어, 특히 김백문에게서 영향을 받은 이단사이비의 두 거두 문선명·박태선이 등장하면서 이단·사이비 단체의 지형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이단계보도에 등장한 인물들은 소기업형으로 대다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런데 1950년, 한국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두 명의 교주는 한국사회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친 대기업형 이단사이비의 시작입니다. 현존하는 자칭 재림주들이 모두 이 두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그 영향은 큽니다.

다만 대기업형 사이비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건과 인물이 있습니다. 백백교와 동방교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정리한 다음 대기업형 이단사이비의 서막, 문선명의 통일교와 박태선의 전도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백백교 사건을 보도한 1937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

백백교(1920~1930년대)
백백교는 1920년대~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존재한 사이비 종교입니다. 조선 철종 때 유·불·선의 교리를 절충하여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서 많은 유사종교가 파생했는데 그중 전정예가 1899년 백도교를 세웠고 그의 아들 전용해가 1923년 설립한 곳이 백백교입니다.

“백백교는 ‘곧 심판의 날이 온다. 너희가 전국 53곳의 피난처에 가 있으면 난 금강산에 은거한다. 그때 천부(天父)님이 내려오셔서 난 임금이 되고 너희는 헌금을 바치는 순서대로 벼슬을 받아 날 모시게 된다.’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와 그의 일당들은 무지몽매한 농민들에게 불로불사(不老不死)를 시켜 주고 세상이 자기 천하가 되면 고관대작(高官大爵)의 관직을 준다고 했다. 또 머지않아 ‘노아의 홍수’ 같은 심판이 오면 교도들만 건져 주겠다는 등 온갖 허무맹랑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했다.”(유재동, 동아일보 ‘1937년 백백교 피해자 유골 발굴’ 2007년 6월 8일자).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이라는 주문을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도 가르쳤고 구원을 위해선 재산을 바치고 딸가진 부모들에게는 딸도 바치라 하여 그들을 성폭행하거나 첩으로 거느렸습니다. 사람을 죽인 이유는 뭐였을까요? 원래 이곳엔 부자들이 적잖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세상 종말이 오고 불로불사의 존재가 된다고 했지만 막상 들어가 본 백백교는 사실과 달랐습니다.

영화 백백교의 한 장면

신도들을 늘 감시했고 교주는 수십명의 첩을 거느리고 호의호식하며 살았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사람들이 잘못을 지적하다가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자 불만세력을 잠재우고 동요를 막기 위해 사람들을 살해한 겁니다. 1937년 2월 당시 일본 경찰이 전용해 교주의 본부가 있던 가평에서 발견한 시체만 346구였습니다.

백백교의 교리는 단순했습니다. △큰 전쟁이 벌어지니 재산을 팔고 백백교로 입교하라 △교주의 신통력으로 그대의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백백의의··· 주문을 외면 무병장수한다 △물 심판 후 교주가 왕이 되면 헌금액에 따라 관직을 준다는 말로 교세를 확장했다 합니다.

백백교가 만들어진 때는 일제 치하였어요. 20여년 이상을 식민지배를 받으며 살던 희망없는 국민들에게 폐쇄적 사이비 조직은 ‘전쟁’의 공포와 심판의 두려움을 주고 그에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벼슬’을 보장하며 ‘가짜 희망’을 안겨 준 겁니다. 백백교에 들어온 사람들을 상대로 전 교주는 황제와 같이 군림하고 시민들의 삶은 황폐하게 만들며 살인·축첩 등을 일삼은 최악의 사이비 교주였습니다. 백백교 사건은 1978년 11월 18일 가이아나 존스타운의 ‘인민사원 집단 자살’ 사건 이전에 발생한 최악의 사이비 종교 참사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