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계보8] 너 피가름? 나 목가름! - 황국주(1909년~1952년)

새 예루살렘 간다며··· 머리도 예수, 피도 예수, 마음도 예수

2019-07-05     정윤석

(가장 하단에 강의용 피피티를 첨부했습니다. 첨부한 모든 피피티는 2019파워포인트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모핑'기능이 탑재돼 있습니다: 유료회원 전용)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예수로 살기’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CCM노래도 나왔습니다.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예수님을 따른다, 예수님을 닮아간다, 예수(은혜)로 산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리라 생각합니다. 그걸 시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는 말을 내가 곧 예수‘화’된다는 의미로 변질시켜 사용한다면 큰 문제가 되겠습니다.

자신을 예수화한 사람들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예수로 살든, 예수를 닮아가든, 예수를 좇든, 본질적으로 악한 게 인간인가 봅니다. 아무튼 8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이단계보 중에 황국주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독창적 표현을 합니다. 정득은(1897~?)이 ‘죄가 없는 구원자의 깨끗한 피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며 피갈음을 실천하며 도덕적 문제를 일으켰다면 황국주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갑니다.

그가 주장한 건 ‘목갈음’이었습니다. 1930년대 초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기도 중에 자기 목이 떼어져 나가고 예수의 목이 자기의 목에 붙고 자기의 몸의 피와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워졌다는 겁니다. 당시 피갈음을 얘기하던 사람들 속에서 황국주의 주장은 훨씬 원초적이고 자극적으로 들렸을 듯합니다. 목갈음을 얘기하며 황은 예수 모습을 흉내 내고 다녔습니다. 

▲ 이단계보에 대해 잘 설명한 서적들

“황해도 황국주란 30세의 청년이 백일 기도 중 머리를 길러 내리우고 수염을 기르니 그 풍채가 예수의 그림과 비슷하여졌다. 그 모양으로 교회에 나타나서 ‘내가 기도 중에 예수가 내 목을 떼고 예수의 머리로 가라 부치어 머리도 예수의 머리, 피도 예수의 피, 마음도 예수의 마음, 이적도 예수의 이적, 전부 예수화하였다’는 것이다.”(김인서, <신앙생활> 1955년 9, 10, 11월 합병호, 21쪽; 국제종교문제연구소, <한국의 종교단체 실태조사연구>, 2000년, 31쪽 재인용).

예수 같은 모습(?)을 한 황국주가 새예루살렘(당시 평양)을 찾아간다고 하자 가정을 버리고 따르는 여성들만 60여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소위 ‘예수 살기’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도하며 환상 중에 자신의 목이 예수의 목으로 교체되는 체험을 했다는 사람입니다. 목갈음의 황국주는 얼마나 예수처럼 살았을까요?

평양을 새예루살렘이라며 활동하거나 서울 종로에서 활동하다가 자신을 수행하는 여성을 추행하고, 또다른 여성과 7계를 범했다가 서울의 삼각산으로 옮겨 기도원을 세우고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는 곧 삼각산에 기도원을 세우고 목가름이나 피가름을 교리나 실제로 가르쳤으며 이 가름의 과정을 영체 교환으로 실현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혼음이었다. ···그가 자기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해서 예수화를 표방하고 윤리적 완전을 자처한 점은 기성교회의 단죄를 면할 수 없었다. 1933년 평안도의 안주노회가 황국주를 비롯해서 유명화 등을 ‘위험한 이단'이라 정죄하여 그들의 부흥회 초빙을 금지했고 같은 해 가을의 총회도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 난세에는 훌륭한 신앙도 나타나지만 해괴한 신앙도 솟는 것이다.”(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6, 446~447쪽).

“황국주 씨가 말하기를 자신은 예수화하였기에 자기와 육적으로 접촉하면 그에게 예수의 피가 생긴다는 것이요, 영적으로 합일이 되면 예수의 영이 있게 된다는 것이요, 그리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는다는 것이다.”(박영관, <이단종파비판 2권>, 서울: 예수교문서선교회, 1999, 71쪽).

황에게 도덕적 문제를 지적하면 “‘우리들은 요단강을 건너와서 남녀간의 성문제는 초월했다’고 큰소리를 쳤다”(김선환, <사회악과 사교운동>, 서울 기문사, 1957, 165쪽; 박영관 위의 책 72쪽)고 합니다. 이런 황국주와 함께 이름이 나오는 사람이 이용도입니다. 이용도는 ‘친림’의 유명화를 말할 때도 등장했죠. 백남주를 언급할 때도 이용도는 빠지지 않습니다. 황국주가 1933년 5월 <영계>라는 잡지를 만들 때 이용도는 축사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박영관은 “그들은 비록 독자적인 신앙노선을 걷고 있었으나,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은 같았고 자기들의 집단 형성에는 똑같았다”고 표현합니다(박영관, 위의 책 73쪽).

요즘 예수‘로’ 산다는 말이 주변에서 많이 들립니다. ‘~로’는 여러 의미로 사용되지만 지위, 신분, 자격을 나타내는 조사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예수로 산다’, ‘예수로 살기’라는 용어는 신화사상과도 쉽게 접목되는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예수회 사제임에도 많은 개신교인들, 특히 복음주의권에 영향을 미치며 설교 강단에서도 곧잘 언급되는 헨리나우웬은 “영적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8쪽)고 말했습니다. 이런 신화사상은 우리들 주변에 알게 모르게 퍼져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는 <직설>이란 책에서 로마서 12장 1절~3절을 해설하며 “완벽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 분의 뒤나 쫓아가라는 것이지요”(72쪽)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되려고 하지 말고 요샛말로 주제 파악하고 아닥하고 예수를 좇으라는 겁니다. 어설프게 예수로 살고, 그러다가 착각에 빠져 자신이 예수인 줄 알다가, 그러다가 황국주같은 교주가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황국주는 1952년 가을, 대구에서 여자 둘을 첩으로 데리고 술장사를 하다가 사망했다고 합니다(국제종교문제연구소, <한국의 종교단체 실태조사연구>, 2000년, 35쪽).

문: 아무리 1930년대이지만 ‘목갈음’이 믿어졌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답: 자극은 강해질수록 무감각해집니다. 그래서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지요. 1930년대 초반에는 김성도의 피갈음 등 문제의 주장이 제기되던 때입니다. 이럴 때 황국주가 들고 나온 게 목갈음입니다. 피갈음을 들어 본 사람 입장에서는 목갈음은 새로운 자극이 될 수도 있지요. 황국주가 목갈음을 주장할 때 근거는 자신이 본 환상이었어요. 신비체험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그게 믿어졌을 수도 있어요. 우리 신앙의 기초, 다시 한 번 어디에 뿌리 내리고 있는지 되새겨봐야 합니다.

제가 2006년 2월, 경기도 분당에서 A목사의 집회를 취재할 때였습니다. 소리치고 쓰러지고 뒹구는 중에 가장 열광적으로 집회에 참석했던 신도가 있었어요. 그리고 3년이 지났습니다. 전남 광주에서 극단적 신비주의 행각을 하는 B목사의 집회가 있어서 취재를 갔습니다. 집회장소에 어디서 눈에 익은 신도가 보이는 거예요. 기억을 더듬어 보니 경기도 분당에서 봤던 그 신도였던 거죠. 서로 다른 사람의 집회였는데 분당에서 봤던 그 신도가 광주까지 와 있는 거예요. 역시 광주에서도 가장 열성적으로 집회에 참석하고 있더군요. 드럼 스틱을 던지면 그게 모세의 능력을 주는 지팡이라고 하면서 던져주면 받고 쓰러지고 뒹구는 집회였어요.

그 신도가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딘가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근본없이 떠도는 부초처럼 보였거든요. 그런데 그걸 보면서 또한가지 생각이 스쳤어요. 자극은 또다른 자극을 추구한다는 거였어요. 자극에 익숙해지면 무감각해지죠. 그래서 또다른 자극을 원하는 것, 신비주의, 체험에 기초한 신앙은 그래서 부초와 같아요. 그러다가 황국주 같은 이상한 사람을 만나는 건, 비단 80년 전의 일만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