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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은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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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은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는가?
  • Narroway
  • 승인 2016.01.19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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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십자가로 하나님의 나라를, 무슬림은 ‘전쟁’으로 알라의 나라를···
▲ 자카르타 테러 현장에서 총을 든 범죄자(YTN 보도영상 갈무리)

각각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표격인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란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파리테러를 모방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일어난 테러소식이 들려온다. 2016년에도 이슬람은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고, 테러소식은 끊이지 않을 듯싶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서 이슬람에 대한 이해와 대비가 절실한 지금, 작은 목소리일지언정 함께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앞서 ‘이슬람과 테러를 이해하기 위한 3권의 추천도서’를 소개하면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의 일종이 아니라 종교, 정치, 문화, 경제를 아우르는 거대한 문명체계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문명체계가 오랜 시간 유지되는 데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강력한 이야기와 역사인식이 있기 마련이다. 무신론자들은 빅뱅과 진화의 우연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며, 기독교들은 창조-타락-구속-종말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것을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무슬림들은 어떤 세계관을 갖고 있을까?

필자가 아는 선교사 한 분은 IS의 지도자인 ‘아부바크르 알 바그다디’에 대해 조사해보면서 어찌 되었건 그에게는 전 세계 젊은이들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별히 그가 가진 세 가지 요소로 세계의 현 상황을 바라보는 역사인식, 이슬람이 해답이라는 영적확신, 실제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실행에 옮기며 보상을 약속한다는 점을 꼽았다.

한 마디로 알 바그다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설득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 이슬람주의를 이끌어온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의 수장 ‘하산 알 반나’도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의 교사였다. 그가 한 일이라곤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들에게 ‘역사’와 ‘꾸란’을 함께 가르친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 역사수업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켜 사회운동이 되고 정치세력화 된 것이다. 대체 무슬림들은 어떤 이야기를 읽고 들으며, 어떤 이야기 속에 자신이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일까?

무슬림의 사고에 따르면 이슬람(Islam)이란 단어는 꾸란에 계시된 알라와 그분의 뜻에 ‘헌신’ 또는 ‘복종’함을 의미한다. 무슬림은 알라께 복종하는 사람으로, 그분께 감사를 표해야 하고 무슬림 전통뿐만 아니라 꾸란에 있는 명령들을 수행해야 한다. 무슬림들은 꾸란이 알라로부터 인류에게 내려 보내졌으며,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전달된 것으로 믿는다(크리스티네 쉬르마허, <이슬람과 기독교 교의>, 바울, 2010년, p.34). 

▲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

많이 알려진 대로 무함마드 시절의 아라비아반도는 수많은 신들이 난무하고 여러 부족들이 서로 다투는 아수라장이었다.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삼촌과 여행을 다니며 아라비아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았고, 아마 그 가운데 창조주 유일신을 섬기는 집단들도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강한 종교심과 민족을 향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그는 부유한 아내 카디자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명상가가 되었고, 결국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무함마드는 수많은 우상들을 타파하고 유일신을 향한 절대충성을 강조하면서 아랍의 부족들을 끌어 모으기 원했다. 초창기에 그는 같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을 칭찬하고 또 그들에게 말씀을 배우라는 구절이 꾸란에 나와 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도 없으면서 자신을 예언자라 주장하는 더군다나 아랍민족인 무함마드를 유대인들이 인정할 리 만무했다. 꾸란의 성경인용은 한 마디로 오류투성이다. (반면 무슬림들은 성경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한다.)

무함마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운 이해를 하고 있었다. 기독교 수도사들이나 은둔자들이 그의 주변에 있었지만, 우리가 아는 한 신약성경적인 교회는 없었다. 그는 몇몇 기독교 이단들과 접촉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교리적인 균형을 가진 그룹들은 아니었다. 덧붙여서 무함마드의 생애 동안에는 완전히 아랍어로 된 성경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무함마드가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 교리를 완전하게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추측해볼 수 있다. 꾸란은 삼위일체 교리를 비난하는데,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육체적인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삼위일체 신앙의 대상으로 여긴다(위의 책 p.180).  

즉, 무함마드는 기독교를 유일신교가 아니라, 유대교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왜곡을 거쳐 삼신론을 가지게 된 배교집단으로 본 것이다. 예수를 존경하고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던 무함마드였지만, 그에게 있어 ‘원죄’,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과 같은 기독교의 핵심교리들은 다 해괴망측하고 불경한 것으로 여겨졌다.

무함마드는 622년 자신의 본거지를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기면서 움마공동체를 창설하고 그 해를 이슬람원년으로 선포하였는데, 이것을 헤지라(대이주)라고 부른다. 무함마드는 그때로부터 유대교인과 기독교인들을 본격적으로 적대시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예언자됨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메디나의 수장이 되는데 가로막았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수차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이 ‘전쟁의 승리’를 알라가 자신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여겼다.

혈연을 초월하여 알라를 향한 신앙과 복종으로 모인 움마공동체는 하나의 국가형태로 발전되었다. 무함마드는 종교와 정치, 공동체의 삶을 아우르는 지도자가 되었고, 무함마드 사후에 ‘칼리프 국가’라는 이름으로 계속하여 그 세력을 확장해나간 것이 이슬람의 역사다. 여기에서 중요한 세계관이 등장하는데 무함마드의 등장과 헤지라를 기점으로 세상을 이분화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자힐리야(무지의 시대)’와 ‘계시의 시대’로, 공간적으로는 샤리아법이 다스리는 ‘이슬람의 영토(Dar al salam)’와 불신자와 계속하여 싸워야 하는 ‘전쟁의 영토(Dar al harb)’로 세상이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알라를 향한 절대복종이 법으로 규정된 이슬람국가를 전 세계로 확장하는 것, 그것을 위한 거룩한 전쟁(지하드)에 동참하는 것이 모든 무슬림의 의무이다.

IS의 온라인 영문용 선전 잡지 '다비크'(Dabiq) 11호에 따르면 IS는 '십자군 동맹'이란 기사에서 십자군 동맹국에 공식적으로 포함된 62개 국가와 국제기구 명단에 한국을 포함시켰다. IS는 "이러한 십자군 동맹 형태는 지금까지 세 번째"라며 "다양한 어떠한 작전도 칼리프 국가의 부활과 지속, 확장을 막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IS는 이어 "오히려 칼리프 국가는 단호한 대응으로 (이러한 동맹군에) 견뎌 왔다"고 강조했다(한상용 기자, "IS, 미국 주도 '십자군 동맹' 국가에 한국 포함" 연합뉴스, 2015년 9월 11 일자 기사). 

IS는 지금의 역사적 현실을 무함마드시절의 헤지라, 중세시대의 십자군 전쟁에 이은 세 번째 대결전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듯하다. "헤지라 시절 무함마드를 대항했던 적들이 바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아니었던가. 지금 이스라엘과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이 중동에서 하는 행태를 보아라. 술과 섹스로 타락한 헐리우드 문화를 보아라. 돈에 찌든 월스트리트를 보아라. 고귀한 이슬람 문명이 온 세상의 해답이다. 저항하라. 싸우라. 무함마드를 이기게 하셨던 알라가 우리도 승리케 하시리라."

이슬람에 대해 온건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IS같은 집단은 이슬람이라 볼 수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36년 동안이나 헌신적인 무슬림이자 이맘으로 살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마크 A.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서방인들은 이슬람은 용서와 사랑의 종교라고 특징지을 수 있으며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원리주의자들은 그들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꾸란을 읽어보라. 이 책은 거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사실 용서와 사랑에 대한 내용은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마크 A. 가브리엘, <이슬람 서방 세계와 문화충돌>, 글마당, 2009년, P.9). 

즉, 아무리 온건하고 비폭력적인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들 전체를 끌고 가는 기관차는 꾸란과 원리주의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인인 우리는 성경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무슬림들은 꾸란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부흥과 갱신을 말할 때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듯이, 무슬림들은 ‘꾸란으로 돌아가자, 헤지라 시절로 돌아가자’고 외친다. 우리의 목표가 예수님을 닮아가며 죄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가 온 세상에 임하는데 있다면, 무슬림의 목표는 무함마드를 닮아가며 세상 모든 죄인들이 알라의 법에 복종하는 칼리프 국가를 온 세상에 세우는 데 있다. 명확한 갈림길이 여기 서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식이 예수님의 ‘십자가’라면, 이 땅에 알라의 나라가 세워지는 방식은 무함마드의 ‘전쟁’이다. 이 극명한 차이를 다음 번에 자세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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