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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목사들이 선교사로 지원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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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목사들이 선교사로 지원했으면 좋겠어요”
  • 정윤석
  • 승인 2013.04.0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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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소통 도구로 삼아 네팔서 선교하는 최중림 목사

최중림 목사(도곡교회 원로, 74세)는 2007년에 경기도 남양주의 도곡교회를 조기 은퇴했다. 당시 68세였다. 2~3년 일찍 은퇴한 이유는 세상에서 설교가 제일 힘들어서였다. 한가지 일을 10년을 하면 전문가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설교가 그랬다. 해도 해도 힘들었다. 가끔 과거의 원고를 들춰봤다. ‘아니, 내가 이런 멋진 설교도 했네? 나이도, 경험도, 경륜도 늘어만 가는데 왜 설교는···.’ 최 목사의 중단되지 않는 고민·갈등이었다.

▲ Senior pastor가 미개척 해외 선교지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최중림 목사(사진 손우진 집사)

아내의 삶도 조기 은퇴를 결심한 계기가 됐다. 자신을 돕느라 아내의 인생은 피폐했다. 목사는 목회하면서 스트레스라도 풀었다. 아내는 스트레스 풀 기회를 박탈당했다. 화장을 조금 진하게 해도, 옅게 해도 문제였다. 옷 입는 것도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었다. 어느 장단에 춤출지 모르는 게 아내의 삶 같았다. 최 목사는 자신이 빨리 은퇴해야 아내의 심적 고통도 끝날 것 같았다. 한번도 제대로 쉰 적 없는 아내에게 안식을 선물하고도 싶었다. 교회 건축할 때는 노동도 마다하지 않던 아내였다.

주변에서 만류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선배 목사님들이 은퇴를 빨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중대형 교회 목사님들은 은퇴하면 할 거라도 있죠. 우리 같이 작은 교회는 할 게 없어요. 하지 말아 주세요!”

그래도 최 목사는 은퇴를 결심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막연하게 ‘선교를 나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목회를 제대로 못했으면서 후임 목회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면 되겠어요? 목양지를 떠나야지!” 구체적인 선교지역을 정하지 않았다. 그저 필리핀, 미얀마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네팔에서 ‘콜’이 왔다. 간다고 하자 반대에 직면했다. 나이도 많고 암 수술을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여 곡절 끝에 2010년 10월 네팔행 비행기를 탔다. 네팔로 갈 때 최 목사는 이런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가 네팔 가서 처음 전도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줄 알고 네팔에서 사역하겠습니다.”

최 목사에게는 예쁜 네팔 손녀 3명이 있다. 첫째 손녀는 엘리사(25)다. 2010년 10월 네팔에 갔을 때 작은 변두리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카운터를 보는 엘리사가 눈에 띄었다. 키도 훤칠하고 눈도 큰 미인이었다. 사진을 찍어줬다. 사실 최 목사에게는 특기가 있다. 사진 찍기다. 도곡교회에서 목회할 때 60살 이상의 노년 성도들 120명의 장수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네팔에서 사진 촬영의 첫 모델이 엘리사였던 셈이다.

첫날은 호텔에서 두 번째 날은 호텔 밖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다음날은 엘리사의 집에 갔다. 사진첩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추억이 될 만한 사진이 엘리사에게 없었다. 엘리사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최 목사는 그들에게 추억을 남겨주기 시작했다. 엘리사에게는 특별 미션을 주기도 했다. “엘리사, 너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는 예쁘다, 아름답다’고 큰 소리로 말해라!” 그녀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사진으로 친해진 엘리사가 최중림 목사의 네팔에서의 첫째 손녀이자 전도의 첫 열매가 됐다. 나중에 엘리사는 네팔의 지역 미인대회에 출전한다.

▲ 첫째 손녀 엘리사

엘리사의 첫째 오빠에게는 간질이 있었다.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그를 보던 부모가 참다 못해 최 목사를 붙들고 물었다. “목사님, 한국에서 간질 약을 얻을 수 없어요?” 최 목사는 엘리사의 오빠를 한네(한국네팔)친선우호병원에 데려간다. “내가 안수하고 기도하고 치료받도록 도와 줄테니 너는 믿음으로 받아 들여라!” 엘리사의 오빠는 무릎을 꿇고 안수를 받는다. 한네친선병원에선 새롭게 들여온 의료장비로 치료를 진행했다. 다행히 효과가 너무 좋았다. 그의 부모는 마음이 녹아 내리며 최 목사를 붙들고 엉엉 울었다. 이젠 최 목사를 보기만 해도 눈물이 글썽글썽한다. 언젠가는 최 목사를 향해 ‘하나님 같은 분’이라고 했다. 그런 부모를 붙들고 최 목사가 말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예요. 하나님을 소개하는 사람이죠.” 그러면서 처음으로 최 목사는 엘리사의 부모에게 예수를 믿자고 말했다. 이후 그 부모는 물론 간질환자였던 오빠, 불교승려였던 둘째오빠까지 모두 예수를 믿기로 하고 교회에 등록했다.

사진으로 맺어진 전도의 열매였다. 지금도 최 목사는 네팔 여기저기서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너무 예쁘다”는 말 한마디면 된다. 사진을 찍으면서 대화하고, 사진을 뽑아주면서 만난다. 사진을 찍으면서 최소 4~5번은 한 사람을 접촉한다. 친숙해지면 최 목사는 “너, 내 손녀해라!”고 말한다. 이렇게 3명의 손녀가 생겼다.

최 목사는 이제 네팔이 자신에게 주어진 선교지라는 확신을 얻었다. 최 목사는 3월부터 4월까지 근 1개월의 기간 동안 한국에서 지냈다. 고질적인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수술을 한 뒤 자녀들이 말했다. “아빠, 이렇게 수술하고도 네팔로 다시 갈 거예요?” 최 목사 대신 아내가 말했다. “아빠는 네팔로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거야. 우리가 말릴 수 없다.”

▲ 교회 건축 중인 네팔 현지 교인들

4월 2일, 최 목사는 네팔로 출국했다. 그는 한국에 있을 때도 ‘네팔로 빨리 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앞으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16시간 떨어진 서쪽 땅 끝으로 복음을 들고 갈 계획이다. 2010년 10월, 네팔로 출국한 지 2년 조금 지나서 세운 교회만도 8개다. 하나님께서 많은 후원자를 붙여 주셔서 가능했던 일이다. 이젠 복음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사역의 장을 넓히려 한다. 기후가 열악하고 날씨도 추운 지역이다. 최 목사는 자신 있게 말한다. “원로 목사들이 선교사로 가는 게 최적이다.” 아무리 사명감 있는 선교사들도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지역으로 선뜻 들어가기가 부담된다. 자녀 양육·교육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자녀를 다 키우고 목회 경험도 풍부한 SENIOR PASTOR들, 사명을 위해 모든 걸 훌훌 떨치고 도전할 수 있는 원로 목사들이 외국 선교사로 많이 나가면 좋겠다는 게 최 목사의 요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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