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예장 합동 장로교를 다녔을 때의 일이다. 20년전에 출석했던 그 교회에서 총신대학교의 모 교수님이 강단에 섰다. 그 교수님의 성함을 밝힐 수는 없지만 종말론에 상당히 권위가 있었던 분으로 기억한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사도행전 1:8에 땅끝은,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결국 복음이 시작한 예루살렘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해석이어서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류의 해석이 지금까지도 성도들 사이에도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는 거 같다.
땅끝을 예루살렘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본문은 행 1:8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말씀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주로 백투예루살렘 운동으로 일컫는 이 운동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복음이 시작한 곳,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땅끝’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그 때를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라고 생각한다.
http://m.blog.daum.net/bk1981/5798라는 블로그에 보면 ‘주님 오시는 발자국 소리’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지구는 둥글기에 '시작'이나 '처음', 그리고 '끝'은 '같은 곳'이다. 이것은 애매한 궤변이 아니라 '진실'이다. 복음 전파가 처음 시작한 곳인 '예루살렘'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http://m.blog.naver.com/amanda1985/140191465508라는 블로그에 올라간 ‘땅끝의 정의, <가야 하는 길> 다니엘 김 선교사’라는 제목의 글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이 글에서는 “땅끝은 어디인가?”라고 자문한 뒤 “지리적인 의미. 땅끝은 예루살렘”이라고 기록해 놨다. “예루살렘은 다시 돌아. 그곳이 땅끝이 된다. 백 투 예루살렘”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복음이 전파된 '시작'이요 '처음'이라면, 복음이 마지막으로 전파되어야 할 곳 역시 '예루살렘'이다라고 정의한다. 성도들이 많이 공감하고 있는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어떻게 답하는 게 바른 걸까?
1) 행 1:8 본문에서 ‘땅끝’이 예루살렘을 뜻하나?
행 1:8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하신 말씀이다. 이 구절과 유사한 구절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끝’의 바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막 16: 15에서는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승천 직전에 ‘온 천하’, ‘만인’에 복음을 전하길 원하셨다.
- 마 28:18에는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록했다. 동일한 상황에서 기록한 복음서의 말씀과 사도행전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땅끝’은 복음이 특정 지역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복음의 역동성, 이동성에 강조점이 있음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예수님은 복음이 ‘온천하’, ‘만민’, ‘모든 족속’에게 퍼져가길 원하신 것이다. 따라서 행 1:8의 땅끝도 특정 지역으로 해석하기보다 ‘온천하’, ‘만민’, ‘모든 족속’에 해당하는 문장으로 해석하는 게 정확하다. 땅끝은 예루살렘 등 특정 지역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2) 지구가 둥그니 땅끝은, 복음의 시작점인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지구가 원형으로 있으니 땅끝을 복음의 시작점인 예루살렘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이상해지는 해석들이 있다. 구약부터 살펴보자.
- "(신 28:49)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유치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라고 돼 있다. 땅끝이 예루살렘이면 이스라엘을 치러 오는 한 민족이 예루살렘 거민이라는 이상한 해석이 된다. 그런데 그 ‘치러오는 민족’은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 흉악한 민족”이라고 돼 있다. 지구가 둥그니 땅끝을 예루살렘으로 해석하면 위 구절은 해석이 이상해진다. 이 말씀에서 땅끝은 ‘원방’, 먼 나라를 의미한다.
“from the ends of the earth”(niv).
구약에서 땅끝이라는 표현은 이외에도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지구가 둥근 것을 염두에 두고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말씀은 찾아볼 수 없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 “막 13: 27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재림 때 천사들을 보내어 온 천지에서 택하신 자들을 모으신다는 의미이다. 이 구절의 ‘땅끝’도 예루살렘을 의미하지 않는다.
- “롬 10: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바울 시대에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한 말씀이다. “1)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었다(18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들은 복음을 들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소문을 들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단순히 혼잡한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른 것이다.”(메튜헨리 주석).
“바울의 시 19:4절에 대한 적용은 ···은혜의 복음의 광범위한 유포를 또한 웅변적으로 말한다 할 것이다. 복음의 소리는 온 땅에 퍼지며 복음의 말씀은 땅끝까지 퍼진다. 그런즉 이스라엘이 듣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NIC 신약주석).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됐는데 이스라엘이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변명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지구가 둥근 것을 염두에 두고 ‘땅끝’은 예루살렘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성경구절은 작위적으로 왜곡하지 않는 이상 나오기가 어렵다.
3) 땅끝을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나?
- 첫째, 지금까지 살펴보다시피 성경해석의 왜곡이 발생한다. 이는 살펴봤으니 재론하지 않겠다.
- 둘째, 복음 전도의 ‘동진’의 역사를 도외시한다.
“1세기 이후 로마교회, 알렉산드리아교회, 안디옥교회, 예루살렘교회, 콘스탄티노플교회 등 동서 교회가 조화와 균형을 이뤘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뉘면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분열됐다. 이 때 동방교회는 중동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까지 복음을 전했다. 복음의 동진은 순교자 저스틴이나 터툴리안의 고백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복음의 서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외 지역을 홀대해서는 안된다.”(함태경 기자의 미션 업, 2007년 8월 27일 국민일보). 선교가 서진만 해온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왜곡이다.
- 셋째, 종말의 시기를 예측하는 흐름과 이어진다.
“(백투예루살렘)운동의 중심에 루이스 부시 목사, 토머스 왕 목사 등 세계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운동의 기저에는 AD 1세기 예루살렘과 안디옥을 중심으로 시작된 선교 행로가 지구를 한바퀴 돌아서, 즉 ‘복음의 서진’을 통해 다시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면 세계복음화가 완성되고 세상이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런데 문제는 백 투 예루살렘 운동가들 가운데 모든 선교의 종착점이 마치 예루살렘인 양 주장하고 있는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위의 기사 참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는 우리가 알 수가 없다.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실 때가 지금입니까?”라고 제자들이 묻는다(행 1:6 현대인의 성경). 예수께서 아무리 가르치고 가르쳐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혈과 육에 속한’ ‘혈통적, 지역적, 정치적’ 회복으로 이해한 제자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반복해서 묻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것이 아니다”(1:7 현대인의 성경)고 답하신다. 재림의 시기와 때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알 것도 아니라는 게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도 백투예루살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서진을 통해 복음이 이슬람권을 돌파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면 재림이 오거나, 그 때가 재림의 때라는 허황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땅끝이 예루살렘이 아닌 데다, 재림의 시기를 사람이 알 수 없다고 강조하셨음에도 끊임없이 재림 시기를 예측하는 시도는 인간의 욕심의 산물 아닌가?
- 넷째, 땅끝을 예루살렘으로 해석해 팔레스틴의 평화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기독교는 십자가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평화를 일궈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의 정신이다. “‘백 투 예루살렘’, ‘복음의 서진’, ‘이삭의 후손과 이스마엘 자손 간의 갈등’ 등 다양한 신조어들이 한국 사회에 넘쳐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하여 ‘땅 밟기’와 ‘선포하는 선교 운동’이 괘를 같이 하고 있다. 그 안에는 은근한 정복론과 문명충돌론, 친유대주의, 반이슬람 시각, 그릇된 민족주의조차 뒤엉켜져 있다.”(김동문 선교사의 블로그 ‘백투 예루살렘? 2010년 1월 31일).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편을 드는 이유는 성경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입니다. 오늘 날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살게 했던 '가나안'입니다. 이스라엘을 무조건 두둔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이스라엘의 영원한 영토로 주셨다고 믿습니다. 유대인들로서는 그렇게 믿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기독교인들 중에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또한 이스라엘 국가가 팔레스타인 땅에 세워진 1948년을 하나님의 예언이 실현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죄로 인해 심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때가 되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이 예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 백성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것은 이미 2천 5백년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사실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 예언들을 잘못 해석하여 1948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악행이 정당하게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스라엘 국가가 재건된 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날이 가까왔다는 증거라고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신 '땅끝'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유럽을 거쳐 미국을 지나 동아시아를 거쳐 중국을 지나 다시 예루살렘에 이를 때 예수께서 재림하신다고 믿습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에 전해지려면 사라진 이스라엘이 다시 세워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미국에서는 the Christian Zionist 라고 부릅니다. '기독교 시온주의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세대주의자'(the dispensationalis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이 주창하는 운동을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주로 the Christian Right 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도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KIBI(Korean Israel Bible Institute)와 인터콥(Intercp)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체들에 의해 왜곡된 성경 해석이 전파되어 왔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습니다.”(김영봉 목사, 와싱톤한인교회 2014년 8월 17일 주일설교, 우리의 거룩한 부름). 김영봉 목사 설교문 PDF보기
땅끝을 예루살렘으로 해석하고 그곳의 영토적 점령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 믿는 크리스천들을 미국에서는 기독교시온주의자들이라고 칭하며 이런 사고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악행을 정당하게 하는 극단성을 불러 온다는 게 김영봉 목사의 지적이다. 땅끝을 예루살렘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성경 해석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을 흘려들어서는 안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