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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삶: 변증전도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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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삶: 변증전도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5.10.2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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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환 균 목사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이 진짜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3가지 증거
- 변증전도설교 형태로 적용하고 풀어보는 사후세계의 진실과 전도의 접촉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린도후서 12:1~4)


1. 서론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전도할 때 기독교인들이 가장 대표적인 구호처럼 사용해온 것이 무언가? 바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다. 요즘도 명동 같은 데 가보면 몸에 이런 구호를 걸치고 다니면서 노방전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노방전도가 갖는 실효성에 대해 찬반논란이 여전하지만, 이 짤막한 구호 안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주제로 삼은 이 질문 또한 사실 기독교 복음 전도의 핵심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을 만큼 중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초창기에는 이런 구호만으로도 예수님을 믿는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다 자기 스스로 설득되고 동기 부여가 되어야만 믿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대답을 해줘야만 복음 전도가 제대로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요즘 같은 문명시대에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고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말하면 굉장히 시대에 뒤떨어진, 어디 먼 옛날 미개한 전설을 믿던 구석기 시대에나 통할 법한 이야기로 듣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인격적으로 들리기보다는 괜한 공포심을 유발시켜 강압적으로 믿게 만들려는 그런 폭력적인 접근처럼 오해받기 쉬운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적절하고도 지혜롭고 논리적으로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이것이 지금 우리의 숙제다. 다행히도 지금 우리가 잡은 질문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무조건 외치기 이전에 그 천국과 지옥이 진짜 있는지를 먼저 진지하게 생각하고 확인할 수 있게 해주자는 데 우선적인 관심이 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도 그 예수라는 분을 믿어볼 요량이 있게 될 거라고 전제하고 우선 그 답을 먼저 찾아보려는 것이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진짜로 있다는 걸 알고 난 후에도 “아, 과연 진짜로 있구나. 내가 있을 줄 알았어!” 하고는 그냥 가만히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이전처럼 똑같이 무심하게 살아가려 한다면 어떨까. 그것은 그 사실을 알기 이전에 아무것도 모른 채 사후대책 없이 태연하게 살아가던 것보다 더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근본 바탕이 되는 문제, 즉 천국과 지옥이 진짜 있다는 걸 이 땅에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걸 다루기 때문에 전도 차원에서 거부감은 훨씬 덜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사람이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이 진짜 있는지 확실히 알려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분의 말씀이 성경이란 책에 담겨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가능하다. 천국과 지옥은 사람이 죽은 이후의 문제이기 때문에 죽어보지 않고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인간의 죽음 이후를 확실히 알고 계신 분이 미리 경고해주시는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이 문제에 대한 답으로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공통분모를 통해 자연스럽게 납득해가는 과정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통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천국과 지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공통분모 차원의 증거들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고 난 후 궁극적인 답은 성경에서 만나게 해주는 단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성경 본문을 얼개와 바탕으로 삼아 천국과 지옥의 존재 여부에 대해 세상 사람들도 인정할 만한 공통분모들도 함께 돌아보고 성경적인 답도 함께 찾아가보고자 한다. 영원한 삶을 변증전도에 적용한다는 것은 결국 사후 세계의 문제에 대해 세상 사람들도 인정할 만한 공통분모들을 제시하고, 그것을 접촉점으로 해서 무엇보다 성경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본문을 통해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이 진짜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증거 3가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결론적인 해답을 찾아가보기로 하자.

2. 증거➊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는 최종 권위로만 가릴 수 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본문이 들어 있는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의 자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인해 혼란과 분열이 일어나자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고린도교회 내의 분쟁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쓰게 된 서신이다.

특히 당시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사도의 자격으로 환상과 계시를 받았는지의 여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자신 또한 사도로서 주의 환상과 계시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과정에서 기록된 내용이다.

본문의 첫 구절에 보니까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주의 환상과 계시’라는 말씀이다.

특히 ‘계시’란 말은 헬라어 원어로 ‘아포칼립시스’인데, 그 의미는 “뭔가 숨겨진 것을 밝혀서 그것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계시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에게 그의 능력과 영광, 그의 특성과 성격 등을 보여주어 자신을 인간에게 알린다는 뜻이다.

계시라는 말의 의미에 비춰보면 사람이 죽은 이후의 세계야말로 창조주 하나님께서만 특별하게 아시는 것으로 숨겨져 있는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출처의 환상과 계시가 아니라 ‘주의 환상과 계시’인 것이 중요하다.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 특성상 죽어봐야 아는데 그때는 이미 늦다. 어떤 걸 확인하는 게 의미 있으려면 그것을 확인한 후 자신의 이전 입장을 수정할 여지가 있을 때뿐이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은 구조상 그게 안 된다.

죽어서야 마침내 천국과 지옥이 있는 줄 알고 되었다고 하자. 자신이 천국에 있다면야 괜찮은데 지옥에 있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해서 “어이쿠, 실제로 지옥이 있구나. 이제 확인했으니까 다시 되돌아 나가서 지옥에 안 오도록 사후대비책을 세워야겠구나” 하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 거기는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돌아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경고한다. 사람은 한 번 죽지 두 번 죽는 일은 없다. 그래서 불교나 힌두교에서 내세우는 윤회설은 성경에서 말하는 내세관, 심판관과는 분명히 다르다. 성경은 사람이 한 번 죽고 나면 천국이나 지옥 중 어느 곳에서 영원히 지내야 할지를 놓고 심판이 진행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지옥이 있는지를 알려면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성경처럼 권위 있는 통로를 통해야만 가능하다.

A. 주의 계시와 권위

우리가 무엇인가를 올바로 인식하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일까. 보통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이성과 경험, 그리고 권위를 든다. 이성은 정신의 논리적 기능이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여 올바로 판단하지 않으면 사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또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오감을 통해 관찰하는 경험 역시 사물을 인식하는 데 꼭 필요한 통로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경험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권위라는 제3의 인식 방법이 필요하다.

일상을 돌아보자. 우리는 이미 많은 지식을 단순히 권위를 믿고 의지하는 통로를 거쳐 습득하고 있다. 미국에 9·11테러가 일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는가. 그 당시 현장에서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은 아주 적다. 직접 보지 않았는데도 그 사실을 의심 없이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도한 CNN을 비롯한 미국과 한국 언론들의 권위를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 권위를 신뢰하지 못해 9·11테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계속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는 어떻게 9·11 테러가 진실임을 알려줄 수 있을까. 당신은 그 권위를 믿어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단지 권위를 믿지 못해 계속 진실을 모르는 상태로 지내게 된다. 이처럼 어떤 사실이 각자에게 유효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특정의 권위를 믿는가 안 믿는가에 달려 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한국의 과거 역사 가운데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으로 나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믿는가. 국가에서 인정하여 교과서 편찬을 맡긴 국사학자들의 권위를 믿기 때문이다. 그 권위를 믿지 못하면 당신은 과거로 돌아가서 그 사실을 당신의 눈으로 일일이 확인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모든 알려진 사실에 대해 이런 식의 무모한 의심을 하려들면 세상에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쩌면 한 순간도 제 정신을 가지고 살아나갈 수조차 없을지 모른다. 사실 권위에 대한 암묵적인 믿음이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도리다.

이발관에서 면도칼을 쥔 이발사가 시퍼런 면도날로 당신의 목을 고의로 긋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그 이발사의 신원과 정신 상태를 보증한 이발관 주인의 권위를 믿기 때문이다. 매번 아무런 걱정이나 의심 없이 비행기를 타거나 고층 빌딩에서 편안히 사무를 볼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100% 안전성을 보장하는 그 항공사나 건물주의 권위를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계시, 곧 성경을 최종권위로 받아들인다. 기독교가 진리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특정 사실을 처음부터 독점 보도하고 있는 성경의 권위가 믿을 만한가 아닌가를 확인하면 된다. 권위의 신뢰성 여부가 사실 여부를 결정한다. 성경의 권위는 CNN이나 뉴욕타임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증거를 갖고 있다. 특별히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예언의 성취는 그 책의 권위를 확고히 입증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경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 알려주는 것도 동일하게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미국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과 비슷한 측면도 있다. 한 번도 미국에 가본 적이 없어도 미국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왜 그런가? 미국에 갔다와본 사람들이 많고 매스컴에서도 미국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장소나 사건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자 할 때 꼭 우리 자신이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나서야 믿게 되는 일은 사실 아주 드물다.

제3자를 통해서나 매스컴의 권위를 통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내가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제3자의 권위를 믿는 것을 통해 그 사실도 믿는다. 천국과 지옥도 마찬가지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하는 성경의 권위가 사실은 엄청난 신빙성이 있고, 수많은 임사체험자들이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실제로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과 같이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천국이나 지옥에 다녀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순환논리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이 사실만을 담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가 풍부하기 때문에 그 성경이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고 권위 있게 말하는 것 역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증거들에 입각한 합리적인 진술이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도 성경이 사실만을 담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가 풍부하다고 생각하는 그 판단은 어떤 기준에서 나온 것인가라고 물어올 경우에는 이 또한 또 하나의 순환논리로 비칠 위험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의해 지배를 받는 인식론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신자는 성경적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적 판단 기준을 사용해야 하고,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순환적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논리 전개가 순환적이라는 이유로 배척되어야 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사실상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순환논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도 그것의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자체의 판단 기준을 사용해야만 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일관성을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이성이 궁극적인 권위라고 믿는 합리주의자들은 합리주의의 논리들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반드시 이성의 권위를 사용해야 한다. 또는 인간의 경험에 최종권위를 두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주의 철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경험을 최종적인 권위로 두는 자신들 나름대로의 방법론과 논리를 전제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리가 궁극적 판단기준에 대하여 논할 때 우리는 그것의 결론과 조화될 수 있는 전제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접근을 순환논리라고 비판한다면,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순환논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변증전도연구소 사역 초기에 나는 대표적인 안티기독교인 한 사람과 약 한 달 동안 반기련(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 사이트에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상대방이 퍼부은 공격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인은 성경 중심의 순환논리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안티기독교인 역시 자신이 가진 전제나 또는 선입견을 기준 삼는 또 다른 순환논리에 빠져 있었다.

세상 사람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은 없다”거나 “사람은 동물에서 진화되어온 존재일 뿐”이라거나 하는 자신들의 선입견을 전제로 한 순환논리를 자신도 모르게 열심히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그 논쟁을 통해 오히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진실한 책이라는 증거들을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런 증거들을 적절하고도 지혜롭게 잘 제시하면서 복음 진리를 전한다면 기독교인들이 승산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자신이 세속적으로나 인본주의적으로 교육받은 여러 가지 사상들로 인해 잠시 그의 양심이나 본성이 억압받는 듯한 상태에서 반대 의견을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자신도 깊이 생각해보면 성경에 입각한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자연의 이치에 맞고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기독교변증에서는 그런 면면들을 공통분모나 접촉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그 자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들이 굉장히 많다. 이것들이 바로 기독교를 진리라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도 이해하고 납득할 만한 공통분모나 접촉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필요한 경우 이런 접촉점과 공통분모들을 복음 진리를 증거 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B. 타종교와 신화에도 등장하는 사후세계

사람은 죽은 후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류사의 주요 종교인 불교나 힌두교, 이슬람교와 그리스 로마 신화나 수많은 민족들의 신화나 전설에서도 한결같이 주장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들 종교나 신화는 본문에 나오는 대로 바울이 가진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양심과 자연만물에 심어놓으신 이치에 드러난 일반계시를 통해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고 그렇게 주장해온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알록달록한 비닐봉지에 파닥거리는 작은 물고기들을 가득 싸 담고 한강으로 가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불교신자인지 자신이 지은 죄를 부처님께 용서받으려고 강물에다 물고기를 방생하러 간다고 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전하지 않아도 죄의 심각성은 절감하는 듯했다.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 석가의 뜻과 달리 그를 하나님과 대등한 ‘부처님’으로 신격화시킨 대중적인 특정 불교 종파의 영향이 짙게 배긴 했지만, 그때 그분이 내게 해준 말이 무척 인상 깊었다. “사람이 세상에서 짓는 티끌만큼 작은 죄도 부처님한테는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른다.”

언젠가 불교에서 묘사하는 지옥의 광경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붉게 달궈진 쇠철판 위에 발가벗은 사람이 맨발로 서 있다. 뜨거워 한 발을 떼면 다른 한 발을 내디뎌야 하고, 발바닥을 번갈아가며 떼야만 하는 딱한 상황이 반복된다. 이런 고통을 수억조 년 이상 당해야 죗값이 갚아진다고 쓰여 있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인간의 죄악에 반드시 보응이 따른다는 깨달음만은 분명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상상으로나마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런 형벌의 장소인가를 밝혀 도덕적인 교화수단으로 삼으려 한 듯싶다. 불교는 주로 장소보다는 상태의 개념으로 천국(열반)과 지옥을 그리지만, 모든 생물이 윤회하는 육도(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지옥이 자리한다고 가르쳐왔다.

불교뿐만 아니다. 고대로부터 죽은 뒤 악인을 선인과 쫙 갈라놓는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상은 이슬람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세계 종교들에서 발견된다. 힌두교에서는 영혼들이 21곳의 지옥을 거치며 환생 과정을 겪는다고 말한다. 이 가르침은 힌두교의 한 분파로 시작된 불교의 지옥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원시시대부터 여러 민족들의 신화에도 ‘어둡고 뜨거운 지하세계’, ‘외딴 섬’에 빗댄 지옥이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옥은 죽음의 신 헤이데스가 사는 곳인데, 호머는 ‘일리아드’에서 그 곳을 ‘소름끼치는 공포에 떠는 끔찍스러운 썩은 방’이라고 묘사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인정치 않아도 지옥이 있다는 건 어렴풋이나마 느끼며 산다. 양심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에서 지옥을 떠올리기는 애써 꺼린다. 가끔 헐리웃 영화에서 “지옥에나 갈 녀석!” 같은 대사가 나와도 무덤덤하다. 애매하게 희화화된 종교적 용어나 욕설의 하나로 전락한 지옥만큼 우습고 가벼운 것도 없다. 그러나 무언가 켕기는 불안은 쉬 떨쳐지지 않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지 않는다. 지옥이라는 실체가 없다면 인간의 양심 한 켠에 은근히 스민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없을 것이다. 피조물인 사람들이 만든 종교에 등장하는 지옥이 제 각각 모양의 그림자라면, 창조주 하나님을 저자로 둔 기독교, 유일하게도 그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갖고 있는 기독교에서의 지옥 경고는 단 하나의 실체 그대로다.

타종교의 지옥관은 역사적이기보다 교훈적이다. 그러나 인류사 초기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을 지옥행의 빌미로 지목해 온 책, 유일하게도 그 지옥 권세를 깨트린 한 실존인물을 주된 테마로 삼는 성경은 지옥마저도 엄연한 역사로 소개한다. 만약 사람이 죽은 직후까지의 여생을 비디오로 미리 찍어둔다면, 그 마지막 컷은 그가 지하감옥에 철커덕 수감되는 장면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요한계시록 20:15).

C. 천국과 지옥이 존재할 확률 50대 50?

자, 어떤가. 순수하게 이론적인 확률 상으로만 본다면 천국과 지옥이 있거나 없을 확률은 50대 50이다. 그러나 이쯤 되면 50대 50까지의 백중세는 전혀 아니고 10대 90 아니면 1대 99까지로도 격차가 현격하게 벌어질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천국과 지옥의 문제 여부는 내가 죽고 나서나 확인할 수 있고, 확인되고 나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49대 51로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늘어나거나 단 1퍼센트의 확률이라도 천국과 지옥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물론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다거나 있든 없든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이렇게 천국이나 지옥의 존재 여부에 대해 아예 무관심한 사람들이 가장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들도 죽음과는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도 반드시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후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인류역사에서 수많은 종교가와 철학가, 예술가들이 고민하며 해답을 찾고자 한 것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것은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별 생각이나 고민 없이 인생을 살아왔다면 지금이라도 삶과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 지혜롭고 합리적이라는 사실부터 고민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다면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결국 성경의 권위나 타종교의 이야기는 차치하고 단순히 확률 상으로만 본다 하더라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이 과학적으로도 훨씬 현명한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정될 수 있다. 좀더 단순화해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 것과 없다고 믿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유익한가만으로 따져도 마찬가지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고 대비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고 지혜롭고 합리적인 삶의 태도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많은 증거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완강하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대해 거부하거나, 내세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사람들한테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게 오히려 시간과 에너지를 벌게 해준다. 지금은 이렇게 완강한 사람들보다는 조금이라도 마음 문이 열려 있고 무언가 인생에서 참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도 사실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한 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대로 있으면 자동으로 가게 되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지금 살아 있을 때 천국이나 지옥이 있는가 없는가 알아보려는 이유는 어쨌든 간에 지옥을 피하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다. 그 두 곳이 아닌 어중간한 데로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장소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그냥 “에이,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말고!” 하는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만일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다면, ‘있으면 있는 거고’ 하는 정도로 그냥 지나갈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각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일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영원의 장소에서 실제로 영원한 삶을 보내야 한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엄숙하고 진지한 자세를 요구하는 문제는 없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특별계시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도 경험한 것으로 나온다. 성경에서 환상은 보통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민수기 12:6, 사무엘상 3:15). 성경에서 주로 이런 환상들은 꿈꾸는 상태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데(민수기 12:6, 욥기 4:13),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꿈꾸는 상태에서 환상을 경험한 게 아니라 깨어 있는 상태에서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체험을 하는 가운데 낙원에 가는 환상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는 몸과 영혼이 함께 낙원에 갔는지,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만 낙원에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몸 안에 있던 영혼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영혼이 우리 각자의 실체라는 것이다. 본문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그 몸에서 빠져나간 영혼을 가리켜 ‘그’라고 말한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는 표현이 바로 그 의미다. 이러한 영혼에 대한 문제는 우리를 그 다음 구절에 있는 중요한 주제로 안내해준다.

2. 증거➋ 천국과 지옥은 구체적인 장소에 존재한다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이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간 때는 정확히 그가 이 고린도후서 서신을 쓴 때로부터 ‘14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영적인 체험이 구체적인 시공간의 역사 가운데 이뤄진 실제적인 체험이라는 사실이다. 본문이 들어 있는 고린도후서가 주후 55~56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면, 이 일은 주후 42~44년 사이에 일어났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에 바울은 다소나 안디옥에 또는 그 주변에 있었을 것인데, 이는 바나바와 함께 첫 번째 선교여행을 떠나기 직전인 것으로 추정된다(사도행전 9:29~30, 11:25~26, 갈라디아서 1:21).

이 시기는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 약 10년경쯤 될 때인 것으로 보인다. 열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울 때에 바울은 그들의 선교행위를 방해하고 박해하였는데, 그러는 가운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아라비아 광야에 3년 동안 내려가 있던 때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천국에 가본 시간이 추상적이지 않은 것처럼 그가 가본 천국 역시 추상적인 어떤 공상의 장소에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이 본문에 따르면 천국은 ‘셋째 하늘’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존재한다.

A. 셋째 하늘에 있는 천국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초월적인 나라를 뜻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는 가장 높은 하늘(열왕기상 8:27, 역대하 2:6, 느헤미야 9:6, 시편 148:4)을 의미한다. 이 셋째 하늘을 바울은 다시 ‘낙원’이란 말로 표현하는데, 헬라어 원어로 ‘파라데이소스’란 단어를 사용했다. 70인역 성경에서는 에덴동산을 지칭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복된 장소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페르시아어의 차용어로 본다. 유대인 독자들은 셋째 하늘이나 낙원이라는 두 단어 모두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의 영역을 언급하는 말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 나오는 이 셋째 하늘은 지나치게 단순한 ‘3층으로 된 우주’에 대한 믿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대기권, 해, 달, 별을 볼 수 있는 더 높은 영역, 하나님이 거하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상식적인 구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에서는 지구를 중심으로 세 종류의 하늘이 있다고 정리한다. 첫째 하늘은 구름이 떠 있고 새나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하늘(Sky)이다. 공기가 있는 지구상의 대기권을 가리킨다. 둘째 하늘은 대기권 바깥의 우주 공간(Space)이다. 수많은 별들, 곧 행성과 항성들이 있는 곳이다. 그 다음 셋째 하늘이 바로 우주 바깥의 세계, 즉 천국(Heaven)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이 셋째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 천국은 인간이 자연적인 몸을 입고는 결코 갈 수 없는 초자연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도 몸 밖을 빠져나간 영혼으로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거나 아니면 초자연적인 상태에서 이끌려갔으리라 본다. 옛날사람들이야 사람이 승천했다고 하면 전설이나 신화에 나오는 깔끔한 ‘해피 엔딩’쯤으로 쉽게 치부했을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 구름 위에 붕붕 떠다니는 무슨 솜털집이라도 짓고 사는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황당무계하고도 뜬구름 잡는 신선놀음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우주시대를 사는 우리는 우주선이 지구 바깥을 날아다니는 광경을 실제로 보고 사는 세대다. 지상을 떠나 하늘로 계속 올라가면 또 다른 광활한 우주 공간이 펼쳐지며 거기에 수많은 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그 높고 광활한 우주 공간 역시 셋째 하늘은 아니다. 사람들은 천체망원경으로 지구 바깥을 아무리 멀리 들여다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아 우주가 무한한 줄 안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주는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넓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 우주 바깥에 천국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는 유한하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 죽으신 거나 다름없이 어디론가 무중력 상태로 갑자기 사라져버리신 것이 아니다. 전직 목수였던 예수님은 지금도 천국에서 건축공사장의 감독처럼 성도들이 거할 집 짓는 일을 부지런히 맡고 계신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이것은 예수라는 한 역사적 존재가 제자들에게 친히 남기신 말씀이다. 이 말은 황당한 거짓말이든지 진실한 약속이든지 둘 중 하나다. 종교적 교훈을 전하기 위한 우화나 비유의 하나가 아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승천해 가신 그 셋째 하늘이 없다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분을 믿고 죽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거처 또한 없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낙원, 곧 셋째 하늘에 실제로 이끌려갔던 것이다.

B. 지구의 땅속에 있는 지옥

이렇게 천국이 있는 장소가 구체적인 것처럼 지옥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따르면, 분명히 현재 지옥은 지구의 땅속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죽음을 경험하고는 영혼의 상태에서 지옥을 보고 왔다는 많은 사람들이 전하는 간증에는 지옥이 현재 지구의 땅속에 있다는 주장이 공통적으로 많이 나온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건 사실일까. 성경에는 정말 지금 죽은 자들이 가 있는 지옥이 땅속에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고라 자손의 반역 사건이 담겨 있는 구약성경 민수기 16장 30~33절이다. 모세가 고라 자손들의 반역죄에 대해 지적하는 말을 마치자마자 땅바닥이 갈라져 그들이 산 채로 스올 곧 음부, 지옥에 내려갔다고 한다.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가 이 모든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이 말씀 하나만 봐도 음부는 지구의 땅속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시편 63편 9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이사야서 26장 19절에는 마지막날에 죽은 자들이 땅에서부터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에스겔서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땅 아래에 지옥이 있다고 명시한다. 에스겔서 26장 2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시 두로 민족을 상대로 이렇게 말씀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겔 26:20). 에스겔서 31장 14절 하반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그들을 다 죽음에 넘겨주어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게 하였음이라.”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님도 요나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자신 역시 죽으신 후 땅 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에베소서 4장 9절에서 다시 확인해준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자, 어떤가. 아직도 지옥이 막연한 곳이라고 생각되는가. 무언가 몽롱하고 무의식적인 것이 지배하는 아련한 장소라고 생각하는가. 그저 여러 대중 종교들에서 단순히 중생들을 이리저리 위협하고 협박하려고 만들어낸 공상이나 신화 속의 어떤 장소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지옥은 지금 이 지구의 땅속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이다.

C. 바울묵시록에 담긴 천국과 지옥

본문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서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어 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나는 사도 바울 당시에도 신자에게 이런 체험이 가능했다면 지금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천국 방문 체험을 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그 체험의 내용이 성경의 전반적인 내용이나 사상과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사탄도 얼마든지 내세와 관련해 사이비 체험을 유발시키고 거짓 환상들을 진짜인 것처럼 믿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실한 체험일 경우 천국이 존재한다는 증거들 가운데 하나로 삼고 참고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받은 환상을 마지못해 자랑하는데다 마치 그 환상이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그’라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가 낙원에서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도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에 그가 살던 다소의 집에서 ‘바울묵시록’이란 책이 발견되면서 당시 그가 체험했던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이 묵시록의 진위 여부야 우리가 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교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이 묵시록은 신약성경의 외경으로 분류되어 있어 꽤 신빙성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약성경 외경에 바울에 관한 중요한 문서 3권이 있는데, ‘바울행전’, ‘세네카와 바울의 왕복 서신’, 그리고 ‘바울묵시록’이다. ‘바울묵시록’ 서두에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 후 고린도후서 12장 1-5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담고 있다.

“바울은 셋째 하늘까지 이끌려 간 사람이 마치 자기가 아닌 제삼자인 것처럼 ‘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는 ‘그’라고 가리킨 사람이 실은 바울 자신이라는 것을 밝히 알 것이다. 이 ‘사도 바울의 묵시’는 바울이 그때에 체험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바울묵시록’은 발견된 경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독이요 제자인 데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와 키네기우스 시대에 한 저명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당시 다소에서 성 바울의 집에 거하였다고 한다. 한 천사가 밤에 그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집의 기초를 파서 그가 발견하는 것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자신이 착각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세 번째로 천사가 나타나 그를 채찍질하며 강제로 기초를 파라고 강요했다. 그래서 그가 팠을 때 한 대리석 상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상자 옆에는 “성 바울의 묵시록과 그가 전도시에 신었던 신이 들어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상자 열기를 두려워하여 데오도시우스 황제에게 보냈다. 그 황제가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서 성 바울의 묵시록이 나왔다. 그는 한 사본을 만들어 예루살렘으로 보낸 후 원본은 자신이 보존하였다고 한다.

이 ‘바울묵시록’의 구성은 발견의 경위(1~2장), 피조물의 호소(3~6장), 천사의 보고(7~10장), 죽음과 심판(11~18장), 낙원 제1(19~30장), 지옥(31~44장), 낙원 제2(45~51장), 맺음말(51장)로 되어 있다. 부분적으로 중요한 내용만 몇 가지 소개해본다.

“내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을 때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셨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권하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범죄하여 창조주를 노여워하게 하려는가. 너희는 스스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고 일컬으면서 악마의 일을 행하고 있다’”(3장).

“보라, 인자들이여,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만은 범죄하고 있다. 인자들아, 끊임없이, 특히 해가 저무는 때에 주 하나님을 찬미하라. 해가 저무는 때에는 모든 천사가 주 앞에 나아가 그를 예배한다”(7장).
“나는 다시금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그때에 천사가 내게 말했다. ‘따라오라. 의인들이 죽은 후에 이끌려 가는 곳을 네게 보여 주리라. 그리고 이어 너를 지옥으로 안내하여, 죄인들이 죽은 후에 그 혼이 어떤 곳에 이끌려 가는지 보여 주리라’”(11장).
“천사는 나를 셋째 하늘에 이끌어 가서 문 옆에 앉게 하였다. 내가 주의 깊게 살펴보니 그 문은 황금으로 만든 문이었다. 그 문 앞에 황금 기둥이 두 개 있었고, 거기 걸려 있는 두 황금 판대기에는 글자가 가득히 쓰여 있었다”(19장).

“멀지 않은 곳에 한 노인이 있었다. 천사 넷이 그를 불의 강에 던지고, 돌을 던져 그 얼굴을 상처지게 하였다. 천사는 내게 그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었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은 교회의 감독이었던 사람이다. 그는 생전에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행하지 않았었다’”(35장).

“한 곳에서는 남녀들이 추운 곳에서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주여,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다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육체는 부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사람들이다’”(42장).

“나는 내가 본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이 비밀을 밝힐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길리기아 다소의 내 집 벽 아래 묻었다. 그러나 내가 죽어서 주 앞에 섰을 때에 주께서 말씀하셨다. ‘바울아, 내가 환상과 계시를 네게 보여 준 것은 땅에 묻어 두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진리의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라’”(맺음말).

최근에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족과 함께 등산길에 올랐다.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 숲이 참 좋다. 천국의 숲은 얼마나 더 좋을까!” 성경에서 암시되어 있는 천국을 떠올리면 나는 천국의 울창한 산림과 생명수 강과 대도시들, 진귀한 동식물들, 하나님의 보좌와 천사들을 상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옥 가는 것도 문제지만 영생의 천국을 놓치는 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엄청난 영생의 세계가 있고, 거기에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원천적으로 누구나 들어갈 가능성을 지닌 채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면 지옥 가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좋은 세상을 영원히 놓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 각자가 연약해보여도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어 하나님처럼 될 수도 있고 짐승처럼 될 수도 있다. 사실은 이것이 정말 큰 문제다.

천국이나 지옥은 모두 우주의 특정한 장소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인 특별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육체에서 떠난 영혼은 지금 이 세상과 같은 곳에서 우리가 물리적인 형체로 인식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영혼이 가서 느끼는 불이나 물, 공기나 땅 같은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느끼고 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그것이 지금 지구상에서와 같은 물리적 세계와는 다르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유사성을 가질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인 특별한 장소일 거라고 보고 있다. 특히 지옥은 최후 심판의 날까지는 지구 속에 있지만 심판이 다 이뤄지고 나면 우주의 특정 장소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곳으로 지정될 것이라고 믿는다.

천국이나 지옥은 현재 우리의 물리적인 육안으로나 육체로는 가거나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바로 가까이서도 볼 수 있는 그런 곳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천국과 지옥은 자연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공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증거➌ 몸을 떠난 영혼도 의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 있다
“3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본문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갈 때 그의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갔을 가능성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자신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고 말한 것은, 몸 밖을 떠나 영혼만으로도 천국에 가볼 수 있고 영혼과 육체가 함께 천국에 이끌려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우선 우리가 중시해야 할 말씀은 바울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몸과는 구별된 어떤 다른 실체를 따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그 영혼이 몸과 분리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볼 때 사도 바울 역시 현대인들이 많이 체험하고 있는 임사체험(NDE: Near Death Experience) 또는 유체이탈 체험을 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로서는 이런 체험이 매우 희귀했을 것으로 본다. 그만큼 그의 이런 체험은 당시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본다면 사도 바울 역시 임사체험을 경험했고 그것을 통해 사후세계 체험의 일환으로 천국에 이끌려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본문 외에 성경의 다른 대목에서도 본문과 비슷하게 육체에서 몸이 빠져나가는 현상에 대해 말하는 구절들이 있다. 욥기 19장 26절에 보면 욥이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육체 밖에서 영혼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또 마태복음 27장 50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다 받으신 후 돌아가시는 순간을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대목 또한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그 몸에서 떠나간다는 진리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A. 천국에 있는 영혼들의 상태

본문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임사체험의 경우를 잘 관찰해보면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가더라도 그 영혼은 육체와 똑같은 의식과 기능을 가지고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본문에 보면 그렇게 몸 밖으로 빠져나간 영혼도 물리적인 공간 이동을 하는 어떤 실체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듣고 느끼는 지각을 가진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4절에 보면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라고 했는데, 이 구절로 볼 때 영혼은 분명히 어떤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존재로서 물리적인 이동을 경험할 수 있는 특정 실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낙원에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의 청각 기능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표현하는 걸 보면 가치를 판단하거나 특정 감정을 느끼는 정서적 기능도 그대로 살아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6장 9~11절에도 보면 순교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장면을 통해 영혼들의 특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자세히 관찰해볼 수 있다.

“9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미국의 기독교 작가 랜디 알콘은 ‘헤븐’(요단출판사 간)이란 책에서 이 대목을 놓고 천국에 있는 영혼들의 특성에 대해 몇 가지 아주 통찰력 있는 관찰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이 대목에서 천국의 영혼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68~71쪽, 헤븐).

첫째, 10절에 나오는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라는 말은 그들이 자신을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들이 성대나 혹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유형의 도구를 지닌 물리적 형체로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둘째, 이들은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이성적이며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감정이 있으며, 땅에 있는 사람들처럼 심지어 열정적인 존재임을 가리킨다.
셋째, 이들 순교자들은 생생한 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며, 상대방과 하나님, 그리고 땅의 상황을 인식한다.
넷째,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자유롭게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배워야 함을 의미한다. 천국에서 사람들은 이해하고 추구하길 원한다.
다섯째, 순교자들은 분명하게 땅에서의 자신들의 삶을 기억한다(10절).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죽임을 당한 것까지 기억한다.
여섯째, 천국의 영혼들은 서로 독립된 개인들로 이뤄져 있다. 11절에 보면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라고 말한다. 개인의 독창성을 말살시키는 하나의 통일된 성품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성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일곱째, 순교한 영혼들이 흰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실제적인 물리적 형체의 가능성을 암시해준다. 왜냐하면 몸이 없는 영은 옷을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옷은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물리적일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순교자들은 사도 요한이 실제로 볼 수 있었던 물리적 형체를 가졌던 것 같다.
여덟째, 천국에도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11절). 흰 옷을 입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시간관 관련된 질문을 던진다.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10절). 이들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고 있으면 주님의 심판의 날이 도래하길 갈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건들이 땅에서 일어날 때까지 그들에게 “조금 더 기다리라(11절)고 말씀하신다. 기다림은 시간의 흐름을 요한다.
아홉째, 천국의 영혼들은 여전히 땅 위의 사람들과 강한 가족의 유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11절)이라고 불린다. 우리에게는 같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셨다”(에베소서 3:14~15). 그리스도의 신부에게는 분리의 벽이 없다. 우리는 천국에 우리보다 먼저 간 사람들과 한 가족이다. 이 구절들은 천국의 사건과 사람들과 땅의 사건과 사람들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입증한다.

요한계시록 6장 9~11절에 등장하는 천국의 영혼들이 옷을 걸칠 수 있을 만큼 물리적 형체를 가진 존재라는 말은 그들이 신학적으로 영체(spiritual body)의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혼은 육체와 똑같은 형체를 가졌다고 보는 이들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나도 이러한 의견에 동의한다.

본문의 사도 바울처럼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후에도 육체 안에 있을 때와 똑같은 기능을 가지고 주변 사물을 다 인식할 수 있었다는 증언은 실제로 바울뿐만 아니라 역사상의 임사체험자들, 그리고 현대의 체험자들에게서도 허다하게 수집된다. 오히려 육체를 벗어난 영혼은 마치 감옥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하게 자신과 주변세계를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한다.

B.‘저 세상으로의 여행’ 임사체험의 진실

1982년에 실시된 갤럽조사에 따르면, 보통 임사체험이라고도 하는 사후세계 체험은 미국의 성인 중 약 800만 명, 즉 20명에 1명꼴로 경험할 만큼 이제는 더 이상 기이하거나 희귀한 현상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응급의료 체계가 발달하면서 죽음에 임박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가 많아져서다. 하지만 임사체험은 어느 사회, 문화에서나 오래 전부터 나타나던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에 ‘나는 천국을 보았다’(김영사 간)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임사체험 간증을 전해줬던 이븐 알렉산더 교수의 이야기는 2012년 10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커버스토리 기사로 다뤄질 만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의 책은 2013년에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어 아마존 종합 1위, 뉴욕타임즈 1위 등에 올랐다. 또한 유럽과 아시아 각 지역에서도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고, 헐리웃의 유명 영화제작사 유니버셜 픽처스가 영화화를 확정할 만큼 널리 알려진 책이 되었다.

그는 2008년 11월 10일에 아주 희귀한 박테리아성 뇌막염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곧이어 그의 뇌 부위가 작동을 완전히 멈춰 뇌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료 의사들은 그에게 생물학적 사망 판정을 내리려 했는데 7일째 되는 날 극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뇌사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그는 다른 임사체험자들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 내용을 책으로까지 펴내게 된 것이다.

이 사고 당시 하버드 메디컬 스쿨에서 교수와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이븐 알렉산더는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완전한 무신론자였고, 영혼의 존재도 절대로 인정하지 않던 소위 유물론적인 물리주의자이자 저명한 뇌의학 권위자이면서 신경외과 전문의였다.

그러던 그가 육체와 분리된 의식, 곧 영혼을 통해 사후세계를 체험했다는 것 자체가 세상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책에서 혼수상태였을 때도 자신의 뇌는 잘못된 방식으로 작동한 것이 아니라 아예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 있었고, 깨어 있었다면서 이것이 너무도 확실해서 가슴이 저릴 지경이었다고 간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SBS TV의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에서도 ‘저 세상으로의 여행’이란 제목으로 임사체험자들을 취재해서 보도한 적이 있다. 여기에 보면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서 먼 시골 안방에서 부모님이 이야기 나눈 것을 듣고 나중에 부모님께 그 내용을 그대로 알려줘서 놀라게 한 사례 등 아주 부인할 수 없이 분명한 증거들로 사후 영혼의 존재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이 프로에서는 임사체험의 공통점 7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① 육체에서 떠난 그 무엇(유체이탈). ② 어둠의 터널, 어둠의 공간. ③ 빛과의 만남. ④ 죽은 친지들과의 만남. ⑤ 지나온 과거가 한 순간에 나타남. ⑥ 그 속에서 자기 인생을 성찰함. ⑦ 깨어남.

대체로 이런 순서에 따라 임사체험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지나온 과거가 아주 어릴 적부터 죽기 직전까지 한 순간에 나타났다고 하는 대목은 임사체험자들이 흔하게 겪는 경험이다. 그래서 내가 상상하기로는 아마도 깨어나지 않고 이 임사체험에서 좀더 나아간다면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되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미국에서는 실제로 지옥의 끔찍한 참상과 고통을 경험했다는 임사체험자들의 간증도 많이 소개된 바 있다.

C. 지옥을 경험하는 임사체험자들

천주교인인 이븐 알렉산더의 책에 보면 그 역시 임사체험을 하는 동안 초기에는 편안함을 느꼈다가 나중에는 무언가 지하세계의 덫에 걸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의학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후 영체의 상태로 잠시 머물렀던 곳이 정말 지옥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어둡고 불편한 곳을 떠나 갑자기 천국을 방문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정황으로 보면 그곳이 지옥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는 책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간증했다.

“내가 그 전에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보니 이곳에서의 시간은 밑도 끝도 없이 펼쳐졌다. 몇 달이 지났을까? 몇 년이 지났을까? 무한한 시간이 지났을까? 어쨌든 어느 순간엔가 섬뜩한 느낌이 처음의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 어둠으로부터 나오는 얼굴들이 추악하고 험악해 보일수록 나는 나라는 것이 있어서 주변의 차갑고 축축한 어둠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도 점점 날카롭고 강렬해졌는데, 마치 지하세계에서 트롤(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화나 동굴에 사는 초자연적인 괴물) 군단이 난폭하게 작업하면서 내는 단조로운 소리로 변하는 듯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은 시각적인 양상이 줄어들고 촉각적인 느낌이 커져서 마치 파충류나 벌레 같은 생물들이 무리를 지어 지나가면서 이따금 그들의 매끈한 피부나 비늘로 덮인 껍질이 내게 닿아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고 나서 어떤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배설물 같기도 하고 피 같기도 하고 구토물 같기도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생물체의 냄새이긴 했는데, 생명의 냄새가 아니라 죽음의 냄새였다. 나는 자각하는 의식이 점점 명료해지면 해질수록 점점 더 패닉 상태로 접어들었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 질문을 한 바로 그 순간에, 어둠으로부터 새로운 무엇인가가 솟아나왔다”(48~49쪽, 나는 천국을 보았다).

넓게 잡으면 임사체험자들이 의학적으로 죽은 이후에 경험하는 것도 본문에서 우리가 살펴본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환상과 계시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체험은 일반적이지 않고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이며,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감춰놓으셨다가 죽은 후에만 사람에게 밝혀지는 그런 영역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시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를 좀더 확대해서 비신자들에게까지 적용할 경우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임사체험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면 뇌가 곧 의식의 전부이기 때문에 영혼의 존재는 따로 없고 뇌가 죽으면 사람도 죽는 것이라고 믿었던 물리주의자들의 주장은 거짓된 것임이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물론 임사체험이 환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던 사람들 또한 잘못되었음이 밝혀졌다. 환각 작용은 뇌의 작용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려면 어떤 형태로든 뇌가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임사체험자들은 뇌가 죽었을 때도 몸을 빠져나간 영혼은 수술실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상세하게 다 보고 깨어난 후 그대로 보고할 만큼 분명한 지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임사체험자들의 사례 때문에 의학계에서는 임사체험이란 전문용어까지 만들어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대학들에서도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을 체계화시키기 위해 정식 과목으로 개설하여 연구하고 있다.

4. 뇌와 영혼, 양심, 그리고 심판

사실 사람이 죽은 후에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들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도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은 없다. 자살하는 사람들마저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못하다고 여겨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지 순수하게 죽고 싶어서 기꺼이 죽는 사람은 없다.

매스컴에 실리는 유명인들의 부고 기사에는 그들 각자의 생전의 업적이 주로 소개된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다는 말이 없다. 사람들도 여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사람은 다 원치 않는 죽음을 일방적으로 당한다. 그래서 죽어도 결코 자연스럽게 계속 죽어 있지 못한다. 애초부터 원치 않는 죽음을 당한 만큼 죽은 후에도 어딘가 자신이 원치 않는 곳으로 끌려가거나 억압받을 가능성이 높다.
구도자로 이리저리 방황할 때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이 묵상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시체의 내부를 속속들이 찍어놓은 희귀한 칼라 사진들을 보고 나서는 그 묵상이 더 깊어졌다. 절개된 피부 아래 드러난 뒷목 언저리의 온갖 신경조직과 혈관이 떠올라 한때는 밥맛도 잃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고독하고 허무해 보였다. 죽음이 끝이라면 육체가 그토록 정교하게 지어진 이유는 또 무엇인가. 당시 내 속에 끊이지 않던 물음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육체가 이토록 정교하게 지어진 것은 사실 영혼의 기능을 하나님께서 뇌를 포함한 육체에 심어놓으신 결과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시편 139편 13~14절에 보면 하나님께 우리 몸을 만드신 일이 심히 기묘하다고 표현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A. 나는 나의 뇌인가?

특히 인간의 뇌는 예로부터도 신의 신비스런 걸작품으로 일컬어질 만큼 복잡하고 정교하게 지어져 있다. 신경세포가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뇌는 몸의 여러 기관의 거의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다시 여러 기관으로 활동이나 조정 명령을 내리는 사령탑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사람은 뇌가 없으면 판단하거나 느끼거나 행동하지 못한다. 뇌가 없으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질 만큼 뇌는 사람의 존재에 있어 결정적인 기관이다.

사람의 의식과 관련해서 뇌가 이토록 정교하고도 완벽하게 기능하기 때문에 무신론적인 뇌과학자들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나는 내 뇌의 전두엽에 있는 신경세포다”라고 대답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되니까 사람에게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마저도 거짓말이고, 사람의 의식은 물질의 일종인 뇌가 다 관장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요즘은 한 술 더 떠서 신을 만나고 특정한 영적 체험을 하는 것까지도 뇌의 기능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무슨 신령한 존재가 따로 있어 영적인 체험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뇌 기능의 하나로 종교적인 체험이 조작되고 조종된다고 보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양심마저도 뇌 기능의 일종이라고 보았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가 종교를 미신이라고까지 몰아붙이는 것은 뇌과학의 성과를 과신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뇌가 곧 나인가? 그렇지 않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뇌사상태에서도 몸에서 빠져나간 영혼이 생생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임사체험자들의 증언에서 이미 임상적으로나 의학적으로 판명난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임사체험자들은 영혼이 자신의 육체와 똑같은 모양과 기능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진정한 나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례로, 내 몸에는 분명히 내 손이나 발이 포함되어 있지만 손이나 발이 떨어져 나간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나로 존재한다.
또한 보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독립적으로 “내 눈이 본다”고 하지 않고 “내 눈으로 내가 본다”고 말한다. 나란 존재는 육체와 동일시될 수 없는 어떤 것인데, 성경에서는 이 존재를 영혼이라고 말하며 동물의 혼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도서 3:20~21).

이 말씀에 보면 짐승은 죽으면 그 혼이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알려준다. 땅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그 존재가 끊어져 없어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람의 혼이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죽은 후 사람의 영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소관 아래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다.

동물과 달리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며 양심이 있어 도덕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또한 지성과 감정, 의지라는 하나님의 형상이 가진 특성을 그대로 소유하고 발휘하며, 하나님이 말씀이신 것처럼 인간도 논리적인 말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타인과 의사소통하며 인격적인 교제를 나눈다.

하나님이 안 보이는 존재인 것처럼 그분의 형상인 나 역시 안 보이는 존재다.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듯 내 몸 안에서는 나를 못 본다. 나는 뱃속의 심장에도 쓸개에도 없지만 내 몸 안에 충만하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만상을 입고 그 안에 충만하시듯 나도 그렇게 내 몸 안에 충만하지만 내 몸 안에서는 나를 볼 수 없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예레미야 23:23~24).

사람의 영혼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 각자에게 부여하신다. 부모로부터는 육체만을 물려받을 뿐이고 개개인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부모로부터 영혼의 요소인 성격이나 정신적, 도덕적 특징들도 부분적으로 물려받기는 한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마음이 육체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한계 안에서 어느 정도 영혼의 성격이 규정된다는 정도로 보면 신학적으로 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동물과 달리 인간만은 죽고 난 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뇌의 기능 차원에서 보면 사람이 짓는 죄 또한 영적으로 양심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는 뇌도 통과하기 때문에 뇌를 정교하게 만드신 하나님 앞에 각 사람의 모든 죄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사람의 영혼이 육체 안에 있는 동안 뇌를 안 거치는 생각이나 행동은 없다. 그러나 이는 뇌가 인간의 전부라는 뜻은 아니다. 그 뇌를 정교하게 만드신 하나님이 자기 형상인 인간의 영혼을 육체 안에서 낱낱이 들여다본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다.

B. 영혼을 스캔하시는 입법자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실 때 아주 정교한 법칙을 세우셔서 만물을 유지하시고 지금도 쉼 없이 운행하신다. 나무는 뿌리를 땅에 박고 있어야 산다. 땅을 박차고 뿌리를 하늘로 뻗치면 즉사한다. 물고기가 물 밖이나 공중에서 못 살듯 인간은 물속이나 대기권 밖에선 못 산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물리적 법칙뿐만 아니라 도덕적 법칙에도 예속된다. 창조주는 전능하시고도 거룩하신 분이며, 그 거룩한 형상의 특성은 인간만이 가진 양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우주의 물리적 세계는 법칙대로 질서정연하다. 우주의 일원인 우리의 몸도 준법정신 하나만큼은 투철하다.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노쇠하면 죽는다. 단 한 곳 ‘치외법권’ 지대처럼 보이는 데가 있다. 제멋대로 고삐 풀린 듯한 인간의 죄악상이다. 양심에 새긴 창조주의 도덕법을 어기는데도 즉사하지 않는다. 우주는 고요하고 아름답지만 세상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의 온갖 죄악으로 어수선하다.

우주의 물리적 운행에는 빈틈없이 적용되는 법이 왜 인간의 도덕성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가. 왜 지금 이 지상에서 활개 치는 악인들을 처벌하는 일에 하나님은 그저 침묵하는 방관자처럼 보일까. 답은 하나다. 지옥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를 만드시고 만물의 운행법칙을 주관하는 통치권자가 전능하기만 하고 선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악한이라면 어떨까. 지구의 하루가 24시간이다가 어느 날은 17시간 28분이기도 하다면 어떻게 될까. 우주는 예측 불가능한 무질서와 대혼돈 가운데 빠진다. 인간의 삶도 뒤죽박죽 어느 하나 안정된 구석이 없을 것이다.

거룩함과 신실함의 속성이 따르지 않는 전능함은 불완전하다. 그 자체가 통제 못할 악이 될 수도 있다. 창조주의 전능함으로 정교하게 지어진 우주만물은 그분의 선하고 신뢰할 만한 주권과 통치권 아래 존재할 때 온전한 조화를 이룬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은 바로 이 주권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반항이요 불순종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통치법을 어긴 죄인을 차후 지옥에서라도 공정하게 심판하시지 않는다면, 그분 자신이 죄인 되실 것이다. 지옥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범인은닉죄’의 공범자로 전락시키는 무모한 시도다. 온 우주 가운데서 티끌만한 죄 한 톨이라도 그냥 눈감아준다면, 하나님은 우주의 떳떳한 통치자가 될 자격이 없다. 우주 공간 어느 한 귀퉁이에라도 얹혀사는 한 이 엄격한 통치권의 영역에서 예외인 자는 없다.

지구는 누군가가 내다버린 별이 아니다. 단지 사람에게 왕의 합당한 통치권 안으로 되돌아올 유예기간을 준 하나님의 엄청난 인내와 사랑 때문에 이 땅에서나 잠시 내다버린 행성처럼 보일 뿐이다. 문제는 그 돌이킴의 기회로 주어진 유예기간이 장차 선고될 영원한 형기에 비하면 너무 짧다는 것이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전도서 8:11).

오래 전에 ‘TV 문학관’이라는 프로에서 어떤 유명 소설가의 작품을 드라마화 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대사 하나가 그 후에도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아주 못되게 살았던 사람이 죽었는데 그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나누는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돼. 이렇게 악한 사람이 죽은 후랑 착하게 살았던 사람이 죽은 후가 똑같으면 세상에서 그것만큼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겠어?” 이런 취지의 말을 했던 걸로 기억난다.

이런 생각은 드라마 속의 그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우리도 뭔가를 잘못한 사람을 볼 때 "저런 천벌 받을 놈!" 같은 식의 말을 한다. 이건 기독교인들만이 하는 말이 아니다. 천벌이 반드시 있어야 공평하게 될 거란 생각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본능적으로 담겨 있다. 천국과 지옥이 실제로 없다면 어떻게 사람들의 깊은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자리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이 사후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도덕적 증거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옥이 없으면 이 땅에서 횡행하는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끝내 가질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분은 전지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고 신실하고 성실하신 분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옥이 없으면 하나님의 공의에 문제가 생기고, 천국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에 문제가 생긴다.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있어야 예수님의 구속사역도 의미가 있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도 의미가 있게 된다.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목적과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는 이유 간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런데 첫사람의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되면서 인류에게 죽음이 찾아들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 죽음의 문제 앞에서 문제의식을 느낀다.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걸 느끼고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내 성경에서 영생의 길을 찾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죽음의 현실이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이생에서의 현실적인 삶에만 집착한다. 그러다가 그 죽음을 제대로 문제 삼지 못하는 바람에 어떤 답도 찾지 못한 가운데 결국 그 죽음의 현실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사람들이 가는 곳, 죽음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천국이고, 후자의 사람들, 곧 죽음의 문제에 대해 어떤 답도 찾지 못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지옥이다. 지옥은 자기 죄에 대한 형벌을 당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자기 몸으로 다 충족시켜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천국은 자기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다 당해주신 것을 믿고 그분을 닮아 천국의 방식대로 살아간 자가 마침내 들어가 영원히 정착하는 곳이다.

C. 죽어도 안 죽는다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는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셨다.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계신 셋째 하늘, 곧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는다면, 지금 우리가 본문을 통해 다루는 주제의 차원에서 좀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해본다면 진리는 곧 천국과 지옥이라고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진리도 없는 것이다.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 부조리한 세상 자체를 진리요 삶의 전부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자신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이 진짜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라고 묻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 천국 가고 싶어서 그런 것일까. 지옥이 있기 때문에 사후세계를 싫어하는 걸까.

사람들은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기를 바란다. 천국이 있다 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천국이 있다면 지옥도 있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만 있고 지옥이 없어서도 안 되고 지옥만 있고 천국이 없어서도 안 된다. 이 둘 간에는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자, 어떤가. 천국과 지옥이 결코 만만하거나 사소한 문제가 아니며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지 않는가.

천국과 지옥은 잠깐이나마 이 땅에서 모형으로 미리 제시되어 있기도 하다. 사람의 몸은 원래 무한히 기쁨을 누리도록 지어졌지만 타락 후에는 무한히 고통을 당할 수도 있는 몸으로 변했다. 몸의 어느 부위에 작은 염증만 생겨도 고통이 느껴진다. 그 염증이 암이 되면 죽음을 앞당긴다. 사람의 몸 안에 잠시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또한 이 땅에서도 죄를 범한 자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서로 사랑하며 선하고 거룩하게 살면 천국에 사는 것 같은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되어 있다. 왜 이 땅에 이 두 가지 상태, 곧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천국 같은 기분이나 상태, 지옥 같은 기분이나 상태가 공존하고 있을까. 이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예견해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목양사역을 감당할 때 교구에서 매달 한 번씩 전도 사랑방 모임을 가졌다. 초청된 비신자들은 자유롭게 무엇이든 질문할 수 있었다. 때로 황당스런 질문도 나오지만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한번은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 한 분이 이렇게 물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가본 사람이 없잖습니까?”

나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렇게 의문스러워하는 것 자체가 내세의 존재를 예고하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양심껏 선하게 살려는 우리 안에는 이미 천국과 지옥이 꽉 차 있습니다.” 다시 반박해올 줄 알았던 그 할아버지는 나의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셨고, 중요한 의문이 풀리자 나중에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까지 받으셨다.

이 땅은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길목의 임시 정거장이다. 누구든 아담 대신 예수님을 뒤따르지 못하면 아무리 선행이 많아도 지은 죄를 씻지 못한다. 인류의 구원문제는 결국 ‘한 대표자’에 달려 있다. 세상일에도 이 대표성의 원리는 비슷하게 적용된다.

국민의 대표자인 대통령을 누구로 뽑느냐에 따라 전 국민이 고통을 당하거나 안녕을 누린다. 가장이 어떤 사람이냐가 한 가정의 운명을 좌우한다. 나의 대표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죽고 난 후 나의 영원한 거처가 결정된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9). 아담의 모든 자손들은 한 분 예수님이 이루신 대속의 진리를 믿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끝내 거부한 죄 때문에 지옥에 간다.

다시 강조하지만, 육체의 죽음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다. 육체에 깃든 생명의 갖가지 기능과 조직은 죽고 나서도 거짓말처럼 그대로 작동한다. 차원을 달리 할 뿐 모든 사람은 사실 결코 죽지 않는다.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것, 이것이 죽음의 신비다.

사후세계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죽는다는 것도 나한테 일어날 거라고 한다면 도저히 믿기 어렵다. 살아 있는 사람 누구도 타인의 죽음은 믿어도 자신의 죽음만큼은 안 믿는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얼핏 예상은 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죽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실제로 사람은 죽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이 의식은 죽어 없어질 성질이 아니다. 단백질 덩어리 몸은 흙으로 돌아가도 영혼은 몸을 떠나 그 다음 세상으로 주소만 옮긴다.
사람의 영혼이 정말 영원하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이 계속 진행되어오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 신학자들 간에도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가운데 있는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책 성경을 최종권위를 삼는 데 동의한다면 사람의 영혼 또한 그 하나님의 형상의 특징대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데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전도서 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 따라 사람의 영혼이 영원하다는 것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진리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모두 100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죽는데도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식으로 노래하고 실제로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사람은 죽어도 안 죽는다. 사람이 완전히 의식을 잃고 죽어 없어지는 순간은 영원히 단 한 순간도 없다. 오히려 이 땅에 살 때는 잠자는 동안만큼 의식을 못 느끼기도 하지만 죽고 나면 영원히 그런 의식 없는 순간조차 전혀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당분간 영혼으로 존재하다가 최후 심판 이후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한다. 몸은 영원한 밑천이다.

사람의 육체 또한 잠깐 동안만 존재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영혼과 분리되는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도 나중에는 영생불사하는 몸을 입는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 그때 육체와 영혼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악인은 지옥에서, 선인은 천국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친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5장 46절에 보면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하셨다.

사람이 죽은 뒤 다시 눈을 뜰 때 영원을 보낼 처소는 딱 두 군데다. 캄캄한 지옥, 아니면 눈부신 천국이다. 이는 공연한 엄포성 경고도 아니고 해묵은 종교적 폭력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은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지구의 24시간 자전을 한 순간도 정지시킬 수 없는 것과 같은 불변의 진리다. 이 땅에 태어나 처음 본 세상을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사후 세계도 때가 되면 우리 앞에 쑥 드러날 뿐 우리의 양해나 동의를 미리 구하지 않는다.

사후 세계의 존재는 이미 정해져 있고 변경치 못한다. 애써 심판과 지옥의 두려움을 지우려 해봐야 소용없다. 단지 어떤 내세를 맞을지는 이 땅에서 바꿀 수 있다. 성경에 그 빛과 어둠을 가르는 ‘스위치’가 있다. 그냥 덧없이 까먹기에는 영혼이 육체 안에 있는 이 땅의 하루하루가 너무 아깝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14).

5. 결론 :“왜 예수만인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종교나 사상에도 한결같이 이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념이 존재한다는 점은 특히 예사롭지 않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잘 대비하고 죽었는데 죽어보니까 천국과 지옥이 없었다고 해보자. 그래도 손해날 게 없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믿고 죽었는데 천국과 지옥이 있고 자신은 영원히 지옥에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죽고 나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도박과도 같은 삶을 살아온 것이라면 얼마나 위태로운 삶인가.

사실 죽어봐야 알게 되는 천국과 지옥의 존재 여부를 놓고 확실히 없다고 단정하고 사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무모한 일이다. 영혼의 존재가 영원하기 때문에 그 사후의 세계도 천국이나 지옥에서 영원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도 성경에서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모든 종교나 사상, 문학, 예술도 사람은 육체만의 존재가 아니고 사람의 진짜 실체는 영혼이라고 믿고 있다. 서양 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은 일찌감치 사람의 실체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며 그 영혼은 영원한 존재라고 가르쳤다.

영혼이 과학적으로나 체험적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임사체험이라는 의학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을 통해 입증되어왔다. 그 임사체험자들 중에는 실제로 천국이나 지옥에 가본 경험을 가진 자들도 꽤 많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이 없다 하더라도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영혼이 존재하고 그 영혼은 죽은 후에 영원한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착하게 살려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안 믿어도 된다. 불교나 유교나 다른 종교나 사상도 모두 착하게 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천국과 지옥이 있기 때문이고, 죽은 이후의 삶이 진짜 삶이기 때문이다. 인류역사에 등장한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을 포함해 모든 성현들 가운데서도 예수님만이 사람이 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 알려주셨고 그 죽음의 원인을 친히 제거해주셨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사실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전의 삶, 그러니까 진짜 실체를 얻어 영원히 살게 되는 삶을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한 삶이다. 사람이 죽게 되면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나옴으로써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사람의 진짜 실체인 영혼은 영원한 세계로 가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육체와 영혼이 다시 결합되어 영원불멸의 존재로 영원히 살게 된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두 종류의 영원한 거주지가 있고,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 그 거주지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져 있다면, 과연 어느 곳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롭고 합리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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