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병주 변호사(기독법률가회 실행위원, 국제국장)가 인문학 서평 사이트인 아포리아 홈페이지(바로가기)에 2014년 8월 25일 올린 칼럼입니다. 주제는 매우 무겁습니다. 길을 잃은 양 같은 한국교회 평신도의 현주소를 그리고 있습니다.
내용도 그렇습니다. 평신도의 위로받는 신앙의 ‘과잉’과 ‘왜곡’을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씨름하는 신앙, 세속과 싸우는 믿음으로 나가야 할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주제는 무거운데 글이 매우 따스합니다. 사회와 교회의 급진적 변화를 바라는 조급함에 대해서는 시간의 무게감을, 교회안에 안주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신앙에 대해서는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참 가치를 역설하며 아주 천천히 독자를 설득해 갑니다.
참고로, 이 변호사가 주장하는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는 일부에서 말하는 ‘자아의 죽음’이나 ‘자기부인, 자아 파쇄’ 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변호사의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교회나 목회자를 위한 종교적 희생, 선교사급의 ‘헌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세속화된 평신도의 실체와 교회안에 안주하며 머무르려는 죄악된 자기에 대한 부인을 하고, 사회적 차원으로 씨름하는 믿음의 십자가를 지라는 견지에서의 ‘자기 부인’입니다. A4 용지 23페이지에 이르는 원 글을 3차례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측에 있습니다. [편집자주]
[이병주 칼럼]: 길을 잃은 양들, 한국교회 평신도의 현주소
1. 평신도의 믿음 - 위로받는 믿음 vs. 씨름하는 믿음
우리 평신도들의 믿음에는 ‘위로받는 믿음’과 ‘씨름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위로받는 믿음’에서 시작해서 ‘씨름하는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개신교) 평신도들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위로받는 믿음’만을 구하고 ‘씨름하는 믿음’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또한 ‘위로받는 믿음’만을 가르치고 ‘씨름하는 믿음’을 가르치지 않거나 가르칠 능력이 없다는 점으로 느껴집니다.
‘위로받는 믿음’은 거친 세상의 풍파 속에 갇혀서 절망하는 인간을 보며 슬퍼하고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씨름하는 믿음’은 그렇게 구원된 사람을 십자가(十字架)와 자기부인(自己否認)의 길로 이끌어, 여전히 풍파가 이는 세상의 압도적인 힘과 가치관에 휩쓸려 살아가지 않도록 믿는 사람의 팔과 다리와 머리의 힘줄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는 예수님의 ‘더 큰’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러니 위로받는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평안히 누워 쉼을 누리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씨름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일어서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인생을 씨름하며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들의 신앙이 계속 위로받는 신앙에서 시작하여 위로받는 신앙만을 반복하여 추구하는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된다면, 한국 교회는 (완전히 망하지는 않겠지만) 생기와 자부심과 존경을 잃고 제 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시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백수십년의 역사밖에 갖지 않은 젊고 팔팔한 한국 기독교가 이대로 시들어 버린다면 우리도 억울하고 하나님도 억울합니다. 수많은 문제점과 스캔들과 답답함과 분열과 지리멸렬과 압도적인 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이제 막 구원받은 사람들의 감격과 기쁨의 에너지가 강력하게 살아있습니다. 이 강력한 믿음의 에너지가 안타깝게도 지금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타고 ‘세상이 주는 평안’을 추구하는』 ‘위로만 받으려는 믿음’의 울타리, ‘위로받는 믿음’의 감옥(監獄)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교회의 에너지가 강력하니 그것이 왜곡되게 발현되는 이기적 양상도 강력하고 폭발적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묶이고 갇혀 있는 신앙 에너지의 해방(解放)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위로만 받는 신앙’에서 ‘씨름도 하는 신앙’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믿음과 교회의 자랑과 자부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평신도들 입장과 관점에서의 적극적인 고민과 토론과 연구와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계속하여 위로만 받는 신앙을 추구한다면 목회자 등 교회 지도자들이 그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씨름하는 신앙’의 구체적인 모습과 내용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그것을 대신 만들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셋째 목회자들만이 주도하고 평신도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사제주의적 신앙생활의 행태는 확실히 성경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출발 이념에도 맞지 않으며 현실세계의 신앙적 조건에도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2. 평신도 신앙의 현실 분석 -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過剩)과 ‘씨름하는 믿음’의 결핍(缺乏)
2.1. 평신도 신앙의 두 국면(Phase) – ‘만나는 신앙’과 ‘살아가는 신앙’
⓵ 평신도 믿음 생활의 첫 번째 국면 (1st Phase) - 고독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
세상은 거칠고 악하고, 인간은 연약하고 또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독하고 힘듭니다. 무한 경쟁의 세상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몰아대면서, 삶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삶의 고통과 고독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삶의 고통을 좀 더 솔직하게 직면하고, 부유한 사람은 삶의 고통을 세상의 자랑으로 덮어버리려고 하지만 이것도 만족이 불가능한 쉬지 않는 갈증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끊임없이 인생의 고독과 고통에서 자기를 구원해줄 ‘사랑’을 애타게 노래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을 구원해 줄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을 완전히 사랑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모든 사랑 노래는 오히려 「오지 않는 사랑」의 안타까움과 「떠나버린 사랑」의 슬픔만을 애절하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에게 위로받기를 원하지만, 온전한 위로를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론 우리는 서로 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수시로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거칠고 차가운 눈초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뜻이 통하는 친구들과 나누는 다정한 시간과 부모 자식 간의 살가운 보살핌, 그리고 부부간 남녀 간의 친밀한 동행관계가 없다면 사람은 아예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정과 애착관계는 영원하거나 온전하지 않고, 마치 양날의 칼처럼 우리를 심하게 할퀴고 넘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가장 강력한 사랑의 원천이자 인생의 존립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가족관계는 동시에 인생의 가장 깊고 오래가는 상처들을 만들어내는 갈등과 고통의 생산 공장(工場)이기도 합니다. 같은 뜻으로 통하여 서로를 기뻐하던 동료와 동지들도 시간이 흐르면 점점 뜻이 갈라져 부딪치고 싸우는 비난과 논쟁의 대상으로 변합니다. 내가 극도로 힘들어지면 다정한 친구들도 나를 도와줄 능력이 없고, 친구가 극심하게 힘들 때 우리는 벗에게 손을 내어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우리가 넘어지고 부러지고 무너질 때,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줄 힘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경험합니다. 고독한 인생의 실존(實存)이 하나님을 만나서 ‘위로받은 믿음’은 ‘(세상에서) 죽었던 내가 (믿음으로) 살아나는’ 감격과 기쁨을 줍니다. 더 이상 사람에게서 불완전한 위로를 받으려고 애쓰고 기댈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에게로 나와서 강력한 평안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해방감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서 위로받는 믿음은 우리 믿음의 출발점이 되고,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위로받는 믿음의 분량은 첫 만남의 일회적 감격과 기쁨만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고독하게 살아가던 인생의 기간과 무게만큼 상당기간 반복적인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생의 깊고 누적된 고독과 상처가 치유를 받고 건강한 영혼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 믿음을 가진 후 초심자 시절 몇 년 동안 우리가 전혀 지루해 하지 않고 (미친 듯이) 열심히 예배와 기도와 성경 말씀에 매달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떡을 먹는 것보다 말씀을 먹는 것이 더 달콤합니다. 이 기간 중 우리는 세상에 있어도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감격만이 중요하고 세상이야 어찌되었든지 별 상관이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이 없고 구속(救贖)한 주(主)만 보이는’ 우리 신앙의 첫 번째 국면(1st phase)입니다(찬송가 288장).
⓶ 평신도 믿음 생활의 두 번째 국면 (2nd Phase) - 믿는 자로 세상에서 다시 살아가는 신앙
이제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많은 위로를 받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어도 세상에서 먹고는 살아야 합니다. 혼자서도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이 생기면 먹고 사는 부담이 더 커집니다. 원하는 학교에도 진학해야 하고 취직도 해야 하고 장사도 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과 경쟁도 해야 하고 직장에서 승진도 해야 합니다. 거룩한 일에 바치는 시간보다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에 바치고 투자하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나와 내 가족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평신도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믿음의 일에 집중하려고 세상의 직업을 버리고 목회자의 길을 걷는 분들의 인생이 여기에서 갈라집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목회자들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교단이 사실상 무력화된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취직을 하든지 개척을 하든지 자기 개인의 책임으로 됩니다. 이 지점에서 갈라졌던 목회자의 삶과 평신도의 삶은 의도와는 달리 다시 만나게 됩니다. 분명히 다른 점도 있고 분명히 비슷한 점도 있습니다. 목회자의 삶에서도 거룩한 것에 세속적인 것이 달라붙고 평신도의 삶에서도 세속적인 것에 거룩한 것이 연결됩니다. 그 나타나는 모습의 선후는 다릅니다. 그 본질이 다른지 비슷한지는 차분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갑니다. 변한 사람이 되어 변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세상도 돌아오고 나도 돌아온 상태에서 구속한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평신도 신앙의 두 번째 국면(2nd phase)입니다. 이제 믿음의 황홀경은 지나갔습니다. 온탕과 냉탕을 오고갑니다. 신앙의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합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끼어 삽니다. 말씀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떡도 있어야 삽니다.
믿는 사람이 되고 나서 세상의 일을 하면, 안 믿을 때보다는 덜 고독하고 더 평안하고 안정감이 생기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고통과 고독과 풍파는 다시금 믿는 사람에게도 어김없이 닥칩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몰아대는 세상은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변함이 없고, 연약하고 이기적인 우리의 기질도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큰 차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은 후에도 세상과 부딪히고 아내와 싸움질을 하고 자녀들을 몰아대고 친구와 직장의 동료와 세상의 정적(政敵-정치적 반대파)들을 미워하고 감정적으로 대립합니다.
믿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덜 힘들기도 하지만, 믿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더 한심하기도 합니다. 믿기 전의 인생은 고통스러웠지요. 믿은 다음의 인생도 비슷하게 고통스럽습니다. 믿기 전의 인생은 고독했습니다. 믿은 후의 인생도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빼놓고는) 거의 고독합니다. 믿기 전의 세상은 우리에게 가혹했습니다. 믿은 후의 세상도 우리에게 여전히 냉정합니다. 믿기 전의 나는 불안하고 위험했습니다. 믿은 후의 나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뭔가 ‘바뀐’ 것은 분명한데 세상의 풍파와 인생의 힘겨움은 별로 변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믿기 전에도 사는 것은 매우 힘들지만 믿은 후에도 사는 것은 아주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만나 ‘위로받는 믿음’이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믿기 전에도 눈물을 흘렸고, 믿을 때에도 눈물을 흘렸지만 믿은 뒤에도, 아주 오래 믿은 후에도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믿는 이들에게는 바로 이 ‘위로받는 믿음’의 간증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칠고 악한 세상 속에 사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위로받는 믿음’은 믿음의 시작이자 필수적인 실존적 믿음의 원천으로 됩니다. 지금 아무리 한국교회가 욕을 먹어도, 지난 백 수십 년간 땀과 기도와 헌신으로 쌓아올린 한국교회(개신교)에는, ‘망국(亡國)과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과 독재와 가난’이라는 인간사(人間事)의 모든 괴로움을 한데 모아서 극단적으로 고통스러웠던 우리 현대사(現代史)와 동행하면서, 그 속에서 무너지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절망하고 지치고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님을 아는 기쁨으로 인생을 감당하게 해 준 ‘위로받는 믿음’의 위력과 공덕(功德)이 있습니다. ‘위로받는 믿음’의 일탈이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의 출발점이자 기반(base)인 ‘위로받는 믿음’ 그 자체를 경시하거나 부정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너무 건조(dry)해 지고 물이 빠진 시들은 가지처럼 에너지를 잃고 비틀거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이제 ‘위로받는 믿음’의 지나친 반복과 재생으로 인한 왜곡과 부작용에 대한 검토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2.2.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으로 인한 왜곡
⓵ –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평신도 신앙
모든 좋은 것에는 악이 달라붙습니다. 의도적인 잘못이 있든지 의도적인 잘못이 없든지, 우리를 살리는 좋은 것은 잠시 긴장을 푸는 사이에 나와 우리를 죽이는 악을 만들어냅니다. 항생제는 바이러스로부터 우리 몸을 지켜주지만, 너무 많은 항생제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위로받는 믿음’은 그 속성상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라는 개인적(個人的) 성격을 강하게 가집니다. 세상에서 무너진 사람이 믿음으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위로를 받는 우리 믿음의 첫 번째 국면(1st phase)에서는 당연히 ‘위로받는 믿음’의 개인적 요소가 절대적입니다. 마땅히 믿음의 젖을 먹고 믿음의 걸음마를 배우고 서서히 믿음의 이유식(離乳食)을 먹고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기에게 세상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거나 세상과 삶의 부조리와 싸우라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어린 아이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얘기해도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아먹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을 가지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평신도 믿음의 두 번째 국면(2nd phase)이 문제로 됩니다. 믿는 자의 인생도 힘겨우므로 믿음을 가진 후에도 ‘위로받는 신앙’이 계속 필요하다는 점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문제(問題)의 핵심은 이 단계에서도 우리들 평신도 신앙의 대부분은 ‘위로받는 믿음’만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구하는 무한재생(repeat)의 양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유아기(幼兒期)를 지나면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물결에 맞서 씨름하고 싸워야 하는데, 믿음의 청장년기(靑壯年期), 믿음의 성년기(成年期)에도 싸우지는 않고 자꾸 세상에 얻어맞고 돌아와 하나님께 위로해 달라고만 합니다. 여기에서 아름답고 좋은 ‘위로받는 믿음’의 남용과 오용으로 인한 문제점과 신앙의 왜곡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위로받는 믿음’만을 계속 추구하면, 우리 평신도들이 신앙으로 구하는 위로의 내용이 갈수록 그 질(質)이 떨어지고 세상적인 가치로 가득 채워지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만날 때 평신도 믿음 생활의 첫 번째 국면에서 얻는 위로(慰勞)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 위로에는 한 사람 인생의 고통과 고독 그 전부의 중량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존재(存在)’의 혁명과도 같습니다. 이 위로는 고상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결정적입니다. 이 구원의 위로에는 인생의 세세한 내용과 요구와 이익이 별로 끼어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아름다운 첫사랑입니다.
이제 평신도 믿음 생활의 두 번째 국면에서는, 이 위로의 내용에 조금 변화가 생깁니다. 믿음으로 살아난 사람이 다시 세상에 나가서 남들과 똑같이 일하고 먹고 가르치고 다투면서 살아갑니다. 믿음은 결정적인 약이지만 만병통치약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취직과 학업과 직장과 사업과 사회생활과 건강상으로 여전히 힘들고 답답하고 어려운 일들을 경험합니다. 아버지(하나님)가 없었을 때에는 혼자서 울고 몸부림쳤었는데 이제 믿을만한 아버지가 있으니 교회로 와서 기도를 하면서 이 세상적 어려움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합니다. 믿음을 시작한 처음에는 세상의 것들을 허무하게 여기고 하나님만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서서히 세상의 것들을 다시 찾아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구합니다. ‘취직과 성적을, 재물과 안정을, 직장과 사업의 성공’을.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은 조심하면서,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가 아무리 어마어마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현실적 실존적 과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고 구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고상하고 우아하고 (다소 가식적인) 기도만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정색을 하고 따져 보아야 할 문제는, 과연 ‘우리의 현실적 과제와 세상적 소망에 대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自由)이지요. 기도를 들어주시고 말고는 하나님의 자유(自由)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필요가 없는 것에, 우리가 매달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억지로 끌어오려는 것은 어리석고 잘못되고 참람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들이 교회와 신앙모임과 개인기도의 시간에 수없이 반복해서 물어보는 것이지만, 사실 그 대답은 성경에 거의 100% 분명(分明)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비참한 사형수로 돌아가시게 한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세상적 성공과 자랑과 명예에 대한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실 필요나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에서 분투하고 실패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좌절하고 다치고 아프다가 병들어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이 직면할 현실(現實)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 일들을 회피할 수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금 어렵고 빡빡한 얘기지만, 원칙적으로 ‘믿음은 믿음이고 취직은 취직’이며 ‘믿음은 믿음이고 성적은 성적’이며, ‘믿음은 믿음이고 생업은 생업’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나’를 위해서 동원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눈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특정한 일자리에 믿는 사람을 취직시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고 신앙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세상과 직장에서 잘 풀리게 만드셔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착하고 봉사하는 기독교 신자라고 해서 그가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기도록 밀어주셔야 하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세상의 사적 경제생활과 공적 사회정치생활에는 각각 그 자체의 고유한 작동원리와 운동법칙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따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짧게 기도를 하고는 곧바로 세상에 나가 세상의 법칙에 따라 내 팔과 내 다리와 내 머리를 쓰면서 착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의 산출물이 많거나 성과가 좋으면 감사하고 일의 산출물이 적거나 성과가 좋지 않으면 감당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일하고, 사회의 구조적 잘못은 집단적으로 다투고 고쳐야 합니다. ‘결과가 좋은 것-세상의 자랑이 많아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조심하라고 경계하신 세상 사랑(‘the boasting of what you have and what you do’-요한일서 2:16-17)으로의 유혹입니다.
‘결과가 안 좋은 것-세상의 자랑이 적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나 무관심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의 정신(spirit)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가난한 사람의 복(누가복음 6:20)입니다. 서점의 기독교 코너에 넘쳐나는 축복과 성공의 간증 스토리들은 대부분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는’ 스토리가 아니라 ‘먼저 자기 나라와 자기의 뜻을 구하는’ 성공담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위하여 나를 세상 속에 높이 들어 올리셨다.’는 주장은 대부분 거짓말이거나 자기기만입니다. 미안하지만, 쓰는 사람도 거짓이고 파는 사람도 거짓이고 사는 사람도 거짓입니다. 그냥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갔다’ ‘내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솔직하고 정확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서 좋은 대학에 갔고 열심히 교회 봉사해서 사업에 성공했다는 것은 기독교신앙의 간증이 아니라 성공신앙의 간증입니다.
기독교인이건 기독교인이 아니건, 주어진 사회와 인생의 조건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를 쓰는 것, 우리가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경제적으로 성공을 이루고 사회적 명예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 그것을 금지하고 억제하는 것이 가능한지, 또 그것을 억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경계하신다는 것’, 이 문제에 대한 ‘사람의 이해관계와 하나님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까지는 알 것 같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적 성공과 안정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느 정도 우리의 자유이고, 그런 기도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배척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셨던」 ‘위로받는 믿음’의 시작이, 그 과잉된 재생반복을 통하여 거꾸로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적 욕망에 비끄러매어 끌어당기려는」 ‘위로받는 배신(背信)’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진지하고 착한 기독교 평신도들은 이 점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만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3.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으로 인한 왜곡
⓶ – ‘세상과 화합(和合)하는 평신도 신앙’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過剩)은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위로’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세상적 위로’로 변질하게 만들었습니다. 평신도 믿음의 첫 번째 국면(1st phase)의 위로는 ‘세상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두 번째 국면(2nd phase)의 위로는 ‘세상의 헛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으로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고 논리필연적으로 세상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화합하는 기독교 신앙,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긴장과 갈등도 느끼지 않는 평신도의 신앙을 만들어냅니다.
첫 번째 위로에서는 하나님과 세상이 혁명적으로 대립하였는데, 두 번째 위로에서는 하나님과 세상이 사이좋은 동맹관계로 변했습니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 같은,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포도주가 물로 변하는 것 같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평신도의 체감적 신앙 차원에서의 진술입니다.) 이 기적의 결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우리가 세상을 따라 구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 존재했던 긴장은 거의 다 해소되어 버립니다. 한량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오해가 일어나고, 여기에 ‘축복’이라는 단어가 주문(呪文)처럼 사용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자 우리가 세상에서 구하는 모든 것, 즉 사적·경제적 생활영역에서의 성공과 공적·정치적 생활영역에서의 성공, 좋은 점수와 진학과 좋은 직장에의 취직과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성공과 명예와 권력은 모두 갈등 없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믿는 자들이 물질적 성공을 누리고 세상의 큰 사람이 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주 교묘하고 정교한 개념조작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세상의 영향력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세상을 믿는 맘몬 신앙의 완벽한 통일이요 일치요 화합이요 통합이요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의 이러한 변질과 왜곡에 대한 책임은 첫째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을 받았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 평신도들의 이기적인 본성과 연약한 종교성 탓일 것이고, 둘째는 이러한 이기심과 종교성을 방조·조장해온 한국 교회와 강단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기독교의 이 완벽한 통일을 가로막는 단 하나의 장애(障碍)는, ‘세상의 형통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세상의 형통 때문에 하나님을 덜 열심히 믿는 것’입니다. 이 장애를 피하는 것은 일차원적으로 간단합니다. 세상의 형통을 누려도 계속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쉽고 논리적으로도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의 축복을 받았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하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조금 시니컬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이 1등, 세상이 2등’이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서 순서만 바꾸지 않으면 안전합니다.
정의(definition)가 모호하고 열린 개념(open concept)인 ‘축복(祝福)’이라는 말은 블랙홀(Back Hole)처럼 하나님과 세상, 기독교의 믿음과 세속적 욕망을 모두 빨아들여 뜨거운 열로 용해시키고 하나로 합일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보면 얼핏 이상해 보이는 일들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한국경제의 성장이라는 축복의 주역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화를 모시고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어쨌든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국경제의 축복을 자랑하며 자본주의를 절대시하는 것도, 경제성장에 더 초점을 두는 보수정당을 격렬하게 지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일입니다. 개별 교회가 누리는 인적·물적 성장과 성공의 영적 축복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물질적·사회적 성장과 성공이라는 경제적 정치적 축복과 다분히 닮은꼴입니다. 기독교를 탄압하지만 않으면, 교회가 이 세상의 권력과는 싸울 일이 없습니다. 독재정권이라도 기독교의 활동과 선교와 전도에 협조적이기만 하면 이 세상의 권력을 축복하고 격려하고 친근하게 동맹하고 동행합니다.
이상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해야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편안하게 사랑해도 되는 것은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는데,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뭐 우리가 지고 갈만한 마땅한 십자가가 없습니다. (이것은 평신도 신앙에 관한 진술입니다.) 교회 일에 열렬히 봉사하는 것, 믿는 일에 최대한의 시간을 내는 것, 이 정도가 그나마 쓸 만한 질 만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이것은 믿는 자로서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닙니다. 교회 일 믿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주고받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식의 계산으로도 우리에게 별로 손해가 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화합하는 믿음은 예수님과 성경의 어려운 말씀들을 모두 쉽게 만들어서 희석해 버립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불신자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믿으라는 의미로만 해석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즉 교회당’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니 교회를 다니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요한일서의 말씀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제한해석하고 조금씩 자제하면 됩니다. 이건 너무 쉽습니다. 믿음이 이 정도로 편안한 일이라면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매달려 온갖 수모와 고통을 받으면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셔야 했는지 조금 억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세상의 완벽한 일치와 화합, 세상과 갈등하고 긴장하지 않는 편안한 믿음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아닙니다. 세상과 화합한 믿음은 세상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요한일서 2:16-17)도 진지하게 따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보다는 자기를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자기의 십자가를 벗어버리려는 소원을 갈구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믿음에는 무슨 실질적인 내용물(內容物)이 별로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의 일들,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 있다,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긴장(緊張)이 필요(必要)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과 원리에 적응해서 따라 살면서도 하나님의 원리와 법칙으로 그것을 재해석하고 부대낌을 경험하며, 세상이 주는 시험을 하나님의 원리로 받아넘기고, 힘을 내서 반격하여 다투는 믿음의 씨름과 긴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 믿음은 맛을 잃은 소금처럼 땅에 떨어져 밟히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세상과 너무 일체화된 기독교, 세상의 가치와 사이좋은 동맹관계를 맺은 우리 한국 교회(개신교)는 벌써 세상에 의해 고통 받는 사람들, 세상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배척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탄압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회개를 요구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 개신교 평신도들은 잘못을 저지른 일부 교회의 목사님들 때문에 억울하게 욕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살아온,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일체화된 우리 자신의 평신도 신앙 때문에 스스로의 책임과 잘못으로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평신도 신앙, 세상과 화합하는 평신도의 믿음은 다음으로 ‘교회의 울타리에 갇힌 평신도 신앙’과 ‘세상일에 무관심한 평신도 신앙’을 만들어냅니다. 이 일들은 서로 무관하거나 상충되는 것 같지만, 논리적으로 오히려 긴밀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신앙’이 평신도의 발걸음을 주로 교회로 이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화합하는 신앙’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세상과 갈등하면서 씨름할 만한 일 자체가 없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딱히 할 만한 신앙적 활동이란 것이 없어지고, 자신의 신앙적 열정을 교회 봉사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세상과 화합하는 신앙은 또한 ‘신앙과 세상의 대립과 갈등, 인생과 믿음의 모순과 긴장’에 관한 평신도의 신앙적 고민을 없애거나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거룩함’은 세상에 없고 세상과 구별된 ‘교회’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믿는 사람은 액면(額面)상 교회의 일만 생각하고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초월한 듯한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참 묘(妙)합니다. 세상을 무시(無視)하는 것과 세상에 항복(降伏)하는 것이 서로 아귀를 맞춘 듯이 딱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인생의 통합이라는 숙제가 이상한 세트(set) 메뉴로 달성됩니다. ‘성(聖)과 속(俗)의 외면적 단절(斷絶)을 통한 내면적 통합(統合)’이라는 모습으로.[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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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이병주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 변호사 자격을, 2001년 미국 Harvard 법률전문대학원에서 법학 석사(LLM)를,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법무법인 세종에서 2013년 6월까지 재직했다.
2006년 '빛과 소금' 잡지에 운동권에서 기독교인 변호사로 전환한 인생 역경을 담은 글을 발표한 이후, 기독법률가회의 활동적인 멤버로서 세상속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삶과 고민에 관하여 많은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