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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트니스 리의 삼일론 논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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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트니스 리의 삼일론 논박 1
  • 교회와신앙
  • 승인 2001.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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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배 총장(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참고서적

<윗트니스 리(Witness Lee)의 저서>
[1]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94-경륜)
[2]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93-삼일)
[3] 그 영, The Spirit(90-그 영)
[4] 교회(90-교회)
[5] 정상적인 교회생활의 회복(회복)
[6] 윗치만 니 (Watchman Nee)(91-윗치만)
[7] 생명의 체험과 성장(89-체험)
[8]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그리스도를 말함(88-건축)
[9] 하나님의 경륜(87-경륜)
[10] 하나님의 계시와 異象(86-계시)

[11] 그 영과 몸(85-영몸)
[12] 성경의 핵심(85-핵심)
[13] 그리스도, 그 영, 생명, 교회(84-그 영)
[14]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함(83-내주체험)
[15] 성경의 다섯가지 큰 비밀(83-비밀)
[16] 그리스도의 탁월성(83-탁월)
[17] 새언약(80-새언약)
[18] 생명 메시지(78-생명1)
[19] 생명 메시지(78-생명2)
[20] 생명 메시지(78-생명3)

[21] 생명 메시지(78-생명4)
[22] 그리스도를 체험함(78-체험)
[23] 한 몸, 한 영, 한 새사람(77-한몸)
[24]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림(71-풍성)
[25] 교회의 내용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표현인 교회(65-교회)
[26] 그리스도와 교회의 빛안에서 본 신약의 개관(64-신약1)
[27] 그리스도와 교회의 빛안에서 본 신약의 개관(64-신약2)
[28] 그리스도와 교회의 빛안에서 본 신약의 개관(64-신약3)
[29] 그리스도와 교회의 빛안에서 본 신약의 개관(64-신약4)
[30] 생명의 체험을 위한 기본원칙(63-생명체험)

[31] 성령의 역사(63-성령)
[32] 그리스도의 증가를 위해 그리스도를 누림(63-누림)
[33]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62-만유)
[34] 기도(59-기도)
[35] 생명의 체험(56-체험上)
[36] 생명의 체험(56-체험下)
[37] 영과 영 안에서의 봉사(54-영봉)


I. 서언(序言)
1-1. 비성경적
필자는 위에 실린 윗트니스 리의 책을 거의 다 읽어보았다. 한 마디로 윗트니스 리의 삼일론(三一論)은 비성경적이다. 그 원인은 첫째, 단일신론이고, 둘째, 단일신론의 근거인 성경해석의 오류에 있다.

단일신론(monarchianism)이란 하나님이 한 분뿐이라는 사상이다. 교리사상(敎理史上) 삼위일체를 부인(否認)한 모든 이단은 예외없이 단일신론이었다.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유대주의도 단일신론이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7~18). 예수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면, 하나님이 두 분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고자 한 것이다(요 5:17~18).

유대주의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삼위일체론을 부인한 사상은 예외없이 단일신론이었다. 사벨리안적인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든, 아리안적인 역동적 단일신론이든, 성부와 성자가 서로 비슷하다는 유사론적(類似論的) 단일신론(單一神論)이든, 모두 하나님이 한 분 뿐이라는 사상이다.

물론, 성경적인 삼위일체론도 하나님이 한 분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단일신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이유는 첫째, 성경의 원어와 그 문맥에 따라 순수하게 풀이하기 때문이고, 둘째, 수백년 동안에 걸쳐 좌우로 치우친 잘못된 사상을 정리하고 확립된 건전한 교리를 존중하면, 그만큼 헛된 시간의 낭비를 막을 수 있다. 기독교의 모든 건전한 교리는 이 같은 역사적 검증을 거쳤으므로 주의깊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셋째, 성경계시에 의존하는 믿음으로 신학을 세워야 한다. 자기가 세운 신학이 제일인줄 알고, 여기에 집착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함정에 빠져, 여기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몇 해 전에 최삼경 목사와 윗트니스 리측이 교리논쟁을 했다. 그 때 최삼경 목사가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변형된 양태론임을 밝히자, 반대로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최삼경 목사를 삼신론자라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결국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본다. 최목사가 논쟁 중에 '윗트니스 리의 주장처럼 한 분 하나님(성자) 안에 다른 두 분 하나님이 들어와서 한 인격이 된다고 한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양태론이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만 육신을 입었다' 라고 한 것을 가지고 삼신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양태론적 눈으로 보기 때문에 저지른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삼위일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그 본질과 속성이 모두 하나라는 것, 환언하면 삼위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분이시면서 모두 참 하나님이시며,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므로 '일체' 곧 '하나'이시다. 그러나 오직 성자만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셨으며, 오직 성령만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므로 삼위는 영원히 구별된다.

따라서 영원히 성부는 성자일 수도 없고, 성령일 수도 없으며, 성자는 영원히 성부이거나 성령일 수 없으며, 성령은 영원히 성부이거나 성자일 수 없다.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나오시기 때문에 영원히 서로 구별되시며, 동시에 '나심'과 '나오심'은 영원히 동질동등임을 증거한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기 때문에 동질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자는 성부의 좌편이 아니라 우편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보좌 앞에 계신다(계 1:4~6).

1-2. 무난한 말

1) "파라클레토스는 또한 법정에서의 대언자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영은 하늘의 법정에서 우리의 변호사이자 대언자이다"(93-삼일, 90쪽).

2) 다음과 같은 말은 거의 완벽하다: "히포스타시스(hypostasis)와 동등하게 사용된 라틴어 단어는 페르소나(persona)이다. 페르소나는 영어 단어 퍼슨(person)의 어근이다. 성경교사들은 하나님의 삼일성의 연구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 안에서 세 위격을 지니신 분이라고 말한다"(90-그 영, 19쪽).

다만 여기서 삼일성이란 말만 삼위일체로 바뀌어졌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삼일성이란 말은 라틴어의 트리니타스(Trinitas) 또는 영어의 Trinity의 번역이기에는 약간 미흡하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번역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삼위(三位)는 세 위격(位格)의 준말이기 때문에 무난하나, 일체(一體)라는 용어가 오해를 받을 소지(素地)가 있다. 한글 사전에 보면, '한 몸'과 '하나'로 되어 있는데, '한 몸'이 아니고, '하나'로 이해하면 무난하다.

진리에 근접한 말: "우리는 하나님이 위격 안에서는 셋이지만, 본질 안에서는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90-그 영, 18쪽). 이것은 상당히 진리에 가까운 말이다. 이것을 바로 잡으면, "하나님의 위격은 셋이지만, 그 본질은 하나다". 또 다음과 같은 말도 진리에 근접해 있다: "삼일 하나님의 셋에 관해서 신학자들은 헬라어 단어인 '히포스타시스(hypostasis)와 라틴어 단어인 페르소나(persona)와 영어단어인 퍼슨(person)을 사용한다. 이러한 단어들은 셋이신 하나님을 말한다"(90-그 영, 19쪽). 밑줄 친 부분을 바로 잡으면, "이러한 단어들은 셋이신 위격(位格) 곧 삼위(三位)를 뜻한다.

1-3. 정견(正見): 중생관

거듭남에 관한 다음과 같은 생각은 성경대로 바로 되었다(56-체험上, 11-14쪽):

1) 거듭나기 전의 상태: 첫째, 우리의 본성은 부패했다(렘 17:9). 둘째,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 굳어져 있다(겔 36:26). 셋째, 우리의 영은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 있다(엡 2:1). 넷째, 사람 전체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다(엡 4:18).

2) 거듭남을 체험할 때의 상태: 첫째, 우리는 바깥 행위도 부패하고, 속의 본성도 부패한 것을 보게 된다. 둘째, 우리의 마음이 통회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킨다. 셋째,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 통회한다. 넷째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접촉한다.

3) 거듭난 후의 상태: 첫째, 우리의 본성이 부패한 것을 느낀다. 둘째,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드럽게 된다. 셋째,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된다. 넷째,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갖는다. 이로써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게 된다.

비평: 다만 여기서 마지막 줄친 부분에서 생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치 않다. 만약 우리의 생명 또는 영혼과 같은 의미라면, 두 영혼이 우리 속에 있는 것으로 되어 한 인격의 단순성에 어긋난다. 만약 하나님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살아나는 것으로 보았다면, 성경적 바른 생각이라 할 수 있다(엡 2:1).

1-4. 진리에 가까운 말은 또 있었으나, 최종완성된 분이라는 말이 문제다:

찬송가 447장 1절을 인용하면서 한 말: "'참 기묘해 아버지 아들 성령 셋이나 본질 한 영이실세. 영광일세 하나님 내 맘 속에 들어와 계속 내 공급되네.' 셋이나 본질 한 영이실세 라고 말하는 대신에, 실체는 셋이나 본질에 있어서 다 하나일세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 실체를 지니시지만, 단 하나의 본질을 지니신다고 말할 수 있다"(윗트니스 리, 그 영, The Spirit, 1990, 10쪽). 여기까지는 옳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이 문제다:

"그분(성령)은 최종 완성된 분이시고, 이 최종 완성된 분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이시다"(90-그 영, 10쪽). 여기서 성령을 최종 완성된 분으로 보는 것, 이것은 성부는 성자의 모습으로, 성자는 성령의 모습으로 바뀌어져 최종 완성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계승설(successionism)이므로 비성경적이다.

1-5. 오해한 부분
"요 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 안에서 예배할지니라 한다. 오직 영만이 그 영을 접촉하고 만질 수 있다"(54-영봉, 11-14쪽).

이것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로 되어야 한다. 여기서 '프뉴마'(영)는 성령을 가리키고, '알레테이아'는 진정이 아니고, '진리'를 뜻하므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리킨다. 사람의 영은 혼과 몸과 더불어 전적으로 부패되었으므로, 온갖 더러운 것이 몸과 영이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성경은 육과 영이 모두 더러운 것이므로, 오직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는 고후 7:1을 인용하면서도 이러한 더러움은 영 그 자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혼과 몸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오염된 것이라 한다.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이 타락할 때, 혼과 몸이 관여했고, 사람의 영은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영 자체는 더럽혀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56-체험, 110-111쪽): 칠년 후에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사람의 영은 혼과 육에 의해 더럽혀지고, 영향받고, 손상받고, 망쳐지게 되었지만, 영 그 자체는 육과 혼처럼 죄 있지는 않다. … 육체 안에는 죄를 가지고 있고, 혼 안에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우리 영에 직접적인 문제가 있다고 추정할 수 없다. 이 같은 것을 시사해 주는 유일한 구절은 고후 7장 1절로 육과 영의 더러움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영의 더러움은 영 그 자체의 더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혼과 육에 속한 것으로서 영에 영향을 준다. 우리 사람의 영이 혼의 영향과 육의 손상 아래 있으므로 더럽혀진다"(63-생명체험, 233-234쪽). "영은 우리 인간의 가장 내적인 부분이고, 중심이고, 실체이다. 영은 마음보다 더 깊으므로, 참된 신실함은 영 안에 있는 것이다"(63-생명체험, 126-127, 130, 234쪽).

비평: 우리는 영을 만지거나 접촉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마신다(요 7:37~39, 20:22). 우리는 성령으로 우리의 목숨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우리는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 몸은 단지 몸만을 가리킨 것은 아니고, 이웃 사람의 영혼을 포함하여 全人을 사랑해야 하지만, 우선 몸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사람은 영만이 아니고, 몸과 혼과 영 모두를 성령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영과 혼은 관절과 골수의 구별이 있을 정도의 차이밖에 없고, 혼이 떠나도 별세하고(행 5:5), 영이 떠나도 죽는다(행 7:59).

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영으로는 기뻐하고, 혼으로는 오히려 찬양했다(눅 1:47). 주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하셨다. 여기서 영혼이란 '푸수케'로서 혼을 뜻한다.

더욱이, 고후 7:1의 해석에는 아연실색치 않을 수 없다. 육과 영이 온갖 더러운 것이라고 말씀했는데도, 영은 깨끗하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 온갖 더러운 영 안에 어떻게 참된 신실함이 있을 수 있는가! 윗트니스 리는 영과 성령을 혼동하는 일이 많고, 또 그의 '영' 지상주의는 성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 심지어 몸이나 혼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다고까지 하니,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게 되는가?(54-영봉, 30, 34쪽).

성경해석의 오류는 치명적이므로, 다음의 한 장(章)에서 다루고자 한다.

II. 성경해석의 오류

2-1. 요한복음 해석의 오류

"요1장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그 다음 장들에는 아버지의 표현인 아들이 있고, 20장22절에는 아들의 호흡이 되는 영이 있다.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 자신인 이 말씀이 어느날 사람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 우리 안에 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 거하셨다. 그 때 그분은 33년 반 동안 이 땅 위에서 사셨고, 결국에는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셨다. … 부활한 후 그는 밤에 부활된 몸으로 제자들에게 찾아 오셨다. 모든 문은 닫혀 있었는데, 그는 몸을 입고 들어오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 그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숨이 바로 수박의 즙과 같은 성령이다"(87-경륜, 56쪽).

이것은 참으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해석이다! "요1장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그 다음 장들에는 아버지의 표현인 아들이 있고, 20장22절에는 아들의 호흡이 되는 영이 있다"? 이 가운데 하나도 옳은 말이 없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를 오해하면 큰일 난다. 원문에 있는 그대로 정관사(定冠詞)의 유무여부(有無與否)에 주의하면서 번역하면, 그 뜻이 더 명백해진다: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 그리고 그 말씀이 그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여기서 '그 하나님을 향하여'(프로스 톤 데온)는 서로 대등(對等)하게 마주 보고 사랑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그 하나님'은 물론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자를 뜻하는 말씀과 '함께' 쓰여진 '하나님'은 예외없이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성경해석의 원리이다. '함께' '또' '와'와 같은 전치사와 함께 쓰여졌을 때 그러하다는 뜻이고, 주어와 술어가 서로 연결되었을 때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에서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일 수 없고, 성자 자신(聖子 自身)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요 1:1~3'의 말씀은 마치 희랍인(그리스)들, 특히 희랍철학을 의식하면서 논쟁적으로 논박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도요한 자신은 희랍철학 사상을 잘 몰랐을 수 있었겠지만, 성령께서 희랍철학 사상을 대항하여 사도요한으로 하여금 그렇게 인도하셨을 수도 있었겠다.

여하튼 요 1:1~3의 말씀은 참으로 묘하기 짝이 없다: "엔 아르케 에-엔 호 로고스"(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 라는 말씀은 희랍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을 것이다. 희랍철학자들이 주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이미 말한 '로고스'는 피조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말씀'이 태초 전에도 계셨고, 태초에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계속 '계시니라'(과거미완료) 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놀라운 말씀은 "호 로고스 에-엔 프로스 톤 데온"(그 말씀이 그 하나님을 향하여 계시니라)이다.

그 말씀이 어떠한 분이기에 감히 그 하나님을 향하여 대등하게 마주보고 계속 계실 수 있었느냐 라는 것이다. 바로 그 다음 말씀이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데오스 에-엔 호 로고스"(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라). 여기서 보어인 '하나님'이 맨앞에 나온 것은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시거나, 성부의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 있지 않는가! 사도요한은 다시 한번 되풀이하여 강조한다: "후토스 에-엔 엔 아르케 프로스 톤 데온"(이 분이 태초에 그 하나님을 향하여 계시니라)! 놀라지 말라! 이 분은 또 천지를 창조하셨단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말씀)가 없이는 지으신 만물이 하나도 없었단다! 이것을 피동문으로 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요 1:1~2을 오해하니까, 1:14의 말씀도 바로 해석되어질 수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 자신인 이 말씀이 어느날 사람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87-경륜, 56쪽). "하나님 자신이 어느날 사람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성경 어디에 이러한 말씀이 있는가? 요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하나님 자신이란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라고 했고, 이 말씀은 아버지의 독생자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윗트니스 리는 또 승천을 부인하는 듯한 말을 한다: "그 때로부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다고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가? 이 복음은 부활한 주님이 제자들에게 오신 후 하늘로 승천하신 것을 결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 요한복음의 끝 부분에서 이 놀라운 분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 안에 있는 수박처럼 주님은 호흡인 성령을 통해 제자들 안에 계신 것이다"(87-경륜, 56쪽).

삼년 후의 글은 승천을 인정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승천을 통하여 주 예수님은 그분의 과정을 완성하셨다. 그분의 승천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분 모두가 주님의 승천안에서 완전히 완결되셨다(90-그영, 53~54쪽). 승천을 인정하든, 아니하든, 그 시비를 가리기는 어려우나, 다음과 같은 말은 이상하다: "요한복음의 끝 부분에서 이 놀라운 분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 안에 있는 수박처럼 주님은 호흡인 성령을 통해 제자들 안에 계신 것이다." 주님이 호흡인 성령으로 바뀌어졌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셔서, 영은 뼈와 살이 없으나, 자신은 있다 하시면서 음식을 잡수신 일이 있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37~43).

하나님이 한 분밖에 없다는 단일신론은 이 같은 어이없는 일, 곧 "주님은 호흡인 성령을 통해 제자들 안에 계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2-2. 고전 15:45 해석의 오류

"고전 15:45에 의하면, 그 영은 생명 주는 영이시고, 그리스도는 그 분의 부활 안에서 이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 생명 주는 영은 현재 믿는이들의 존재 안에서 역사하고 움직이고 있다. … 생명의 영은 그분의 믿는이들에게 부활 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그 영이신 공기같은 그리스도이다"(90-그 영, 20쪽).

이러한 해석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성경은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하므로 49절까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5~49).

여기서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라고 해서 몸은 없고 영으로 되었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창세기의 말씀이 증거한다. 그들에게 몸이 없었다면, 어떻게 벗은 몸이 되면서 서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고 했겠는가! 아담의 몸은 영혼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 곧 산 영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살려주는 영, 곧 그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몸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근본이 되신 분이다. 그는 길이요, 진리요, 부활이시다. 아담은 육 있는 자요,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신령한 자요, 하늘로서 나셨으니, 하늘에 속한 분이시다. 거듭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는 살려 주시는 영, 살리시는 분 곧 몸과 영이 있는 부활의 주님이시다.

2-3. 아담의 원죄인식(原罪認識) 부족

"그리스도의 죽음은 매우 효능있는 죽음이다. 아담의 죽음은 끔찍한, 멸망시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위대하고 효능있는 것이다. 아담의 죽음은 우리로 사망의 종이 되게 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사망에서 해방시켰다. 아담의 타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악의 성분을 가져 왔지만, 그리스도의 효능있는 죽음은 우리 안에서 아담에 속한 모든 요소를 처리하는 죽이는 능력이다"(87-경륜, 13쪽).

이것을 바로 잡으면, 아담의 죽음이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고, 그의 범죄가 죽음을 초래케 한 것이다. 아담이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창 2장과 롬 5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사람이 생령 곧 살아있는 영이 되었다 함은 몸에 생기 곧 영혼을 불어넣으시니, 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혼이 떠나면 죽고, 영혼이 돌아오면 산 사람이 된다.

또 인류가 죽는 것은 아담의 죽음 때문이 아니고,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이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12~21).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라는 말씀들은 모두 아담 한 사람의 범죄와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류에게 범죄와 사망이 왔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것을 원죄(原罪)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는 아담이 죽었기 때문에 인류도 죽는다는 원리는 없다. 결과(結果)와 원인(原因)을 혼동(混同)해서는 안 된다.

2-4. 이사야 9장6절에 대한 오해

"이제 이사야 9장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 그 이름은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전능한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 어린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리운다. … 만일 여러분이 성경 말씀의 권위를 믿는다면, 아버지라고 불리워진 그 아들이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우리에게는 다만 한 하나님이 계신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87-경륜, 53~54쪽).

"아버지라고 불리워진 그 아들이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우리에게는 다만 한 하나님이 계신다"?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다. 이 같은 말은 전형적인 단일신론(單一神論)임을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곧 아들이라는 주장, 정신이 없어도 그 도(度)를 넘고 있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인가? 아들은 아들이고,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가? 아무리 배우지 못한 집안의 자식들이라도 아버지를 향하여 "내가 아버지다!" 하는 자식은 없을 것이다.

성경은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1~6).

위에서 줄친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던 나사렛과 갈릴리인들을 연상케 하기에 족하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던 유대인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나사렛에서 사셨고, 갈릴리 해변가에서 오래 동안 천국복음을 증거하셨다.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직접 목격한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고아같이 버림을 당한 그들에게는 나사렛 예수가 곧 영존하시는 아버지였다! 이사야 선지는 이러한 정황을 주 예수께서 나시기 전 약 팔백년 전에 이미 예언한 것이다!

주 예수께서 우리의 아버지일 수 있다는 비유의 말씀이 주께서 드신 예증 곧 눅 15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1~24).

위에서 언급된 '목자'와 '여인'과 '아버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왜 죄인을 영접하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세 가지 비유를 드신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죄인들 곧 잃은 양들을 찾으시는 목자와 같으시고, 잃은 돈을 찾는 여인과 같으시고,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시다!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되시고, 형님도 되시고, 남편도 되시고, 목자도 되신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 사이에서는 결코 아버지일 수 없고,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시다!

2-5. 성육신 되신 예수의 제한성
"나는 주님께 부르짖었다: '오 주 예수여.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냥 그대로 제한받고 속박받으라. 보라, 나는 무한한 하나님이지만, 성육신되어 삼십년간 제한받았다. 나는 삼십년이 지난 뒤에는 네가 해방될 것이라고 약속할 수 있다"(85-핵심, 70쪽).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바로 성육신되신 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육신되어 계신다. 왜냐하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기꺼이 제한받으시고 갇혀 계시기 때문이다"(85-핵심, 70쪽).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바로 성육신되신 분이다" 라는 명제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주 예수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사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 안에 內住하시는 분은 주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의 내주에 관하여는 사도요한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성령의 내주는 곧 주 예수께서 내주하시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성령의 내주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실 필요가 없다. 그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이 사도신경이다. 따라서 주 예수는 우리 안에서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제한받으실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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