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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 저주 퍼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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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 저주 퍼레이드
  • 정윤석
  • 승인 2009.01.07 0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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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는 종교성을 가진 인간 사회에서 태고 적부터 있었던 행위 같습니다.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는 악한 마음은 타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고 복이 임하기를 바라는 선한 마음만큼이나 역사가 깊습니다.

성경상에서 의인 노아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자녀 함을 저주합니다. 성경을 벗어나면 저주에 관한 일화는 더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저주인형’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어떤 인형에 내가 저주하고 싶은 상대의 이름을 쓰거나 부르면서 그 인형을 바늘로 찌르는 방법입니다. 언급하기 싫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는지는 네이버에서 ‘저주인형’이라고 검색어만 치면 바로 알게 되실 겁니다. 섬뜩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하면 상대에게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으스스하지 않습니까? ㅎㅎ···.

▲ 왕궁에서는 짚인형을 바늘로 찌르며 저주하는 경우가 있었다(사진은 드라마의 한 장면)
저주를 받으면 두려워지는 게 인지상정이죠. 저주가 두려운 사람들 중 이단에 속한 사람들을 빼놓아서는 안될 겁니다. 이단들의 교주는 ‘저주의 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다는 말이 가장 대표적인 저주일 겁니다. 이런 저주를 받으면 두려움이 생기고 이 두려움 때문에 오늘도 이단 단체에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곳을 떠나면 지옥갈까봐. 성령을 훼방하게 될까봐. 교통사고를 당할까봐. 암으로 죽게 될까봐. 자녀들에게까지 몇 대에 걸쳐 저주가 미칠까봐 이단단체를 못 나오고 숨죽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주의 파괴력 때문이겠죠.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를 걱정해서였습니다. “정 기자님, 몸 조심하시구요. 그리고 기도 많이 해야겠어요. 저도 기도해 드릴게요.” 이단 취재를 10여 년 이상 해왔기에 이단단체로부터 협박과 고소·고발은 물론 상대들로부터 ‘저주’를 당한다는 것을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이 말을 이었습니다. “정 기자님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그것에 대해 대적하는 기도를 하셔야 영향을 받지 않을 겁니다.” 지인의 염려가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를 저주할 사람이 적지 않겠구나. 그렇다면 그런 저주로 나는 축복받지 못한 인생을 살게 될까?’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습니다. 사실 저를 상대로 직접 저주를 퍼부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 목회자가 암암리에 자신을 신격화했음을 입증하는 테이프가 입수됐습니다. 그걸 폭로하는 기사를 교계 최초로 썼을 때 상대 단체의 반응이 가관이었습니다. 많은 아줌마 신도들이 전화로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 경험은 전무후무했고, 한국 말에 그렇게 많은 욕이 있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고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그렇게까지 저주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 아줌마들을 고소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들의 삶이 척박한 것을 잘 알기에 그냥 넘어간 적도 있었죠.

그리고 최근에 협박과 더불어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거다!!!” 모 단체를 취재한 후 그 곳에 소속한 목회자라는 사람이 악에 바친 목소리로 저를 저주하더군요. 이렇게 대놓고 저주한 사람뿐이겠습니까.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가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를 저주했을까요? 제가 취재한 단체 중 이단성 있는 곳이 많았고 그 단체의 실체를 보여 주기 위해 저는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 단체 입장에서는 저의 기사를 보고는 ‘사기꾼이다’, ‘말도 안된다’, ‘문제점만 딱 짤라서 왜곡보도를 했다’ 등 저에 대해 극한 분노만을 드러내더군요. 심지어 제가 쓴 기사 때문에 직접 저를 죽여 버리려고 했다고 말한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두려워할 법도 합니다. 가끔 저는 저를 상대로 누군가 ‘저주를 퍼붓는 기도를 할 수 있겠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래도 제가 지금 마음 평안히 취재 현장을 누비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저주를 내리는 주체 때문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저주한다고 그 사람이 저주를 받게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 일어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다고 우리는 곧잘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두려워할 분은 모든 축복과 저주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저주에서 해방됐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저주는 저를 압박하지 못합니다. 제겐 그 믿음이 있습니다.

둘째, 인간은 어차피 한번 죽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저주가 아닌 또 다른 생명으로 가는 관문입니다. 그래서 취재를 당한 대상자들이 저를 저주하거나 ‘교통사고로 죽을 거다’라거나 ‘암으로 죽을 것이다’는 말을 해도 저는 별로 그 말이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한번 죽는건데 그게 두려워할 일이 되는 겁니까? 그리고 설령 그렇게 죽게 된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가 아닐뿐더러 기자의 자격조차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저주가 저를 위축시키지 못합니다.

셋째,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복의 근원이기에 아브라함을 위해 복을 빌면 복을 받고 저주를 빌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나님은 가슴 떨리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자손이기에 아브라함이 받을 유업을 그대로 이어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축복의 근원이 됩니다. 따라서 누군가 나를 저주하면 그 저주는 그 사람의 몫이 될 겁니다.

물론 저를 저주하던 어떤 목회자(?)의 목소리가 제 귀에 생생하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어찌 한 조각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선악간에, 축복과 저주간에 판단하시는 분은 그 목회자가 아니라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믿음 때문에 저는 오늘도 마음이 평안합니다.

윤동주 님의 서시가 참 좋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그렇습니다. 온갖 저주와 협박 가운데도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걸어가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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