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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도 내 고향 북한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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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도 내 고향 북한을 사랑해요"
  • 정윤석
  • 승인 2007.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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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 한세대 교수

김철웅 교수(한세대학교, 33)는 한 때 김일성·김정일에게 영광 돌리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라고 말해왔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대한민국으로 넘어와 하나님만이 내 삶의 주인이라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모했다. 그는 요즘 가는 곳마다 ‘북한 사랑’을 외치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음악가로서의 김 교수의 이력은 화려하다. 북한에서 소위 ‘상위 1%’에 들어가는 고위층 가정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전국 6천명의 지원자 중 9명을 뽑는 평양음악무용대학을 8살에 입학해 14년 동안 공부했다.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고급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대학 교수였다. 이때만 해도 평양은 그에게 있어서 행복의 발원지였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그곳은 최고의 도시였다.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후 러시아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입상했다. 이는 아시아인으로는 지휘자 정명훈 씨 이후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소감을 물었다. 그는 답했다.
“김정일 동지께 입상으로 큰 기쁨을 드릴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
그에게 기쁨은 ‘김정일 동지께 영광 돌리는 것’, 슬픔은 ‘그에게 더 큰 기쁨을 드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차이코프스키국립음악원에 들어가 유학을 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그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는 사건이 한 커피숍에서 일어난다. 러시아 유학 도중 학교 앞의 작은 커피숍에 갔다. 커피숍에서 나오는 피아노 곡이 너무 좋았다. 주인을 불러 무슨 곡인지 물었다. 주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곡이 나온 지가 언젠데, 또 당신은 음악대학 학생 같은데 이 유명한 곡을 모르는가?” 얼굴이 빨개져 오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말했다. “무슨 곳인지 모르겠다. 누구의 곡인가?”
“이 곡은 ‘리처드 클래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다.”
김 교수는 말한다.
“이 음악이 도대체 어떤 쟝르냐고 물어보니까 재즈라는 거였어요. 재즈란, 북한에서는 자본주의가 생산해 낸 가장 퇴폐적인 문화의 산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경악을 했어요. 내가 알고 있던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재즈와는 너무도 다른 아름다운 멜로디였던 것이죠. 그 이후로 저의 가치관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유학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왔다. 평양 국민교향악단 수석 피아니스트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정부 차관급 대우였다. 하지만 모든 게 싫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이곳이 천국이었지만 알고 나니까 이곳 같은 지옥이 없었다. 탈북을 결심했다. 오로지 하고 싶은 음악을 좇아 모든 것을 버리고 2001년 그는 탈북을 결행한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탈북자 생활과 강제 북송, 재탈출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어머니가 숨겨둔 돈을 훔쳐서 국경경비대에 주고 나왔어요. 두만강을 넘으니 새벽 3시가 됐습니다. 조선족 마을에 도착해 먹고 살기 위해 죽도록 일을 했어요. 음악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습니다. 힘든 생활 가운데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어요. 종교는 마약이라고 배웠던 저였어요. 교회를 가고 싶지가 않았죠. 그러나 탈북 후의 생활이 너무 힘들어 처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어요.”

우연히 참석한 부흥회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된다. 중국에선 피아노 반주자들이 귀했다. 이를 계기로 부흥사들은 김 교수를 전속 피아노 반주자로 삼아 다니게 됐다.

“제가 원래 자유분방한 사람이에요. 한데 피아노나 음악에 관해서라면 달라져요. 교회는 피아노 치려고 탈북한 제게 피아노를 치도록 해준 곳이었어요.”

이 과정에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베이징 공항과 몽골에서 위조여권문제로 걸려 17시간 고문을 당하고 북한으로 송환됐다 기적적으로 풀려 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는 ‘하나님, 살려 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 잘못했습니다’는 기도가 나오더라”며 “‘한번만 용서하고 도와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나님이 경청하고 살려 주셨다”고 고백한다. 그는 요즘 가는 곳마다 한국교회의 ‘북한 사랑’을 외치고 있다.

“저는 이제 자유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어요. 그러나 아직 북한을 사랑해요. 저의 어린 시절이 깃들어 있는 땅이에요. 함께 자랐던 형제들이 아직 그곳에 살고 있어요. 그 땅을 위해 기도하는 한국교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2004년 9월부터 한세대에서 음대 교수로 일하고 있는 그는 간증을 하는 곳마다 ‘아리랑’을 연주한다. 한민족이 하나되는 그 날을 염원하는 마음을 피아노에 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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