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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개독교로 불리는 이유... ‘긍휼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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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개독교로 불리는 이유... ‘긍휼없음’
  • 기독법률가회 이병주 변호사
  • 승인 2014.08.12 0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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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과 삶이 결합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왜곡

A4 용지 27페이지에 이르는 장문의 글입니다. 필자 이병주 변호사(기독법률가회 실행위원, 국제국장)는 이 글을 지난 6월 30일 인문학 서평 사이트인 아포리아 홈페이지(바로가기)에 칼럼으로 올렸습니다. 시일도 한달이 넘게 지났습니다. 시일이 지난 장문의 글인데도 뉴스 사이트에 게재하는 것은 법률가이자 크리스천인 필자가 보수·진보에 대한 정치적 견해, 세월호 사건으로 살펴본 사회와 일부 크리스천들의 본질적 문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이유 등을 너무도 치밀하게 조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격조와 품위는 물론 조명의 깊이를 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지합니다. 긴 글이지만 꼭 일독을 권해 드리며 글 게재를 허락해 주신 변호사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주>

‘욕먹는 기독교’에 대한 ‘평신도의 고민’

「사(私)와 공(公)과 초월(超越)」의 혼동에 관한 문제

[목 차]
1. 두 개의 문제 - 욕먹는 기독교와 평신도의 고민
2. 욕먹는 기독교
2.1. 욕먹는 목사님들
2.2. 욕먹는 장로님
3. 평신도의 고민과 질문
3.1. 세월호가 던져 준 질문
3.2. 욕먹는 기독교를 믿는 평신도의 고민과 질문
⓵ 긍휼 없는 기독교 (No Mercy Christianity)
⓶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기독교 (Politically Biased Christianity)
⓷ 사(私)생활에 치우친 ‘성도(聖徒)의 생활원리’
- 개인주의 기독교 (Privatized Christianity)
⓸ 평신도의 시청자적 수동성 – 구경하는 기독교 (Bystander Christianity)
4. 욕먹는 기독교의 원인 분석 - ‘사’와 ‘공’과 ‘초월’의 혼동
4.1. 인생의 세 가지 요소 - 「사적 영역, 공적 영역과 초월적 영역」
4.2. ‘사(私)’의 힘
4.3. ‘사(私)’와 ‘공(公)’의 관계 – 보수와 진보
⓵ ‘공’의 중요성과 ‘사’의 규정력 – 보수와 진보의 방정식
⓶ ‘보수’의 한계와 ‘진보’의 약점 - ‘공’이 없는 ‘사’와 ‘사’를 모르는 ‘공’
4.4. ‘사(私)’와 ‘공(公)’과 ‘초월(超越)’의 관계 – (기독교인의) 사적/공적 인생과 초월적 신앙
4.5. ‘공’과 ‘초월’의 혼동 -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기독교
⓵ ‘초월(超越)’과 ‘공(公)’의 관계 – ‘하나님’과 ‘보수’와 ‘진보’
⓶ ‘초월(超越)’을 통한 ‘공(公)’의 보완
– 보수와 진보의 전투적 공존, ‘공적(公的) 자기부인’과 ‘공적(公的) 이웃 사랑’
⓷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기독교 - 개인의 ‘공’적 의견과 하나님의 ‘초월’적 뜻의 혼동
4.6. ‘사(私)’에 오염된 ‘초월(超越)’, ‘공(公)’이 사라진 교회
⓵ ‘초월(超越)’과 ‘사(私)’의 관계 – ‘자기 사랑’과 ‘자기 부인(否認)’의 갈등
⓶ ‘사’에 오염된 ‘초월’, ‘공’적 기능이 없는 교회
5. 마치는 말 : 욕먹는 기독교를 위한 모색, 기독교 평신도의 분발


1. 두 개의 문제 - 욕먹는 기독교와 평신도의 고민
두 개의 문제를 우리 앞에 놓고 풀어보려고 합니다. 첫째 문제는 ‘욕먹는 기독교(개신교)’의 현상과 원인에 대한 것이고, 둘째 문제는 욕먹는 기독교를 믿는 ‘평신도의 고민과 모색’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하 이 글에서 “기독교”라고 할 때에는 “기독교(개신교)”만을 의미합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사회 전체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사적(私的) 시장기능과 공적(公的) 국가기능 모두가 오작동 내지 기능마비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의 기독교가 사회적 논란 속에서 안팎으로 욕을 먹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개신교)가 전체로서 ‘시험에 든’ 양상입니다. 신앙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이 제시하는 모범답안은 교단마다 교회마다 목사님마다 여러 가지로 또는 정반대로 갈립니다. 어느 한 가지 모범답안을 보고 베껴 쓰는 것만으로는 100점을 맞을지 0점을 맞을지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틀리더라도 우리 기독교 평신도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문제를 풀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벌어진 ‘욕먹는 기독교’의 문제는 단지 기독교인들에게만 던져진 문제가 아닙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사회와 국가의 기능에 관한 본질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이를 둘러싼 논쟁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갑자기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조연급 플레이어(Player)로 뛰어 들어서, 일부 목사님들의 긍휼 없는 발언이 사회적으로 큰 욕을 먹었고(조광작·오정현 목사 등) 총리 후보자가 되었다가 사퇴한 어느 장로님의 교회 강연내용과 역사관이 커다란 사회적 쟁점이 되었습니다(문창극 장로). 이에 대해서는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들(특히 평신도들)도 큰 혼란을 느끼지만, 교회에 다니지 않는 비기독교인 시민들도 (그저 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두 가지 범주의 친구·동료들과 토론을 나누기 위해서 쓰려고 합니다. 첫째는 욕먹는 기독교를 함께 믿으며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동료 기독교인, 특히 평신도들입니다. 이제는 사회와 교회의 중간에 끼어 생활인이자 시민이자 신앙인으로 세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평신도들의 입장에서 느끼는 신앙적·시민적 혼란과 질문을 솔직하게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최근의 기독교 논란에 대하여 진지하게 ‘기독교인 쪽에서의 성의 있는 설명’을 요구하는 비기독교인 동료 시민들입니다. 과거 욕먹는 목사님들의 문제들은 주로 교회 내부의 문제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욕먹는 장로님의 역사관 문제에서는 교회 안과 바깥 사이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가 함께 보수와 진보, 역사관과 신앙관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욕먹는 기독교

2.1. 욕먹는 목사님들

모든 국민이 다함께 슬퍼하며 먹먹한 안타까움에 싸여 있는 세월호 사고의 한복판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부각된 종교가 하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개신교)입니다. 2014년 6월 10일 세월호 유가족대책위원회는 전 한기총 부회장 조광작 목사와 사랑의교회 오정현 담임목사를 세월호 희생자와 가족들을 모욕한 혐의로 형사고소했습니다.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 다른 종교에서는 조용히 위로에 힘쓰고 있는데 유독 개신교에서만 나타난 일입니다. 한 목사님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나 가지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났는지 모르겠다. 대통령 눈물에 같이 울지 않는 사람들은 백정이다.”라고 말했고, 다른 목사님은 세월호 가족들의 대응과 관련해서 “국민들이 미개하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핑계 여하를 막론하고 공감능력을 결여하고 잃어버린 ‘사고(事故) 종교’의 모습입니다.

한국 기독교(개신교)가 교회 안과 밖에서 욕을 먹는 일은 그동안 수년간 한기총 매표(買票) 부정 사건, 삼일교회 사건, 사랑의교회 사건, 여의도순복음교회 사건 등으로 이어진 개신교 지도자들의 사고와 스캔들을 통해서 이미 충분히 익숙해진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건들에서 한국의 개신교회는 기본적으로 세속 시민사회가 운영되는 법과 윤리와 상식의 일반기준(general standard)에도 크게 못 미치는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2.2. 욕먹는 장로님

강경 보수의 입장에서 항상 당당하고 가혹하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고 심판하던 언론인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사람이 총리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그동안 사방으로 날렸던 심판과 정죄의 화살들이 부메랑이 되어 그를 향한 심판과 정죄의 화살로 되돌아 날아왔습니다. 오랫동안 ‘많이 심판하던 자’가 순식간에 ‘많이 심판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문창극 중앙일보 전 주필의 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어느 큰 교회의 장로님으로 등장했습니다. 교회의 한 신앙 강연에서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볼 수 있다.”고 피력한 그의 역사관이 국민적 논란의 대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칼럼 중 “일본과의 배상문제는 40년전에 다 끝났다.”는 발언과 대학 강의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일본에 사과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마치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 강연에는 신앙적인 관념과 세속적인 보수주의 역사관이 섞여 있습니다. 신앙과는 별 관계없는 개인의 친일적 식민사관이 피력되었을 뿐이라는 비판론과 신정론(神正論, 하나님의 섭리 이론)에 근거한 신앙적 역사관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옹호론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과거 4세기 로마제국의 전역에서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관해서 대중적인 논쟁이 벌어진 것처럼, 2014년 갑자기 우리나라 사회 전체에서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기독교의 신정론이 열띤 토론의 대상으로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욕먹는 기독교의 문제영역이 크게 확대되고 심화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욕먹는 목사님의 일탈이 문제로 되었다면, 이제는 욕먹는 장로님이 나타나고 욕먹는 신앙관이 생겨난 것입니다.

3. 평신도의 고민과 질문

3.1. 세월호가 던져 준 질문

세월호 사건은 전시(戰時)가 아닌 상황에서 한 사회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많은 아이들이 생으로 배에 갇혀 있는데, 선장은 먼저 도망가고 인명을 구조하는 국가의 기능은 마비되었습니다. 정부기관들은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대통령 눈치 보는 일에 더 열심을 보였고, 언론은 있지도 않은 사상 최대 구조작전을 보도하면서 현실을 호도했습니다. 거절당하고 통곡하며 방송사로 청와대로 거리를 헤매는 희생자 가족들을 보면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같은 학부모의 입장에서 슬퍼하고 함께 분노했습니다.

과거 1997년의 IMF 사태는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던 사회에 갑자기 외환금고의 달러가 고갈되어 생긴 경제위기로 사회의 기능 중 일부가 파선(破船)한 것이라면, 이번 2014년의 세월호 사태는 목숨보다 돈을 중시하는 사적(私的) 영역의 위험과 권력만을 바라보며 국가기능을 마비시킨 공적(公的) 영역의 무능을 함께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훨씬 포괄적이고 심각한 사회의 파선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의 충격과 심각성은 우리 국민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생명의 위험에 처할 수 있고, 생명의 위험에 처했을 때 정부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는 더 이상 그냥 이대로 좋은 나라가 아니고, 무언가 해결을 하거나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또한 ‘능동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의 책임과 함께 ‘점잖게 수동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의 책임을 수면 위로 떠올렸습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이나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언론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약은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모두 무고하지 않고 언제든지 타인을 해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적(私的) 인생에 매달려 먹고 사는 일에 바쁜 우리 국민 모두에게 ‘국가와 사회의 공공기능이란 무엇인가? 나의 공적(公的)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준 것입니다.

무능한 정부에 대한 비판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자, 궁지에 몰린 대통령은 지방선거를 며칠 앞두고 TV 화면을 쳐다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기이하게도 지방선거는 ‘세월호의 눈물을 닦아주자’는 구호와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자’는 구호의 대결로 진행되었고 사실상 무승부로 끝났습니다(이 칼럼은 야당의 참패로 끝난 보궐선거 이전의 칼럼이라는 점 참고해 주세요: 편집자주). 보수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소 멋쩍게 다행이라 여기고, 진보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당황스럽고 화가 나는 결과입니다. 믿을 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야당의 한계도 한몫을 했습니다. 국가기능의 최대 무능력이 나타난 이번 지방선거는 여느 때의 선거보다 훨씬 심각한 선거였습니다. 적어도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커다란 실정(失政)을 범한 정부 여당이 참패를 하고 엄중한 경고를 받는 것이 상식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년층과 보수 표가 총결집을 해서 무승부를 만들어내고,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박근혜의 눈물’이 ‘세월호의 눈물’을 이긴 것입니다. 평상시에 나오던 50% 정도의 보수표가 최악의 실정 하에서도 거의 차이 없이 나왔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그냥 그 정부가 유지되는 편이 낫다고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심각한 질문이 던져집니다. ‘도대체 보수(保守)란 무엇인가?’ ‘왜 어떤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어떤 사람들은 진보적인가?’ ‘보수의 힘과 진보의 한계, 진보의 정열과 보수의 이기심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3.2. 욕먹는 기독교를 믿는 평신도의 고민과 질문

⓵ 긍휼 없는 기독교 (No Mercy Christianity)

세월호 사태는 사람의 생명보다 돈을 중시하는 사적(私的) 영역의 탐욕과, 권력만을 바라보며 국가기능을 마비시킨 공적(公的) 영역의 오작동과 무능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세월호 사건의 와중에서 등장한 욕먹는 목사님들과 욕먹는 장로님의 발언은 공감능력을 상실한 한국 개신교의 초월적(超越的) 영역에서의 냉혹함을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욕먹는 목사님들의 세월호 발언은 모두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긍휼이 없는 태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총리 후보자였던 문창극 장로의 교회 내 및 교회 외 발언에 대해서는 아직도 교회 안팎에서 정치적 및 신학적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가 교회의 외부에서 그리고 교회의 내부에서 비판을 받는 발언들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고통에 대한 공감의 결여’이었습니다. ‘위안부에 대한 사과가 필요 없다’는 그의 말이 욕을 먹는 이유는 위안부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결여 때문입니다. ‘일제 식민지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그의 교회 강연 내용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신정론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강연에서 우리 민족의 게으른 피와 DNA를 국외자처럼 강조하고 굳이 친일파 윤치호의 주장을 여러 차례 원용하면서 공감을 표시하는 등 그의 발언에서는 ‘식민지 시대 우리 민족의 뼈저린 고통에 대한 진심어린 공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비판받는 발언들에 대한 신학적 논란과 정치적 논란을 통해서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확정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말로는 두 가지 변론이 모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옳고 그른 것이 아니고, “긍휼 없음(No Mercy)”입니다. 틀려도 긍휼 있는 말은 욕을 안 먹을 수 있고, 맞아도 공감이 없는 말은 욕을 먹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5:7)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타인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가 타인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욕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긍휼 없는 기독교(No Mercy Christianity)”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욕먹는 기독교를 바라보는 평신도 입장에서 제기하게 되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i) 문제된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개인적 일탈인가? (ii)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인가? (iii) 신학의 문제인가? (iv) 기독교 신앙이 기독교인의 삶과 결합되는 과정에서 나온 왜곡인가? 개인적 일탈로 보기에는 문제가 너무 빈발하고 보편적입니다. 기독교의 본질로 보기에는 성경과 예수님이 억울합니다. 신학의 문제로 다루기에는 평신도의 입장에서 전문성이 약하고, 두 가지 상반된 신학적 견해는 이미 소개한 바와 같습니다. 저는 평신도의 입장에서는 가장 전문성이 있는 분야,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인의 삶이 결합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왜곡’이라는 점에 착안해 보려고 합니다.

⓶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기독교 (Politically Biased Christianity)

다음으로 욕먹는 기독교와 관련하여 저와 같은 평신도들이 많이 느끼는 고민과 질문은 정치적 견해와 교회의 가르침 간의 충돌로 인한 부대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50%의 보수정당 지지자들과 약 50%의 자유주의 내지 진보정당 지지자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보수정당 지지자와 진보정당 지지자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하나님이 한쪽 정당만의 편이라면 기독교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단호하게 보수주의만을 편드신다면 자유주의·진보정당 지지자들은 지지정당을 바꾸거나 하나님 믿는 일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큰 손해는 오히려 하나님 쪽에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쪽이든지 한꺼번에 절반의 신자를 잃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20년 가까이 우리나라 개신교단의 대표적 연합체를 자임하던 한기총은 선거철마다 거의 반공개적으로 보수정당의 후보를 지지한다고 얘기해 왔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믿는 민주당이나 진보당 지지자들은 모두 시험에 들었습니다. 급기야 이번에는 세월호 사태의 와중에 한기총 부회장이라는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울지 않는 사람은 백정이다.”라고 극단적인 정치적 발언까지 했습니다. 칠십 년대에 빈민목회를 하고 가장 서민적이고 개혁적인 목회자의 상징처럼 존경받던 김 아무개 목사님은 10년쯤 전부터 예언자적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나라 뉴라이트 정치연합의 대장이 되었습니다. 깊이 존경하던 이 분이 군복을 입은 극우단체 대표들과 함께 서서 종북 좌파 척결의 구호를 외치는 사진을 보는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모든 교단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개신교의 교단 및 교계 지도자 중의 다수(Majority)가 진보진영을 반대하고 보수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은 엄연한 종교적 및 정치적 현실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보수주의에 있다?” 이 명제에 교회 안에서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은 신앙적으로 시험에 들고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은 신앙적으로 안일해집니다. 또한 이 명제에 교회 밖에서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불편해 하고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비기독교인은 기독교를 정치적 동맹군처럼 친근하게 여깁니다. 이번에 전국민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문창극 장로 사건은 하나님의 뜻과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갈등, 그리고 이를 둘러싼 교회 안팎의 동맹관계를 가장 극명하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기독교(Politically Biased Christianity)” 이것이 평신도들이 자주 시험에 드는 두 번째 질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시험에 들고 싶지 않습니다. 한기총이 뭐라 하든, 저명한 목사님들이 뭐라고 하시든지 하나님의 뜻이 보수주의에만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 반대로 하나님의 뜻이 진보주의에만 들어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보수의 입장에서 진보는 불안하고 순진하다면 진보의 입장에서 보수는 이기적이고 악합니다. 보수 입장에서 아무리 좌파척결을 외쳐도 진보가 없어질 수 없고, 진보 입장에서 아무리 보수 타파를 외쳐도 완강한 보수를 이겨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청군이든 백군이든 한쪽 편에 끼어들어 이어달리기를 하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서로 차원이 다르지만 다른 차원 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목사님들과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평신도들도 적극 참여해서 우리 모두가 좀 더 뚜렷하고 지혜로운 논의를 벌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땅 아래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싸움에 그대로 끌어내리는 것도 잘못이고, 하나님을 하늘 위에서 구경만 하는 분으로 놓아두는 것도 잘못일 것입니다. 기독교 평신도들이 가지는 장점은 땅의 일에 대한 전문성입니다. 인생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먹고사는 생업의 복잡함과 무거움을 알고 사회 속에서 이웃들과 부대끼고 싸우고 협력하는 사적·공적 업무의 구체적인 담당자입니다. 따라서 하늘에 대한 지식과 땅에 대한 지식을 결합시키는 노력에 기독교 평신도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현실 속의 ‘편파적인 기독교’ ‘욕먹는 기독교’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매우 절실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⓷ 사(私)생활에 치우친 ‘성도(聖徒)의 생활원리’ - 개인주의 기독교 (Privatized Christianity)

다음으로 세월호 사태와 욕먹는 기독교를 통하여 가지게 되는 평신도의 고민은 「그동안 평신도들이 교회에서 배우고 실천해 온 ‘성도(聖徒)의 생활원리’가 과연 충분하고 적절한가?」 라는 질문입니다.

세월호 사고의 구조와 처리과정에서 나타난 우리나라 국가기능의 오작동과 마비에는, 다스리는 일의 권한과 책임을 맡았으나 얌전하게 위의 권력만 바라보고 책임감 있게 자기의 공적 의무에 임하지 않은 수많은 얌전하고 착한 사람들의 잘못이 들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도덕적으로 큰 하자 없는 점잖고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이번에 세월호 사건에서 나타난 국가기능 마비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전반적으로 공적 임무가 사적 이해관계에 압도당한 것입니다.

자기의 일을 소신 있게 잘 하는 것보다 최상위 권력에 잘 보이는 것이 공무원이나 언론인의 신상에 더 중요하게 됨으로 인하여 생긴 심각한 왜곡입니다. 당파적인 권력이 비당파적인 정부기능을 당파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고 왜곡시킬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공공기능을 담당하고 당당하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당파적 간신, 점잖은 간신, 아부형 간신이나 생존형 간신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국가기능에서 공(公)과 사(私)가 혼동되어 사(私)가 공(公)을 압도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私)생활에 치우친 성도의 생활원리는 공(公)생활에 관한 성도의 생활원리를 왜곡시키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개인주의적 기독교’ ‘이기적인 기독교’라는 비판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교회에서 배우고 생활에 적용하고 나누어온 평신도의 삶은 주로 사생활(私生活) 위주의 비사회적인 성도의 생활원리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니 막상 기독교인의 구체적인 공공생활에 있어서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문제에 임하면 전혀 무력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잘못과 책임에 대해서 너무 편하게 회개를 하고 너무 쉽게 용서를 받는 기독교(개신교)적 참회기도의 남용도 한몫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교회에서 독실한 장로, 집사로, 직장에서 사생활 차원에서 착하고 잘 참고 사람들하고 화평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기독교적 삶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전도하고 봉사하고 구제하는 것만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회적 책임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웃사랑은 부업(副業)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자기 삶의 본업(本業)의 자리에서 사회적, 공적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공공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기독교인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공적 책임에 관한 ‘성도의 공생활 원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 이것을 별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물론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공공정의의 관념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건 하에 미시적으로 관철시켜 낼 수 있는 공적 책임의 세밀한 내용이 함께 필요합니다. 사(私)와 공(公)의 간격을 촘촘히 채우지 않으면 현실적인 힘을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이나 운동가만 할 수 있고 시민이나 생활인은 참여할 수 없는 공적 책임은 또다시 대부분의 사람을 구경꾼으로 남겨놓게 됩니다. 그러니 최대한 추상성을 넘어서 현실성을 획득하는 것, 당파적 공익과 비당파적 공익을 다 함께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배우고 적용하는 「성도의 생활원리」에 「성도의 사생활 원리」뿐만 아니라 「성도의 공생활 원리」를 실질적으로 보충하는 것, 여기에 교회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이것이 ‘개인주의적 기독교’ ‘이기적인 기독교’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⓸ 평신도의 시청자적 수동성 – 구경하는 기독교 (Bystander Christianity)

마지막 질문은 이러한 세상적·신앙적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는 기독교 평신도들이 교회와 세상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무기력감’의 문제입니다. 우리 기독교 평신도들은 교회와 신앙에 관해서 대체로 시청자(視聽者)적 구경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 개신교의 평신도들은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서 귀로 듣기만 하고 머리를 쓰지 않는 수동적인 태도를 일관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성인(成人)으로서 세상의 일, 먹고 사는 일과 정치적 사회적 다툼에는 생사를 걸고 치열하게 임하던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신앙의 일, 신앙을 삶 속에 구현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충대충 넘어가고 교회에서 먹여주는 밥만 떠먹는 미성년자의 태도를 일관해 왔습니다. 평신도들의 수동적 신앙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개인주의적 신앙관을 따르거나 공공적인 지향의 신앙관을 따르거나 그 실질적 결과에는 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국의 개신교회 시스템이 절대적인 개별교회 체제로 되어있는 점도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개별교회는 평신도가 신앙을 얻고 기도와 봉사와 신앙생활의 훈련을 받으면서 신앙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공간이지만, 대체로 평신도를 초보 내지 중급 단계에 묶어 놓고 그 이상의 비전을 제시할 수 없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한국의 개신교회가 성장하고 한국교회의 급속성장이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될 때에는 아마 평신도들도 전도하고 봉사하고 양육하고 개교회(個敎會)의 성장 발전에 봉사하는 일을 자신의 신앙적 비전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자랑스러운 신앙생활을 영위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성장한 한국의 세계적 대형교회들이 재정비리와 무리한 건축과 윤리적 실족 등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현실 하에서, 개교회만을 중심으로 하는 평신도의 신앙적 비전은 유통기간이 지났거나 한계에 직면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론적 신학적으로는 평신도의 교회생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으나, 현실적인 느낌으로 생각해볼 때 평신도가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신앙적 일에는 한계가 있고 다소간 절제가 필요하지만 평신도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신앙적 일에는 한계가 없고 훨씬 능동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 평신도의 주된 활동장(playground)은 교회가 아니고 자기 삶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성도들의 교제를 즐기며 에너지를 얻은 후, 직장과 세상 속의 싸움이 벌어지는 자기 삶의 자리로 나가서 기독교 신앙의 원리를 사적·공적 인생 속에 녹여내어 자기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기 위해 씨름하는 평신도의 적극적인 신앙 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앉아서 설교만 듣는 평신도들의 ‘수동성’과 교회의 울타리에만 국한된 신앙생활의 ‘제한성’이, 한편으로는 평신도들의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에 대한 기독교 정신의 치열한 적용을 지극히 태만하게 하여 한국 기독교(개신교)의 실질적인 내용(contents)을 빈약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 교회에 세상의 사적 욕망과 공적 왜곡까지도 모두 집중시키고 농축(濃縮)시켜서 기독교 신앙이 여러 가지로 왜곡되는 현상을 만들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결론적으로는 소극적인 평신도들의 ‘구경하는 기독교’는 욕먹는 목사님들과 욕먹는 장로님의 문제 이상으로 욕먹는 기독교가 발생되고 유지되는 더 중요한 이유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지 말라!’는 것이 세월호의 가장 큰 교훈입니다. 평신도들도 신앙의 구경꾼 위치를 벗어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하고, 교회도 평신도들을 신앙의 구경꾼 자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방법을 제시해야 합니다. 개별 교회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어렵다면 교회 전체(universal church)가 교회 건물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 일을 함께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욕먹는 기독교의 원인 분석 - ‘사’와 ‘공’과 ‘초월’의 혼동

4.1. 인생의 세 가지 요소 - 「사적 영역, 공적 영역과 초월적 영역」

우리는 삶 속에서 동시에 세 가지 얼굴(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생활인(직업인), 시민(공민), 그리고 신앙인(종교인 또는 비종교인)으로서. ‘생활인’의 정체성은 나와 가족의 생활을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인생의 사적(私的) 영역을, ‘시민’의 정체성은 사회 속에서 이웃과 다투고 협력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공적(公的) 영역을, 그리고 ‘신앙인’의 정체성은 삶과 죽음의 한계를 보면서 그 너머의 초월적이고 영원한 것을 고민하는 인생의 초월적(超越的)이고 영적(靈的)인 영역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의 삶에는 사(私), 공(公), 초월(超越), 세 가지 삶의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든 사람의 사고와 행동에 의식적인 작용과 무의식적인 영향을 줍니다. 각 분야마다 서로 다른 원리가 작용하고, 사람들은 각 분야에서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컴비네이션(조합)의 신조를 가지고 행동합니다. {⓵ 직업적 위치 (고용주/자영업/피고용인) × ⓶ 정치적 신조(보수/자유주의·진보) × ⓷ 종교적 신념(개신교/천주교/불교/유교/무종교)}

기독교인의 삶과 신앙에도 이 세 가지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초월’이 그의 ‘사’와 ‘공’을 거룩하게 규정하기를 희망하지만, 사실은 그의 개인적 ‘사’와 ‘공’이 그의 기독교 신앙관을 규정하고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초월’이 ‘사’와 ‘공’을 이기면 기독교가 욕먹을 일이 없겠지만, 기독교인의 ‘사’와 ‘공’이 ‘초월’을 오염시키면 욕먹는 기독교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하 ‘사’와 ‘공’과 ‘초월’, 인생의 삼대 요소의 성격과 상호 관계 및 그 혼동에 관한 문제들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4.2. ‘사(私)’의 힘

‘사람은 누구든지 빵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손으로 땀을 흘려 일하고 돈을 벌어야 자신과 가족의 생존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먹고 사는 ‘사(私)’의 일은 모든 인생의 기본이자 숙명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이전에는 누구도 이 ‘사’의 영향권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사적(私的) 영역이 가지는 압도적인 힘의 근거입니다. 인생의 사적 요소는 땅에 바짝 붙어있는 현실적인 욕망의 영역입니다. ‘사’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며 선악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성악설적 세계입니다.

우리나라 인구 5천만 명 중 경제활동인구는 약 2,500만 명 정도입니다. 그 중 90%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분야 중 농공상(農工商), 물건이나 서비스를 만들고 판매하는 사적(私的) 생업에 종사합니다. 사농공상 중 ‘사(士)’는 다스리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약 100만 명에 달하는 공무원과 정치인/언론인/교육자 등 공(公)적 기능을 다스리는 직업과 초월적인 일을 다루고 가르치는 종교인/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당연히 그가 하는 공적이거나 영적인 일을 통해서 돈을 벌고 가족의 생활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공(公)적 기능에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사(私)적 이해관계가 암암리에 반영됩니다. 그리고 원활한 공(公)기능의 수행은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사(私)적 생존과 생활의 직업적 보장이 없이는 뒷받침되기 어렵습니다. 초월(超越)적인 종교인의 직업에도 사(私)가 숨어있고 그 결과 종교의 초월(超越)적 가르침은 종교인이나 종교기관의 사(私)적 측면에 의해서 오염되거나 왜곡될 수 있습니다.

4.3. ‘사(私)’와 ‘공(公)’의 관계 – 보수와 진보
⓵ ‘공’의 중요성과 ‘사’의 규정력 – 보수와 진보의 방정식

사(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여서 ‘공(公)’을 만듭니다. ‘사람은 누구도 사회의 공적 기능과 공적 정의의 보호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사회의 공적 기능과 공적 정의는 (i) 사람의 생존의 조건을 제공하고 (ii) 사람 사이에 재화를 재분배하며 (iii) 각 사람의 인격적 자유와 존엄성의 수준을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사적(私的)’으로 먹고 사는 일에 힘쓰는 사람들에게도 정치의 공(公)적 영역은 결코 무관심의 영역이 될 수 없습니다. ‘공’이 ‘사’를 보호하지 못하는 경우, ‘공’이 ‘사’를 부정하는 경우, ‘공’이 ‘사’에 압도당해서 무력화된 경우에는 공동체적으로 사람들의 인생이 무너지고 비참해 집니다. ‘사’만으로 ‘사’가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공’을 통해서 ‘사’가 지켜집니다.
(i) 우리 민족 전부가 다른 민족의 종이 되어 짓밟히며 살아야 했던 일제 식민시대, (ii) 포탄과 총탄 앞에 생명이 부초(浮草)와 같았던 전쟁시대, (iii) 사람들의 눈과 귀와 입가 모두 막히고 팔과 다리의 자유가 묶였던 독재시대는 ‘공’이 ‘사’를 보호하지 못하거나 억압하는 경우였습니다. (iv)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공(公)’만으로 살 수 있다는 착오로 ‘사(私)’의 영역을 전부 금지했다가 되돌아온 ‘사’의 반란으로 무너진 제도이고, (iv) 미국의 2008년 리만 경제위기는 ‘사’에 압도당한 ‘공’이 ‘사’에 대한 규제를 포기했기 때문에 발생한 참사였습니다. 인생의 공적 요소는 땅에서 조금 떨어져 대기 중에 떠 있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중간 영역입니다. ‘공’은 ‘사’보다는 다소 공동체주의적이고 이타주의를 주장하며 선악에 대한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성선설적인 세계와 성악설적인 세계가 혼합된 공간입니다.

사회의 공적 기능에는 ‘협력하는 공’과 ‘다투는 공’이 있습니다. 비당파적이고 협력적인 공(公)은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사적 생활의 환경을 제공합니다. 당파적이고 다투는 공(公)은 사회의 재화를 재분배하는 문제와 사람들의 인격적 자유와 자율의 수준을 확대 또는 축소하는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다툽니다. 사적 생업에 힘쓰는 사람들도, 공동체 수준의 생존과 자유가 억압되는 식민지배와 독재에 대해서는 비당파적으로 민족 내지 국민 단위의 공동체적 항쟁을 벌입니다. 공동체적 생존과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민주주의 선거 제도가 굴러갈 때에는 시민들이 각자의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적 신념에 따라 때로는 온건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선거철을 중심으로 보수정당이나 자유주의·진보정당 중 한편을 지지하면서 당파적인 정치적 의사표시와 행동을 전개합니다.

인생의 사적 측면과 공적 측면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일면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복잡하고 미묘합니다. 국가나 민족 간의 분쟁에서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와 공동체 간에 ‘공적(公的)’ 대립전선이 형성됩니다. 여기에서 약한 공동체의 구성원 중 자신들의 사적(私的) 이익을 추구하여 강한 공동체로 투항하는 자가 나옵니다. 일제식민지배에 협력한 친일파의 경우입니다. (그 결과 점령한 민족의 강경보수파는 민족주의 성향이 완강한데 점령당한 민족의 강경보수파는 민족의식이 박약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 사회 내부의 정치적 공적 논쟁은 보통 보수와 진보 간의 대립으로 나타납니다. ‘보수’와 ‘진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이하 이 글에서는 통용되는 관념에 따라 「보수(保守)는 현재의 상태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입장」, 「진보(進步)는 현재의 상태가 변하는 것을 바라는 입장」으로 이해합니다. 보수는 대체로 개인의 ‘사’적 이해관계가 사회의 ‘공’적 개입에 의해 간섭되지 않기를 바라고. 진보는 개인의 ‘사’적 이해관계가 사회의 ‘공’적 개입에 따라 규제되고 조정되는 것을 바랍니다. 사람의 정치적 공적 신조가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지는 것은 하나의 변수(χ)만을 가지고 더하기 빼기로 판명되는 일원방정식(一元方程式)이 아니며 여러 가지 변수가 복잡하게 섞여 있는 다원방정식(多元方程式)입니다.

사람을 보수와 진보로 가르는 첫 번째 차원의 공식은 ‘현재의 부(富)의 양(χ)’에 따라서 ‘사’적 영역에서 많이 가진 사람은 보수적이 되고 적게 가진 사람은 진보적이 된다는 계급투표적 공식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인 워렌 버핏이 민주당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과 한국이나 미국이나 다수의 중하층 서민들이 보수정당을 적극 지지하는 반계급투표의 양상이 이 공식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두 번째 차원의 공식은 ‘사’적 영역에서 생활인으로 지낸 시간(y)이 길수록 점점 보수적이 되고 그 기간이 적을수록 진보적이 된다는 공식입니다. 이 공식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장년층 노년층은 압도적으로 보수정당을 지지하고 청년층은 압도적으로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연령투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연령적 보수화는 나이가 들수록 경제생활을 통한 자기생존과 가족부양의 무거움과 책임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을 반영합니다. 첫째 공식과 둘째 공식을 종합하면 사람이 지키려고 하는 ‘사(私)’적 이해관계의 면적(面積)을 [현재의 경제적 부(χ)] × [경제활동의 기간(y)] 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젊을 때 개혁적, 진보적이었던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보수적으로 변화하는 것, 진보적인 80년대 학생운동 세대 중 일부가 50대가 되면서 보수정당으로 넘어가는 것도 이 공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부유한 젊은이가 진보주의를, 가난한 노인이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이 면적 공식을 통해서 납득이 됩니다.

세 번째 차원의 공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변화에 대한 수용능력 내지 수용의지, 변화수용성(z)입니다. 생활의 변동성이 작고 조그만 변화가 그 생존조건을 위협할 수 있는 농업이나 전통적인 산업 종사자가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 반대로 IT산업과 같이 새로 발전하는 산업 종사자들이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심리적 여유가 있는 미국 동서 연안지역 대도시의 민주당 지지 현상 및 우리나라의 강남 좌파 현상 등이 이 공식과 연관이 있습니다. 현 상태에서 취업이나 자기실현의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 청년세대가 절실하게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도 이 공식에 포함됩니다. 여기까지의 세 가지 공식을 합하면 사람이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선택하게 하는 ‘사(私)’적 이해관계의 부피는 [현재의 경제적 부(χ)] × [경제활동의 기간(y)] × [변화수용성(z)]의 삼차원 공식이 됩니다.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보수와 진보적 지향을 가르는 네 번째 차원의 항목은 개인의 사상적 신조 내지 신앙적 관점이라는 초월적 요소(ict)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초월적 요소는 부유한 기업가를 혁명운동에 참여하게도 하고 가난한 실업자를 극우파로 만들기도 하며 서민층 교회 신도들을 정치적 보수주의 집회에 동원하기도 합니다.

‘보수’는 ‘사(私)’를 중시하는 성격이어서 이해관계에 밝고 손해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정의관념이 약하고 때로는 너무 약아 보입니다. 그러나 보수는 사람들이 먹고 사는 ‘사’적 현실 자체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매우 강력한 어젠다(agenda)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에 가장 가깝다’는 이 장점이 경제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보수의 지지기반을 탄탄하게 만듭니다. 보수정당이 쉬운 점은 사실 ‘뭐를 하겠다.’는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수정당이 이런저런 ‘개혁을 하겠다.’고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해대도 세상이 그냥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보수주의 지지자들은 무슨 얘기인지 다 알아듣고, 그냥 찍어줍니다.

‘진보’는 ‘사’를 제한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공(公)’을 중시하는 성격이므로, 이기주의를 제한해서 서로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정의관념이 강하며 다소 이상주의적입니다. ‘현실의 힘겨운 사적 인생에 만족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진보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진보는 사람들이 먹고 사는 ‘사’적 현실을 「고치자」는 것이므로 항상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개혁의 어젠다를 만들어 제시해야만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보수정당의 어젠다인 ‘현실’은 눈앞에 있는 것이어서 알기 쉬운데 진보정당의 어젠다인 ‘개혁’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진보정당이 가지는 가장 어려운 점입니다. 그래서 진보정당이 ‘이런 이유로 저런 개혁을 하겠다.’고 정의감과 열정으로 아무리 진심을 담아 얘기를 해도 사람들은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나한테 손해는 오지 않을까?’하고 의구심을 가지거나 불안해합니다. 진보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나쁜 짓을 수도 없이 하는 보수를 지지하는 사람이 50%나 된다는 것이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현실을 움직여 바꾸겠다는 진보를 지지하는 사람이 무려 50% 가까이 된다는 것이 오히려 대단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정의보다 양식을 구하는 일에 더 집착하는 보수와 양식을 구하는 일보다 정의와 분배에 더 강조점을 두는 진보는 양쪽 다 사회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이해할 만한 존재이지, 처단하고 제거해야 할 악의 진영, 사탄의 진영은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존재와 사고를 부정하고 제거하려는 극우와 극좌입니다. 극우는 세상은 ‘공’이 없는 ‘사(私)’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고, 극좌는 ‘사’가 없이 ‘공’만으로 세상이 굴러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두 가지 극단 모두 ‘사’와 ‘공’이 모두 필요한 인간의 현실에 맞지 않는, 이웃을 심하게 해치는 위험한 생각입니다.

⓶ ‘보수’의 한계와 ‘진보’의 약점 - ‘공’이 없는 ‘사’와 ‘사’를 모르는 ‘공’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진보의 존재를 인정하는 합리적인 보수는 사적 생활의 안정적인 지속을 위해서 필수적인 존재이고,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보수의 존재를 인정하는 합리적인 진보는 사회의 변화를 통한 존속과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아래 도해와 같이, 정상적인 보수는 ‘사’를 정상적인 진보는 ‘공’을 강조하고 더 원하지만, 교집합에 해당하는 ‘비당파적 국가기능’은 다 같이 인정하고 상대방이 가지는 당파적인 입장의 독립적인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보수와 진보는 죽어라고 욕을 하면서 싸워도 자동차의 좌우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처럼 사회가 굴러가게 하는 필수재입니다.
‘공’이 없는 ‘사(私)’는 위험합니다. 위 그림 제일 왼쪽 동심원과 같이 극우적인 성향은 사(私)로 공(公)을 지배하고 사(私)로 공(公)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극우적인 성향은 당파적인 이익을 위해 사회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국가의 비당파적 기능까지도 사적으로 소유하고 동원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월호 사건에 나타난 권력 눈치 보기로 인한 국가기능 마비의 원인입니다. 그리고 극우적인 성향은 자기 원 바깥의 진보라는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하고 배제하려고 합니다(종북좌파 척결의 구호).

그러면 인구 중 절반만 존중받는 국민이 되고 나머지 절반은 투명인간처럼 비국민 취급을 받는 반쪽 나라가 됩니다. 이것이 강경우파 문창극 후보 논란의 본질입니다. 극우적인 성향은 사(私)를 절대화하므로 사적 이익을 위해서 공동체(민족)의 공적 이익을 버릴 수 있고 이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나쁘지 않았다는 식민지근대화론-친일사관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극우적인 성향은 사(私)적 경제활동의 극대화를 위해 공적 조정과 규제를 철폐하려고 하다가 미국의 리만사태와 같은 경제적 재앙을 낳았습니다. ‘사’를 절대화하여 ‘공’을 잃어버린 극우적인 성향은 결국에는 사회에 파탄을 내고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보수주의의 위험은 ‘극우로 경도되기 쉬운 경향성’입니다. 사회 전체가 보수와 진보로 당파를 나누어 청군 백군으로 싸울 때에 극우와 합리적인 보수(온건 우파) 간의 차이와 경계선은 애매해 집니다. 자기편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강경론을 펴거나 싸우다보니 성질이 나서 폭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있지도 않은 종북좌파나 진보진영이 아니라 ‘사’로 ‘공’을 소유하고 파괴하려는 극우적 경향입니다.

‘공’이 없는 ‘사(私)’는 비현실적입니다. 위 그림 제일 오른 쪽 동심원과 같이 극좌적인 성향은 공(公)으로 사(私)를 지배하고 사(私)적 영역 전부를 없애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적 경제를 폐기하고 전적으로 공적인 경제체제를 만들었던 공산주의 실험의 본질입니다. 공으로 사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공의 절대자로 자임한 공산당과 지도자에 권력이 ‘사’적으로 귀속되었습니다. 그 극단적인 경우가 북한의 ‘왕정(王政) 공산주의’라는 역사적 희비극입니다. ‘공(公)’이라는 원(圓) 하나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 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없애려는 잔인한 폭력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무리하게 금지되었던 ‘사’의 반란으로 공산주의체계는 모래성처럼 무너졌습니다. ‘사’가 없는 ‘공’만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역사적 결론이 내려진 셈입니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사실 지금 세상에는 이념적으로 극좌파가 없어졌습니다. 진보정당 사회주의정당도 모두 사적 시장과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인정하는 온건좌파 개량주의적 진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온건 좌파 진보진영의 문제점은 극좌파가 될 위험성이 아니라, ‘사’와 ‘공’의 사이에서 어떤 개혁과 진보를 하자는 것인지 분명한 답안을 제시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불평등의 심화현상에 대해서 강력한 복지와 재분배 의제로 제시했다가는 세계적 자본주의의 생존경쟁을 보게 되면 자신감을 잃고 시장과 기업의 드라이브에 힘없이 끌려갑니다. ‘공’적 지향과 ‘사’적 현실 사이에 끼어서 확신 없이 우왕좌왕하는 것, 이것이 진보의 가장 큰 문제이자 어려움입니다. 진보가 왼쪽으로 가면 현실적인 자신감을 잃고, 기가 죽어서 오른쪽으로 가면 진보인지 보수인지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이 소리도 저 소리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용각산(龍角酸)’이 되어버립니다. 진보의 약점은 ‘사’를 잘 다룰 줄 모르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사’적 요소를 잘 다루면서 ‘사’적 영역에서 살아가는 생활인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변화’의 의제를 만드는 것이 사회 전체를 위한 진보의 숙제입니다.

4.4. ‘사(私)’와 ‘공(公)’과 ‘초월(超越)’의 관계 – (기독교인의) 사적/공적 인생과 초월적 신앙

기독교인의 삶에도 마찬가지로 먹고 사는 일을 하는 사적인 영역과 시민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공적 영역, 그리고 하나님(신)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초월적 신앙적 영역이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인생에도 사와 공과 초월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12:29~31)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Love the Lord your Go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이 말씀 속에는 기독교인의 사랑의 대상이 세 가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 사랑(God)’과 ‘이웃 사랑(neighbor)’과 ‘자기 사랑(yourself)’입니다. 여기에서 자기 사랑은 인생의 사적 측면에, 이웃 사랑은 인생의 공적 측면에, 하나님 사랑은 인생의 초월적 측면에 각각 해당됩니다.

기독교인의 인생에서 초월적 신앙의 영역은 인생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한계가 드러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끝없는 생업과 노동과 경쟁과 성취욕에 지친 사람에게 초월적 신앙생활은 허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세상의 성공과 성취에 대한 끝없는 경배가 무의미한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정치적 이상과 쟁투의 한계에 부닥쳐 허무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신앙생활은 보다 영속적인 이상과 소망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초월적인 요소에는 우리의 세속적인 사적 인생이나 공적 인생보다 더 크게 우리를 매혹시키고 위로해 주는 면이 있습니다.

문제는 인생의 사와 공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기독교 신앙의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기독교인이 그 초월 속에서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세상의 사적 인생과 공적 인생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초월’만으로는 기독교인의 인생이 다 설명될 수 없습니다. 다시 이 글의 관심인 인생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돌아가서, 기독교인의 인생에서 초월적인 영역이 기독교의 인생의 사적 영역 및 공적 영역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 가지의 관계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초월’로부터 독립적인 기독교인의 ‘사’와 ‘공’」, 둘째는 「‘초월’의 거룩함에 영향을 받는 기독교인의 ‘사’와 ‘공’」, 셋째는 「거꾸로 ‘초월’을 압도해서 초월에 영향을 주는 기독교인의 ‘사’와 ‘공’」입니다.

첫째는 「초월과 독립적인 기독교인의 사와 공」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인 면에 의해서 별로 영향 받지 않고 그 자체의 독립적인 작동원리에 따라 영위되는 기독교인의 사적 인생과 공적 인생을 의미합니다. 우선 먹고 살기 위한 사(私)적 생업을 봅니다. 사실적인 측면(Sein)에서, 이런저런 직장과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가는 사적 생활의 현실적 조건과 형태와 원리는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독교인에게나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시험에 합격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일을 잘 하려면 성실하게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규범적인 차원에서(Sollen), 기독교인이 일반인보다 사적인 경제생활에서 더 양심적이고 더 희생적인가? 현실은 ‘글쎄!’입니다. 아주 착하고 헌신적인 기독교인도 있지만 얄미울 정도로 약고 영리한 기독교인도 많기 때문에, 더하고 빼면 평균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독교인의 공(公)적 인생, 정치적 관점과 실천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뜻에 의한 것인가 각 사람의 사회적 입장과 가치관에 따른 것인가?」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상호독립성’에 주목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기독교인이 보수정당이나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신앙의 ‘초월’적인 면에 의한 것보다, 그의 시민적 관점에서의 ‘공’적 판단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신앙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그의 시민적 정체성과 가치관에 근거하여 정치적 입장을 결정하는 측면이 더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사’적 조건에 영향을 받아 ‘사’가 강한 사람, ‘공’을 싫어하는 사람은 보수를 지지하고 ‘사’가 약한 사람, ‘공’을 좋아하는 사람은 진보를 지지하는 것이지요. 보통 믿기 전에 야당이던 사람은 예수를 믿고도 야당이고, 원래 여당인 사람은 예수를 믿고도 여당인 경우가 많습니다. 색깔이 조금 옅어지거나 짙어질 뿐입니다. 성경에도 열심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마땅히 보수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거나 독실한 기독교인은 반드시 진보정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율법이나 종교적 계명은 없습니다.

우리가 공적/정치적 영역에서의 선택에 대해서, 기독교 교리가 아닌 공적 영역의 일반 원리에 따라 기독교인의 다양한 사고와 행동을 인정하면, 기독교인들에게도 정치적 자유를 주고 하나님께도 정치적 자유를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의 신앙(초월적인 영역)과 기독교인의 사적/공적 인생 간에 다른 원리로 움직이는 독립적인 영역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건강한 인생과 기독교 신앙의 생명력 있는 전개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초월적인 영역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적/공적 영역의 인생」입니다. 시험을 잘 보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지만, 신앙과 기도는 왜 공부를 하는지 이유를 더 분명하게 하고 마음을 평안하게 해서 시험을 잘 보는 것을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생업에서 성공하려면 열심히 일을 해야 하지만, 신앙과 기도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잘 참고 견디는 것을 가능하게 해서 직장생활의 성공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사회적 부정의와 불의를 없애기 위해서 공적으로 노력하는 기독교인에게 신앙과 기도는 자기의 연약함과 흔들림을 이기고 끝까지 분투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줄 수 있습니다.

좋게 얘기하면 이런 내용인데, 정색하고 생각해서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데, 기독교인이 사적 인생과 공적 인생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고 형통하는 것을 기도하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도움(응답)을 받는 것이 과연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인 지향에 부합하는 것이냐?」 라는 질문이 나오면 이 문제는 어려워집니다. 나의 사적, 공적 인생에 대한 세상적 욕구에 하나님을 동원하고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앙적 명제와, 나의 실제 인생에서 주어지는 눈앞의 사적, 공적 과제를 놓고 괴로워하면서 도대체 고상한 기도만 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현실적인 항변 간의 씨름이 끊임없이 전개되는 영역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인 원리를 ‘자기부인과 십자가’로 세상의 이익과 성공에 대한 자랑과 욕망을 억제하라는 것으로 본다면, 지금 한국교회(개신교)의 현실에서 기독교 신앙의 ‘초월’은 기독교인의 ‘사’와 ‘공’에 대해서 거룩한 억제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인 기능을 ‘인간의 실존적 불안과 고통에 대한 위로와 격려’로 본다면 기독교 신앙의 초월은 기독교인의 사적, 공적 인생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公)’적인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의 사적 욕망과 기도를 엄격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것 같고, ‘사(私)’적인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사적 욕망의 연약함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언제든지 용서해 주시려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의 체감적 신앙은 거룩한 하나님의 ‘초월’ 중 인간에게 자기부인을 까다롭게 요구하는 공(公)적 속성의 하나님보다 인간의 자기사랑을 친절하게 인정해주는 사(私)적 속성의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합니다.

셋째는 「초월적인 영역에 거꾸로 영향을 주는 사적/공적 영역의 인생」입니다. 주로 기독교인의 인생에서 ‘사’적인 영역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초월’적인 영역을 압도하는 경우입니다. 나의 ‘사적’ 성공을 축복해주는 ‘초월’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본령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인들은 한편으로는 자기의 욕망을 누르려고 애쓰기도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과 현실의 압도적인 힘으로 인해서, 우리의 개인적 기도제목은 대부분 나의 ‘사’적 성공입니다. ‘기독교인의 인생에서 사적 욕망이 기독교의 초월보다 더 큰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인간의 연약하고 이기적인 본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므로 이 현실은 쉽게 달라지기도 어렵습니다.

문제는 ‘기독교인의 사(私)가 초월(超越)을 압도하는 현실’을 「심각한 문제로 인정하는가? 심각한 문제로 인정하지 않는가?」 하는 기독교인의 반응에 달려있습니다. 이 현실을 인정하면 기독교인의 ‘사’도 겸손하게 되고 기독교인의 ‘초월’도 겸손하게 됩니다. 내 신앙을 소중히 여기지만 또한 쉽게 만족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자기부인과 자기사랑 사이에서 심각하게 씨름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해도 심각한 신앙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경우에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로 ‘기독교의 초월’은 거룩한 것이지만 ‘현실적인 기독교인의 초월’은 아직 ‘사에 제약되어 거룩함에 도달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에 압도되거나 사로 왜곡된 초월」을 「’온전한 초월’과 ‘거룩한 사’」라고 주장하는 신앙적 착오와 오만이 발생합니다. 현실을 인정하면 ‘겸손한 사와 겸손한 초월’이 되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교만한 사와 오염된 초월’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적 요소가 ‘초월’을 압도하고 왜곡시키는 현상은 기독교인 개인의 신앙생활 차원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개별교회 중심(개교회주의)의 자유시장 경쟁체제로 굴러가는 한국 개신교의 교회구조 차원에서도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느껴집니다. 가톨릭 천주교회와 비교하면 한국 개신교회의 ‘사’적 성격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한국 천주교의 경우에는 약 5천명의 사제가 하나의 교단 3개의 대교구(서울, 광주, 대구)에 약 1,700개의 성당에서 약 550만 명의 교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고 합니다(2013년 한국 천주교 통계). 성당은 교단의 소유이고 사제들은 교단에서 임명되어 보수를 받고 임지를 발령받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에는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목회자들이 200개가 넘는 교단으로 나뉘어 5만개 이상의 교회를 운영하면서 8백 수십만 명의 신도와 함께 신앙생활을 합니다. 개신교의 목회자들은 일부 교단을 제외하고는 교단이 아닌 개별교회로부터 보수를 받고, 교회들도 대부분 개별 교회의 경제적 자립구조로 운영됩니다. 천주교의 교회구조가 ‘사’적인 면보다 ‘공’적인 면이 강하다면, 개신교의 교회 구조는 지극히 ‘사’적 개별적이고, ‘공’적인 면이 거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한국교회(개신교)가 공교회성 보편교회성을 회복하고 신앙의 공적 성격을 회복하는 데에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집니다.

4.5. ‘공’과 ‘초월’의 혼동 -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기독교

⓵ ‘초월(超越)’과 ‘공(公)’의 관계 – ‘하나님’과 ‘보수’와 ‘진보’

사람들의 삶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교차를 통해서 구성됩니다. 사를 좀 더 중시하는 보수주의자와 공을 좀 더 중시하는 진보주의자들이 함께 다투고 협력하며 사회를 유지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국민 전원이 보수주의자가 되어 화석처럼 굳어버린 사회와 국민 전원이 진보주의자가 되어 매일매일 지축이 흔들리는 사회는, 진보주의자에게도 좋지 않고 보수주의자에게도 좋지 않고 하나님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진보주의자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은 보수주의에도 들어있고 진보주의에도 들어있습니다. 성경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은 사회를 존속시키고 유지하는 ‘이웃사랑’의 공적 메커니즘으로서 비당파적인 국가기능(사법/조세 기능)을 존중하라는 말씀으로 ‘보수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성경적 근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3장을 불의한 독재 권력에도 무조건 절대복종하라는 극우적인 렌즈로 읽으면 오만하고 불의한 권력을 규탄하는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서와 세상의 권력에 맞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나누어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라는 이사야서 58장의 하나님 말씀과 누가복음 3장에서 이를 원용한 예수님의 첫 번째 회당 설교는 진보주의의 정의감을 서포트합니다. 그러나 이 것이 곧바로 진보주의의 혁명적 의제로 넘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감히 생각건대 하나님은 「제대로 된 보수」와 「제대로 된 진보」와 「양자 간의 제대로 된 싸움과 협력」을 원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인이 보수를 지지하거나 진보를 지지할 때에는, ‘초월’적인 신앙에 의지해서 한쪽을 찍는 것보다는 자신의 ‘공’적인 시민적 입장과 양심에 따르는 것이 더 건강하고 하나님의 뜻에도 맞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개신교가 ‘공적’ 의견에 있어서 보수 쪽에 치우친 양상을 보여주는 것에는 개교회주의로 운영되는 한국 개신교의 ‘사’적 성격이 무의식적으로 반영이 된 면이 있습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사’적 요소가 강해지면 자연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집니다. 하나의 교회가 성장해서 ‘사’가 지극히 강해지니 교회 차원에서 공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수적이신 것이 아니고 교회가 보수적이 된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 개인이 보수주의자인 것이 문제될 일이 아니고 교회 지도자 개인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도 개인의 시민적 권리로서 문제 삼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기총의 경우처럼 보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경우입니다. 이 때에는 하나님이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분으로 알려지고 교회가 세상의 당파적 이익에 이용되며 교회 속의 절반의 신도가 마치 하나님에게 혼난 사람처럼 불필요한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⓶ ‘초월(超越)’을 통한 ‘공(公)’의 보완
– 보수와 진보의 전투적 공존, ‘공적(公的) 자기부인’과 ‘공적(公的) 이웃 사랑’

각자의 입장과 관점과 이익에 따라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다투는 일’은 사람들의 몫이고 사람들이 잘 하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로 나뉜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의 존재와 필요와 요구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며 함께 토론하고 살아가는 일은 사람들이 잘 하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인 면이 큰 도움을 줄 정치의 영역이 있습니다.

우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진보주의자가 보수주의자의 완고함을 이해하고 보수주의자가 진보주의자의 아우성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적(私的)인 전도와 구제와 봉사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가장 치열한 사회적 정치적 싸움이 벌어지는 공적(公的) 현장에서 힘을 쓸 수 있는 하나님의 ‘정치적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 양 진영 간의 전투적인 협력에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8복 중 일곱 번째 복인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5:9)라는 말씀이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고통과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안정(보수)적인 변화(진보), 변화(진보)를 통한 안정(보수)」을 가능케 하는 ‘화평케 하는 자’들의 존재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의 존재를 배척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극우와 극좌는 기독교 신앙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제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복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십계명 중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너희 앞에 두지 말라‘는 첫 번째 계명도 극우와 극좌의 극단을 배척하는 기독교의 정치적 원리입니다. 인생의 ’사‘적 요소, 경제적 이익의 추구를 모든 것의 근본원리로 삼는 극우는 경제적 이익을 신으로 숭상하는 물신주의(物神主義)를 기초로 하고, 인생의 ’공‘적 요소, 공공이익을 위해 사적 욕망이 사라질 수 있다고 꿈꾸었던 극좌 공산주의는 인간의 선함을 신적으로 믿었던 셈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악을 판단하는 나무의 과실(선악과)을 먹지 말라‘는 창세기의 원시(原始) 계명 또한 사람이 정치와 이념의 영역에서 「극우의 자리에 앉아서 진보와 좌파 모두를 악하다고 심판하고 정죄하지 말 것」과 「극좌의 자리에 앉아서 보수와 우파 전부를 악인으로 심판하고 정죄하지 말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습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신적 ‘초월’은 세상의 ‘공’적 영역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싸움에 직접 뛰어들어 어느 한쪽 편을 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은 사람들이 공적 영역에서 싸우고 다툴 때에, 각 진영이 자기의 이익과 감정을 어느 정도 ‘부인(否認)’하고 상대방 진영의 얘기를 이해하고 화평을 도모하면서 건강한 ‘공’을 형성하는 정치적 원리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공’의 영역에서 함부로 선악을 판단하며 정죄하는 극우와 극좌를 정죄합니다.

⓷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기독교 - 개인의 ‘공’적 의견과 하나님의 ‘초월’적 뜻의 혼동

기독교인도 누구든지 시민으로서 자기의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실천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정치적 의견과 관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하나님의 뜻’으로 주장되는 많은 경우에는, 개인의 ‘공’적 의견과 하나님의 ‘초월’적 뜻을 혼동하는 왜곡이 나타납니다. 극우나 극좌적인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존재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정죄하고 심판하려는 종교적 태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여 ‘선악과를 상시 과다 복용하는’ 선악과 중독증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언자적 자부심으로 반대진영의 정치적 생각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태도에는 이웃과 동료를 ‘시험(temptation)에 들게 하는’ 악(evil)이 들어 있습니다. 정견이나 처지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멸시하고 공격하는 태도에서 공감능력을 상실한 ‘긍휼 없는 기독교’가 나타납니다.

4.6. ‘사(私)’에 오염된 ‘초월(超越)’, ‘공(公)’이 사라진 교회

⓵ ‘초월(超越)’과 ‘사(私)’의 관계 – ‘자기 사랑’과 ‘자기 부인(否認)’의 갈등

사람은 하나님이나 이웃보다 자기를 더 사랑합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의 연장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사적 생존과 생활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하나의 생명 개체로서 사람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기독교인의 인생에서 신앙, 즉 초월적 영역은 인생의 사적 영역의 한계가 드러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먹고 사는 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면서 돈을 벌 준비를 하는데 수십 년이 걸리고, 막상 취직을 해도 다른 사람 밑에서 참고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은 쉽지가 않고, 경영자가 된다고 해서 세상이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업의 성패의 위험으로 인생이 아슬아슬해 집니다. 돈을 못 버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돈을 꽤 버는 사람도 사적 인생의 갈증과 긴장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사업이 망하거나 직장이 흔들리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기거나 애가 속을 썩이거나 병이 나서 아프거나 그렇게 하다가 나이를 먹어서 한 인생이 끝납니다.

사적 인생의 한계가 보이는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초월적인 신앙은, 땅에 붙어서 끝이 없는 생업과 노동에 지친 사람에게 눈을 돌려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줍니다. 그리고 인생의 사소한 일들에 막힌 정신에 삶과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 더 커다란 일을 생각하고 꿈꾸는 고상한 소망을 줍니다. 사(私)적인 인생은 힘들고 초월적이고 영적인 신앙은 기쁨과 안식을 줍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해서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여러 가지 신앙생활에 애를 씁니다. 문제는 신앙의 ‘초월’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과 영이 고양되어도, 우리의 몸은 이 땅에서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땀을 흘리며 주변 사람들과 씨름을 하며, 돈을 벌기 위해 머리를 쓰고 애를 쓰고 속을 썩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이 사적 인생의 영역을 넘어 초월적 영역을 맛보았어도 우리의 인생은 사적 영역에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가는 일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종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라는 주기도문(主祈禱文) 네 번째 기도를 통해서 우리 인생의 사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초월’과 ‘사’의 관계는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주제입니다. 초월을 믿는 기독교인이 하는 대부분의 기도제목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적 인생의 과제와 목표들입니다. 학업과 취업과 직장과 기업과 사회에서 고통을 겪지 않고 원하는 것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 기도의 내용들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자기 사랑’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믿음의 대상인 예수는 세상에서 학업과 취업과 직장과 기업과 사회에서의 사적 성공을 구하지 않고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은 예수님에게 우리의 ‘사’적 이익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조금 맹랑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十字架)를 매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쳤는데(마태복음 16:24),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실 세상에서 ‘자기를 인정(認定)받고 자기 등의 십자가(十字架)를 벗고 싶다’는 기도를 하고 삽니다. 기독교인의 사(私)적 인생은 ‘자기 사랑’을 주장하고 기독교인의 초월적인 신앙은 ‘자기 부인’을 주장하며 서로 맞섭니다. ‘초월’은 ‘사’를 제한하려고 하지만 ‘사’는 ‘초월’을 이용하고 ‘사’의 욕망으로 ‘초월’을 오염시키려고 합니다. ‘초월’이 ‘사’를 제한하는 곳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힘이 나타나지만, ‘사’가 ‘초월’을 이용하는 곳 초월이 사에 의해 오염된 곳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욕을 먹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⓶ ‘사’에 오염된 ‘초월’, ‘공’적 기능이 없는 교회

한기총 매표(買票)사건, 교회세습, 삼일교회 사건, 사랑의교회 사건, 여의도순복음교회 사건 등 일련의 교회 스캔들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개신교)의 대표적 교회, 교단연합체 및 문제된 목사님들의 행동과 사고가 한국 사회에서 시민(공민)들의 ‘공’생활이 규율되는 원리에 엄청나게 못 미친다는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압도적인 현상인 개교회주의는 자연적으로 논리적으로 한국 개신교에 세상의 ‘사적’ 요소를 깊숙이 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개별교회는 경제적으로 하나의 경영단위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본의 아니게 ‘초월’이 긴밀하게 ‘사적’인 것과 결합되는 양상이 벌어집니다. 한국의 초대형교회 창립자의 가족들이 재벌그룹의 창업자 가족과 같은 행동양식을 나타낸 것이 그 극렬한 예입니다. 이 사례에서는 확실히 ‘초월’이 ‘사’에 압도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초월’적인 교회, 신도들이 모인 ‘공’적인 교회가 ‘사’적인 소유재산처럼 자녀에게 상속되는 교회세습 또한 초월이 사에 압도된 모습입니다. ‘공’이 ‘사’에 압도된 북한의 세습 공산주의와 ‘초월’이 ‘사’에 압도된 남한의 세습 기독교는 본질의 훼손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초월’과 ‘공’의 관계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개인의 이익과 욕망이 주도하는 ‘사’적 요소의 극단적인 전개를 경계하고 제한하는 ‘초월’의 자기부인 원리는, 사실 개개인의 신앙적 양심이나 주관적(主觀的) 각오보다도 개인의 ‘사’적 이익을 공동체적으로 제한하는 객관적(客觀的)인 사회의 ‘공’적, 정치적 기능에 의하여 더 잘 실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법(公法)의 처벌이 있으니 계명을 어기는 죄를 범하는 일이 무섭고, 공적(公的) 세금이 있으니 욕심 많은 개인의 지갑에서 고아와 과부를 돕는 사회의 복지비용이 나오는 것이 ‘사’를 제한하는 ‘초월’과 ‘공’의 협력을 보여줍니다. ‘초월’과 ‘공’이 힘을 합하여 가장 힘이 센 ‘사’와 맞서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공’의 활발한 협력 없이는 ‘초월’이 ‘사’를 제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사’적 요소가 너무 강하고 ‘공’이 거의 무력해진 한국 교회에서 ‘사’가 ‘초월’에 의한 제한을 받지 않고 오히려 ‘초월’이 ‘사’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 현상과 연결됩니다.

만일 한국 개신교가 교회 내에서 보편교회(universal church)로서의 ‘공’적인 기능을 유지했다면 적어도 여의도순복음교회/삼일교회/사랑의교회 사건과 같은 경우에 세상의 공적 기준에도 못 미치는 처리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사자들과 개별 교회는 신앙적 고난과 시험이라는 ‘초월’로 변명을 하지만 당사자들이 아닌 사람들은 기독교 교인이거나 교인이 아니거나 모두 그것이 ‘사’적인 욕심의 문제라는 것을 다들 압니다. 결국 욕먹는 기독교(개신교)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현재의 기독교(개신교)에 ‘공’이 없고 너무 팽배해진 ‘사’에 의해 기독교의 초월적 신앙이 오염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 마치는 말 : 욕먹는 기독교를 위한 모색, 기독교 평신도의 분발

평신도의 입장에서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조심스럽습니다. 첫째는 내가 잘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고 둘째는 평신도 입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막연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기독교 평신도들이 평소 세상의 먹고사는 일에 대해서는 각자 뚜렷한 소견이 있고 정치적 논쟁에 대해서도 치열한 정견을 표명하면서도, 교회와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침묵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과 신앙에 대해서 너무 태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을 것이고, 뭔가 해결의 방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욕먹는 기독교에서 ‘욕하는 외부’를 대항하고 방어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욕먹는 내부’의 문제점을 확인하고 그것을 고치는 길을 찾아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동차에서 옆에 오는 차를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死角地帶), 기독교인들이 스스로의 문제점을 보지 못하는 블라인드 사이드(blind side)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국교회의 블라인드 사이드는 「한국교회 및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사(私)’에 치우쳐서, ‘공’적 감수성을 상실하고, 신앙의 ‘초월’적인 면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적인 기독교, 사생활에만 집중하는 기독교,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기독교, 공감능력이 약한 ‘긍휼이 없는 기독교’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기독교인 모두가 책임이 있습니다. 욕먹는 문제를 야기한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교회들도 문제가 있지만, 침묵하며 따르며 신앙을 소비(消費)하는 800여만 평신도 모두의 책임이 더 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앙의 ‘초월’로 세상과 인생의 ‘사’와 ‘공’적인 문제들을 다 알고 있다는 판단에 대해서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교계의 지도자들과 교회연합단체들은 일상적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한쪽으로 편향된 입장을 보이는 것이 수십만 수백만 기독교 평신도들을 시험에 빠뜨리고 하나님께 큰 손해를 야기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평신도들은 자본주의적 소비자 신앙의 행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수많은 교회 중 맛있는 교회를 상품처럼 골라 설교와 신앙 서비스를 소비하며 사생활(私生活)에만 적용하는 소비적 신앙생활, 자기부인의 껄끄러운 씨름보다는 자기사랑의 응답에만 매달리는 사(私)적 신앙생활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그동안 몇 십 년 간 교단의 세포분열과 일부 교회의 폭발적 성장을 따라 고착화된 한국의 개교회주의의 심각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건물이라는 벽을 넘어서 한국 개신교의 공교회성 보편교회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목사님들이나 교단들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교회 운영과 교회 제도의 부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분발과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들의 신앙은 개별교회 건물의 울타리를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은 신앙의 주된 현장을 일요일/교회가 아니고 평일/자기의 생업의 현장으로 생각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개별교회의 틀을 넘어 한국교회를 전체로서 바라보는 차원에서 서로 연대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나누는 보편교회적 신앙실천의 길을 새로 개척해내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문제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 문제가 숨겨져 있는 것보다는 더 좋은 일입니다. 문제가 애매하면 고칠 수도 고치지 않을 수도 없지만, 문제가 분명해지면 고장 난 곳을 발견해서 고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 말씀처럼, 기독교(개신교)인들에게 전면적인 회개와 회심이 필요합니다. 이 회개는 주관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잠깐 고양되었다가 조금 지나면 아무 차이가 없는 그런 회개가 아니고, 현실과 신앙을 종합해서 현실적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이고 진지한 회심이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일시적 주관적 회심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의 ‘초월’적인 영역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인생의 세 가지 영역 모두에서의 회개와 회심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각각 ‘하나님 사랑(초월)’과 ‘이웃 사랑(공)’과 ‘자기 사랑(사)’의 진정한 방향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저한 고민을 요구합니다.

‘초월’적인 면에서의 회심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자기사랑’에 너무 너그러운 편안한 기독교에서 ‘기독교인들의 자기부인’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조금 불편한 기독교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제1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면에서의 회심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인의 ‘공생활(公生活) 원리’를 새로 만들어서 서로 배우기 시작하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사(私)적인 ‘이웃 사랑’을 넘어 공(公)적인 ‘이웃사랑’의 영역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점잖고 착한 크리스챤은 세월호 사고에서 무능하고 무책임한 공무원으로 귀결됩니다. 나의 삶과 직업을 통해서 이웃의 삶과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공적 이웃사랑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주기도문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사’적인 영역에서의 회심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규정하는 ‘자기사랑’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먹고사는 일인 ‘사’의 힘, ‘자기 사랑’의 힘은 마치 ‘날뛰는 호랑이’처럼 너무 세서 기독교 신앙의 ‘초월’조차도 기독교인의 ‘사’의 고삐를 잡아 통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기독교인과 교회에서 ‘사’적 자기사랑이 ‘초월’적 자기부인을 이기고 있다는 사실(事實)」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사’적 회심의 출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적(私的) 기독교를 지향하는 보수적 태도는 마치 ‘날뛰는 호랑이(사적 욕망)를 너무 사랑하다가 그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공적(公的) 기독교를 지향하는 진보적 태도에는 ‘날뛰는 호랑이(사적 욕망)의 힘을 무시하다가 그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것’ 같은 위험과 한계가 있습니다. 사적(私的) 기독교를 극복하려는 공적(公的) 기독교 지향이 먹고사는 경제생활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사적’ 기독교인들의 고민과 갈등을 담아내지 못하면 다시 ‘다수의 사적 기독교인과 소수의 공적 기독교인’이라는 체계를 고착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욕먹는 기독교를 만든 것은 ‘사’와 ‘공’과 ‘초월’ 사이의 혼동이고, 이 혼동은 특히 ‘공’과 ‘초월’을 압도한 ‘사’-자기사랑의 힘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먹는 기독교를 극복하고 기독교 신앙의 ‘초월’과 ‘공’과 ‘사’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모든 문제를 야기한 가장 강력한 요소인 인간의 자기사랑 즉 인생과 교회의 ‘사’적 측면을 어떻게 잘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정확한 연구와 노력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끝)
이 글은 인문학 서평 사이트인 아포리아 홈페이지(바로가기)에 칼럼으로 올라간 글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이병주 변호사와 아포리아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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