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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크리스천 외교관이란 사실 한시도 안 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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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크리스천 외교관이란 사실 한시도 안 잊어"
  • 정윤석
  • 승인 2007.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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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헌 함경북도지사…"탈북자 선교 없이 북한선교 없다"

신효헌 도지사(67, 서울 영암교회, 함경북도지사)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늘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가운데 살아온 삶이라고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어려운 순간순간마다 개입하셔서 너무도 평탄히 살아왔다는 것이다. 함경북도가 고향인 그는 소위 백도 없었고, 편모 슬하에서 자라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려울 때마다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하면 들어주시는 자상한 분이다. 신 도지사는 이 비결을 20대 시절 군대에서 배웠다.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내가 성공하려면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이 나를 ‘공부벌레’로 만들었다. 그 덕에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를 각각 졸업할 수 있었다. 학교 다닐 때 꿈은 행정고시에 합격해 사회에서 떳떳이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낭만같은 것하고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 밤낮없이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다. 그러나 대학 4년을 졸업할 때까지 고시에 합격하지 못했다. 시험을 볼 때마다 줄줄이 낙방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친구들은 관계로, 금융계로, 혹은 군장교로, 대기업으로 각자 제 갈 길을 갔다. 그러나 오로지 고시준비라는 외길을 걸었던 나는 졸업 후 무직자로서 초라한 모습에 서글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가 1964년이었다. 1년 동안 백수로 지내기도 했다. 유난히 자아가 강하고 실패의 경험도 없었고 남들보다 뒤떨어진 적이 없다고 생각한 그였기에 이런 시간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군대였다. 병역의무를 마치기 위해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훈련병 시절, 고된 훈련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 자신을 바라보면서 신 도지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때부터 교회에 나가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신 도지사는 “기독교인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기는 했으나 그때까지 하나님을 관념적인 존재로서 거리감을 갖고 인식하기만 했다”며 “내가 드디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논산훈련소내 군인교회의 마루 바닥에 엎드려 처음으로 눈물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신 도지사는 “직업을 주시면 평생을 올바른 십일조를 드리고 그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렸다고 말한다. 군대를 제대한 후 우연히 그는 외무고시에 응시했다. 정말 우연이었다. 외교관이 뭐하는 직업인지도 알지 못하던 때였다. 영어도 약했고 공부하던 행정고시와는 시험 과목도 완전히 달랐다.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말 아는 문제만 나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부 많이 한 사람도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못 푼다. 나처럼 공부가 부족한 사람도 아는 것만 나오니, 공부한 문제만 나오니 합격하게 된 것이다. 정말 기적이었다.”

1968년의 일이었다. 신 도지사는 당시 외무고시 1기 합격생이 된다. 남모를 고민이 시작됐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기적을 베풀어 주셨을까?’ 이 때 신 도지사의 마음에 군대 시절 당시 기도했던 내용들이 생각났다. 직업을 주시면 평생을 주님께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외무고시에 합격한 데 대해 신 도지사는 ‘예수 믿는 외교관이 필요하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로 인해 신 도지사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활용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처럼 살겠다는 삶의 방향과 목적을 잡았다. 외교관 일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거기에 덧붙여 해외에 체류하면서 선교사로서 삶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이후 2003년 아르헨티나 대사관 대사를 끝으로 퇴임할 때까지 35년간 신 도지사는 크리스천 외교관으로서의 삶을 하나님께 바쳐왔다. 외교관은 그 활동무대가 전 세계에 걸쳐 있으니 크리스천 외교관의 사명은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것이다.

국내 외교통상부에 근무할 때는 외무부선교회를 만들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외무 공무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룹이다. 신 도지사는 “외무부에서 이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외무부 선교회’를 중심으로 힘을 합쳐 일을 하는 외교관이 수백 명이다”라며 “이렇게 훈련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해외에 나가면 한인교회가 없는 곳에서는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공부를 지도하며, 또한 우리 선교사들을 지원하기 위한 선교후원회를 조직하는 평신도 선교사가 된다”고 강조한다.

신 도지사 스스로가 외교관으로서 호주, 스위스, 파푸아 뉴기니, 아르헨티나, 인도네시아 등 다양한 나라를 거쳤다. 그는 “한시도 내가 크리스천 외교관이라는 사실을 잊어 본 적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성경공부 모임이 태동됐다. 해외에 외교관으로 나갔을 때는 늘 선교사를 돕는 일을 했다. 스위스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할 당시에는 한인교회가 없었다. 한국에서 설교 테이프를 공수해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했다. 이 성경공부 그룹이 나중에는 제네바 한인교회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파푸아뉴기니에 발령 나갔을 때는 한인교회가 없어서 신 도지사의 사택에서 교인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할 때는 선교사를 돕는 모임을 만들었다. 인선회였다. 이곳에서 신앙의 동지인 박용국 장로(온누리교회)를 만나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고 선교사를 도왔다. 지금도 이 단체는 ‘인선회’라는 모임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근로자들을 훈련시켜 현지로 파송하는 방법의 선교를 지향하고 있다.

   ▲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위치한 이북5도청사 건물
신 도지사는 2003년 퇴임한 후에도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계속해서 주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이북5도청사의 함경북도지사로 작년에 임명받았다. 이제 그의 할 일은 정해졌다. ‘새터민(탈북자)들을 돕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신 도지사는 “현재의 새터민들에 대한 복음화는 통일 이후 시대 북한 주민 복음화의 시험대다”고 말한다.

“탈북자들에 대한 사랑이 필요한 때다. 남한 사람들은 새터민들에 대해 불청객처럼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그 사람들에게 냉담한게 현실이다. 한국의 5만 교회가 1만 명의 새터민들을 품어야 한다. 5개 교회가 1명씩만 도와주자. 이미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들 탐내지 말고 새터민들에게 그리스도를 심고 사랑으로 그 마음을 녹이면 된다. 복음과 빵을 함께 주자. 크리스천 사업가들이 그들에게 일터를 주고 먹고 살게 해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탈북자 1만 명에 대한 선교없이 북한선교는 없다. 새터민들에 대한 복음화없이 통일 이후의 선교도 없다.”

신 도지사가 마음에 품고 새기는 말씀은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이다. 크리스천들에게 할 일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입을 벌려 말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도 “예수 믿으라는 것”이라고 그는 주저없이 말한다.

“내가 ‘뭘 하며 사느냐’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이 자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왜 그 직위를 주고, 왜 그 일을 주셨겠습니까? 내가 있는 모든 장소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복음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신 도지사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1941년 출생했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거쳐 1968년 외무고시 1기에 합격하면서 외교통상부 국제법규과 과장, 주 시카고 총영사관, 주가나 대사관 대사, 주 호주 대사관 대사, 주 아르헨티나 대사관 대사 등을 거쳐 2006년 제 13대 함경북도 도지사로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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