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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간 개혁자 칼뱅의 생애
정윤석  |  unique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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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21  14:2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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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자 칼빈의 생애를 주제로 강연하는 정성욱 교수(덴버신학교)

에꿈선교회(대표 이성헌 목사)가 생수교회(김성현 목사)에서 2017년 7월 18일 ‘종교개혁 500주년에 루터와 칼뱅을 만나다’를 주제로 특별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다음은 정성욱 교수가 '개혁자 칼빈의 생애'라는 내용으로 발제한 것을 기자가 재정리한 글입니다. 해당 강좌는 동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편집자주, 해당 영상 바로가기)

칼뱅은 자기의 묘비에 이름을 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칼뱅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보통의 영성이 아니었다. 웬만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남기려 한다. ~기념 예배당, ~기념 장학금, ~기념 등등 사람의 이름을 내는 경우가 많다. 칼뱅은 묘비명에 이름을 남기지 말라고 했다. 자신을 높이거나 기리거나 자신을 예찬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메시지다. 루터의 거지의 영성, 칼뱅의 무명의 영성이 한국교회에 필요하다. 오히려 무명하기를 선택하고 찾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루터는 위대한 개혁자였지만 스스로를 ‘거지’로 칭했다. 그런 영성이 있기에 하나님이 쓰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쓰셨기 때문에 그런 영성을 가진 것이라 생각한다.

칼뱅의 교회사적 의의부터 살펴보자. 어떤 의미에서 그는 중요한 인물일까? 그는 2세대 종교개혁자였다. 루터와는 나이 차이가 26년 난다. 만일 25세에 결혼했다고 치면 루터는 칼뱅의 아빠뻘이 되는 사람이다. 칼뱅은 2세대 종교개혁자다. 1세대 종교개혁자와 2세대의 종교개혁은 색깔이 다를 수밖에 없다. 루터는 역동적이었다. 생명의 위협과 파문의 결정 앞에서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재판을 받았다. 개혁자로서 선구자로서 장애물을 뚫고 나갔다. 칼뱅도 고난을 받았다. 생명의 위협도 있었다. 그럼에도 루터에 비하면 칼뱅의 생애는 덜 드라마틱했다.

그의 본거지는 스위스의 제네바였다. 여기서 종교개혁을 일으킨다. 그는 종교개혁의 완성자로 불린다. 루터가 시작했고 칼뱅이 완성했다. 나는 이 시각이 적절하다고 본다. 종교개혁의 체계를 수립한 자라고도 칭한다. 종교개혁의 신학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칼뱅의 기독교강요는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 못 읽은 분이라도 1~4권 앞부분까지는 자세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안에 개신교회의 신학의 뼈대가 들어있다. 20세기와 21세기 복음주의 신학을 한다고 해도 칼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상세하게 들어가서 성경신학, 해석학의 발전에 의해 좀더 상세한 부분에 있어서 교리적으로 더 정교해졌지만 큰 뼈대로 보면 칼뱅의 체계가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고 보면 분명하다. 큰 체계에 있어선 큰 변동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 다음에 칼뱅은 개혁 신학의 토대를 놓은 자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칼뱅은 개혁신학의 아버지라고 했다. 칼뱅과 더불어 동시대에 개혁신앙을 일궜던 개혁 신학자들이 있었던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더라도 칼뱅의 신학이 개혁주의의 중심을 놓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신학을 했던 탑 10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사람마다 리스트가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초대교회 시대에 이레니우스, 아타나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중세교회의 안셀름, 아퀴나스,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 칼뱅, 쯔빙글리, 조나단 에드워즈, 칼 바르트(또는 C.S. 루이스)를 꼽는다. 이 열 명 중에서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신학자가 누구인가 3명을 꼽는다면 사람들은 루터와 칼뱅과 에드워즈를 꼽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교회가 칼뱅에 대해 정확히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을 보자.

1509년 깔뱅은 프랑스의 노용이란 도시에서 태어난다. 노용은 파리에서 100km 떨어진 파리 교외에 위치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평민으로서 시청서기와 교구서기를 거쳐 귀족으로 신분상승을 한 사람이다. 오늘날로 보면 공무원이다. 루터도 가난한 집안은 아니었듯이 칼뱅도 중산층 정도가 된다. 어머니는 칼뱅이 어릴 때 별세한다. 어린 시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 자체가 성품과 인격 형성에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분을 두고 칼뱅이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시켰다는 등 칼뱅에 대한 비난이 인터넷에 낭자한다. 제네바의 흡혈귀, 어떤 사람은 제네바의 독재자, 철인 통치자라고 하면서 살인자, 칼뱅에 대한 온갖 비난과 비판이 인터넷에 도배가 되고 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전혀 연구하지 않고, 칼뱅이 종교개혁을 하는 동안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강요했다든가, 앞서서 화형을 주도했다, 그런 식으로 쓰면서 칼뱅을 욕하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알면,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칼뱅이 주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때는 제네바 시의 시의회가 있었고 시의회에서 이단자에 대한 처형이 결정됐다.

당시 시의회와 칼뱅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았다. 시의회와 칼뱅은 긴장관계에 있었다. 여전히 이단자들에 대해 처형하는 것은 교회에 결정 권한이 있는 게 아니라 시의회에 있었다. 칼뱅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세르베투스가 이단이니, 그를 처형하는 것은 시의회의 결정이었다. 칼뱅은 ‘그를 어차피 죽일 거라면 화형은 너무한다. 교수형이 낫지 않느냐’라고 탄원을 했다. 그럼에도 칼뱅이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주도했다는 식의 인신모독적 비난은 근거가 희박하다.

1523년, 14살 때 칼뱅은 파리로 유학을 간다. 이때 주교의 후원을 얻어 성당 신부에게 지원되는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를 한다. 뭐를 알 수 있나? 아직까지 칼뱅의 이 상황은 로마 가톨릭의 가장 충실한 신앙인이라는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는 몽테규 대학에서 엄격한 학업 훈련을 받는다. 당시 입시제도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마치 고3 학생처럼 학업에 전념했다고 보면 된다. 14세~19세(1528년) 동안 종교개혁의 새로운 사상을 접한다. 루터의 개혁이 긴박하게 진행되는 시기이면서 칼뱅은 루터의 신학적 소논문, 종교개혁적 신앙과 신학을 담은 주옥과 같은 저작들에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어느새 독일에서 파리로 유입됐던 것이다. 루터의 소논문이 어떻게 기록됐을까?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읽혀졌을까? 1450년경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술이 발명됐다. 활자 인쇄술을 통해 자기의 사상을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장 짧은 시간에 전달한 사람이 루터다.

서구 지성사회에선 이런 연구가 있다. 서구 역사상 어떤 사람이 가장 인쇄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는가? 오늘날은 스마트폰/ SNS가 있는데 지구 어디서든 연결된다. 내가 덴버에 사는데 한국에서 카톡이 날아온다. 웬만하건 인터넷에 다 나온다. 오늘날 과학기술을 통해 신학사상이 많은 사람에게 전파된 것처럼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는 인쇄술이 최고의 기술이다. 루터의 소논문이 비텐베르크 성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14~19세까지 파리대학에서 공부한 칼뱅의 손에까지 전달된다.

1528년, 칼뱅은 오를레앙으로 가서 법학을 공부한다. 아버지의 권유였다. 루터는 처음부터 성직자를 꿈꾸면서 성직으로 가려고 한다. 그것을 아버지가 막아서 법을 공부하는 방향으로 갔는데 칼뱅도 아버지가 나중에 권유를 해서 법을 공부한다. ‘너는 법을 공부해라. 그것을 통해 세상적 꿈을 꾸고 명예를 찾고 세상에서의 번영을 추구하라’는 권유를 받아 법을 공부한다. 처음에 사제가 되기를 원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권유로 법을 공부한다. 여기서 하루 4시간만 자면서 무리한 공부를 하면서 칼뱅은 건강을 해치게 된다. 하루 4시간만 자면서 공부를 했다니 얼마나 연구에 집중했는지 알 수 있다. 1531년엔 칼뱅의 아버지가 별세한다.

북유럽에서 일어났던 휴머니스트 운동의 중심에서 칼뱅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게 된다. 르네상스는 재생, 재흥한다는 의미다. 고대 문화, 고대 그리스 문화와 예술을 재흥시키자는 게 르네상스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라틴어뿐 아니라 헬라어로 돌아가야 한다, 고전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뿌리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던 시대였다. 르네상스가 북유럽으로 옮겨가면서 르네상스는 휴머니즘으로 뿌리를 내린다. 휴머니스트들은 자기의 생각을 어떻게 하면 수사학적으로 표현해서 전달할 것인가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법학을 공부하고 휴머니즘 운동을 접하면서 칼뱅은 1531년, 1532년 크리스천 휴머니스트로서의 커리어를 쌓게 된다. 종교개혁 사상으로는 루터를 경험하지만 휴머니즘적 차원에서는 에라스무스를 경험하게 된다. 에라스무스는 천주교의 내부를 개혁하고자 하던 사람이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의 논쟁에서 의지의 자유, 의지의 속박 논쟁을 하게 된다. 그 논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에라스무스는 휴머니즘의 대표자였다면, 루터는 종교개혁의 대표자였는데 칼뱅은 두가지가 다 익숙한 학자였다. 칼뱅의 신학사상은 루터에게서 엄청나게 많이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을 소통하는 데 있어서는 휴머니스트적인, 수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그 수사학적 방법에 있어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모토는 ‘짧고 분명하게’였다. 그래서 칼뱅은 신학적 사변을 싫어한 신학자였다. 신학적 사변을 거부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신학적 사변에 대해 경고한 자였다. 신학자의 미덕은 짧게 쓰는 것이다고 생각했다. 짧고 분명하게 쓰라는 게 칼뱅의 모토였다. 이게 칼뱅의 휴머니즘적 배경에서 나왔다.

당시 수사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아, 다른 게 없다. 말을 많이 꾸면서 만연체로 한다고 진리가 전달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선 짧고 분명하게 써야 한다’고 칼뱅은 강조했다. 그런 기독교 휴머니스트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그 정점에서 1532년, 그의 나이 23살에 세네카라는 라틴 철학가의 관용론에 대한 주해를 쓴다. 1532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로마의 황제 네로가 무참하게 박해하자 네로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쓴 것이 세네카의 관용론이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해야 한다는 게 세네카의 주장이었다. 칼뱅이 이 관용론의 주해서를 쓴 것은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해 의분을 품고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칼뱅이 이 책을 출판할 때까지는 아직 종교개혁자는 아니었다. 칼뱅은 종교개혁 사상을 갖고 있으면서 법학자이자 휴머니스트로서 활동하게 된다.

1533년 굉장히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 종교개혁 사상을 접해 오다가 이때 정말로 칼뱅은 개신교로 회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칼뱅의 개종에 대해서는 사실 자세한 이야기가 없다. 칼뱅의 회심은 성 어거스틴, 루터의 회심과 같이 자세하고 극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시편 주석에서 ‘뜻밖의 회심’이란 말을 쓴다. 오랜 동안 완악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온순하게 길들였다는 글을 남긴다. 1533년 11월 1일 파리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는 콥의 연설문을 칼뱅이 작성하게 된다. 이 연설의 제목이 ‘기독교의 철학’이란 제목이었다. 루터가 주장한 것처럼 복음과 율법을 비교해서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했다.

루터의 사상이었고 이게 오직 은혜의 복음이었다. 오직 은혜의 복음을 파리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는 니콜라스 콥이란 사람이 기독교 철학이란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복음을 연설한 것이다. 파리대학이 어떤 대학인가? 중세 로마가톨릭 신학의 본산이었다. 그곳에서 지금 총장으로 취임하는 사람이 칼뱅과 마찬가지로 복음적인 신학 사상을 갖고 있다가 취임현장에서 은혜의 복음이 절대 진리라고 발표한 것이다. 이후 비난과 핍박이 가해졌다.

콥은 총장 취임도 못해보고 도망치게 된다. 신앙의 절개가 대단했다. 콥은 바젤로 피신했고 칼뱅도 파리에서 400KM 떨어진 친구의 집으로 도망가는 데 이곳에 4000여 권의 장서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칼뱅은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연구에 전념하며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인 ‘기독교강요’라는 대저작의 체계를 세웠던 것이다.

1533년 기독교강요 초판과 제네바에서의 1차 개혁이 일어난다. 25살에 로마 가톨릭교회와 공식적인 결별을 한다. 그해 10월 개신교인들을 비난하는 삐라가 프랑스 전역에 살포되면서 결국 칼뱅은 망명자가 돼 고국 프랑스를 떠나게 된다. 칼뱅은 프랑스를 떠나서 다른 외국으로 망명하는 상황이 된다. 1536년 3월에 기독교 강요의 초판이 발행된다. 1536년경 칼뱅은 원래 가려고 했던 스트라스부르그(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에 위치한 도시)로 가려다가 여기서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제네바로 우회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하던 사람이 귀욤 파렐이었다. 파렐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혁 운동을 했던 쯔빙글리와 루터의 양쪽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파렐은 칼뱅이 제네바에 들러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파렐은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신 여기서 남으십시오. 나와 개혁 운동을 합시다.” 단순히 권유가 아니었다.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로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시편 주석 서문).

당신의 안전을 위해 다른 도시로 간다면, 제네바의 개혁 운동에 참여치 않고 당신의 안위를 찾으려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파렐의 강권으로 칼뱅은 제네바에 남게 된다.

칼뱅은 프랑스 사람인데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펼치는 거였다. 제네바 지역 사회에서 뼈대가 굵어진, 뿌리가 깊은 가문들이 있을 거 아닌가. 그 가문을 중심으로 시의회가 구성됐다. 시의회가 볼 때 칼뱅과 파렐의 개혁 운동이 급진적으로 보였다. 1538년 그 둘은 제네바에서 추방을 당해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그로 간다. 스트라스브르그는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에 속하는 도시였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마르틴 부처가 개혁운동을 하고 있었다. 부처가 사실은 루터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부처가 개혁운동을 하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칼뱅은 불어권 사람들을 상대로 목회하는 목회자가 된다. 스트라스부르그는 독일어, 프랑스어가 통하는 동네였다. 여기서 칼뱅은 프랑스 출신 신앙인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3년 동안 한다. 여기서 일을 하면서 마르틴 부처의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

1540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칼뱅의 로마서 주석이 출판된다. 칼빈의 로마서 주석은 짧다. 칼뱅의 신학적 모토가 짧고 간결하고 분명하게 쓰라는 것이었다. 현대 신학자들의 로마서 주석을 목회자들이 갖고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1천 페이지 나온다. 마르틴 부처의 로마서 주석도 엄청난 두께였다. 칼뱅은 부처의 1/3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짧게 썼다. 그런데도 칼뱅의 로마서 주석은 지금도 읽는다. 칼뱅은 사변을 싫어하고 분명하고 짧게 글을 쓰는 걸 좋아했다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

1540년 31세 때 두 아이를 가진 과부와 결혼을 한다. 칼뱅의 부인은 칼뱅의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복의 성품으로 죽을 때까지 칼뱅을 도왔다. 31세에 결혼한 것도 늦게 한 건데 결혼생활도 길지 않았다. 9년 정도 결혼생활을 하고 사별하니 칼뱅은 인생의 큰 슬픔과 고난을 겪은 사람이다.

1541년 칼뱅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간다. 시의회가 화해 제스처를 취하면서 제네바에서 칼뱅의 개혁 운동이 계속 된다. 그러나 긴장관계가 없어진 건 아니다. 칼뱅의 개혁 운동은 교리 개혁뿐 아니라 생활의 개혁을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시의회에 속한 사람들이 제네바 교회에서 요구했던 신앙의 잣대와 표준이 너무 높다며 반발했다. 제네바 개혁을 위한 14년간의 계속된 투쟁은 결국 칼뱅의 승리로 끝난다. 프랑스 위그노 운동이 칼뱅주의를 받아들였고 스코틀랜드는존 낙스에 의해 장로교 국가가 된다. 영국교회는 칼뱅주의 영향하에 39개의 신앙신조를 채택한다.

칼뱅의 종교개혁은 전 유럽으로 확산된다. 루터의 개혁이 독일과 북유럽에 영향을 줬지만, 루터파라는 흐름은 독일북부, 덴마크, 북유럽 정도에 한정된다. 그런데 칼뱅주의의 경우 거의 유럽 전역을 지배한다. 여러 국가들을 통해 칼뱅주의적인 개혁 신앙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헝가리, 폴란드, 이탈리아 북부도 개혁적 신앙이 강했다.

1542년에 칼뱅이 로마천주교 신학자인 알버트 피기우스에 대해 비판한다. 피기우스는 자유의지론을 강조했다. 재밌는 것은 이런 류의 논쟁이 신학사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어거스틴과 논쟁했던 펠라기우스, 루터와 논박했던 에라스무스, 칼뱅과 논쟁했던 사람이 피기우스였다. 칼뱅은 피기우스 자유의지론에 대해 반박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전적으로 죄에 노예가 됐다고 본 게 칼빈이었다.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느낌은 있지만 결국은 죄의 노예가 돼 있고 죄에 속박돼 있다는 게 루터의 입장이었고 이 논조에 기초해 피기우스에 대해 논박한 게 칼뱅이었다.

제롬 볼색은 칼뱅의 예정론을 논박한다. 볼색은 칼뱅의 예정론이 루터의 예정론을 받아들인 것으로 그것을 기초로 보면 하나님은 폭군이다는 주장을 한다. 이것에 대해 칼뱅이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을 변호하는 글을 쓴다. 제네바에서 결국 볼색이 추방된다. 이는 중요한 논쟁이었다.

1553년,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사람이었다. 그는 신학뿐 아니라 의학과 생물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그가 기독교신학의 근간을 건드린다. 삼위일체론이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 교리는 마귀가 만든 교리다라고 주장한다. 칼뱅과 긴장관계였던 시의회는 세르베투스에 대해 화형을 결정한다.

1559년이 돼서야 칼뱅은 제네바의 시민권을 얻게 된다. 그만큼 그는 이방인이었다. 18년 이상을 제네바에서 목회했음에도 그때까지 시민권이 없었다. 이때 기독교강요의 4편, 최종판이 출판된다. 처음엔 라틴어로, 그 다음에 프랑스어로 나왔다가 계속 번역된다.

목회자를 교육하기 위한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한다. 여기에 온 존 낙스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평가하면서 “사도시대 이후 최고의 진리의 전당이다”고 했다. 하나님의 진리가 최고의 수준으로 연구되고 추구되는 현장이 제네바 아카데미라는 말을 남겼다. 존 낙스는 칼뱅에게 배우고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종교개혁을 계속하게 된다.

칼뱅에게 베자라는 사람이 영향을 받는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각지의 신학교에 개혁주의 정통주의가 확산돼 가는 역사를 보게 된다.

칼뱅은 1564년 5월 27일 별세한다. 그는 몸이 허약한 사람이었다. 위궤양, 관절염, 폐병까지 달고 살았다. 걸어다니는 종합 병원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열정적 사역을 감당했다. 연 200회의 설교, 200회의 강연, 성경 각권의 주석, 20편에 달하는 신학 논문, 59권의 저작 전집, 기독교강요 재편집을 진행했다. 55세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그의 유언은 유명하다.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

그의 유지를 따라 스위스 제네바에는 그의 묘지를 찾을 수가 없다. 1509년 태어나 불꽃같은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에 남긴 영성은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가 가진 모토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였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순종으로 자신의 55년간의 인생을 불태운 사람이었고 우리 개혁파와 개혁 신앙에서 놀라운 모범을 보인 인물이었다.

우리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칼뱅을 우상화활 수 있다. 칼뱅이 한 말을 마치 성경보다 높이거나 동등한 차원으로 놓는다든가 해선 안된다. 그런 경향은 오히려 칼뱅의 정신을 반대되는 것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살았다. 칼뱅의 말이 다 옳은 건 아니다. 우리가 그의 유산을 따라가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한한 인간이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그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을 남긴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를 통해 종교개혁을 이루시고 개혁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모든 영광을 그분에게 돌리는 정신이 우리가 500주년을 맞아 회복해야 할 정신이다.

에꿈선교회가 가야할 방향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루터의 거지의 영성, 칼뱅의 무명의 영성으로 가야 한다. 진정한 개혁적 정신으로 무장하고 목회를 하는 우리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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